우리 나라에서 차 문화가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한말에 이르러 개화의 물결을 타면서이다. 서양 외교
사절을 통해 소개된 커피 마시는 풍속은 고종을 비롯한 당시 상류층 개화파 인사들에게 널리 퍼졌다.
당시 고종의 사랑을 받던 손택이라는 독일계 여인은 자신이 정동에 지은 손탁 호텔에서 커피를 판매함
으로써 차 문화 보급의 선구자가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다방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이후의 일이다. 1923년 명동에 '후다미'라는 다방이 문을 열었고 이어 충무로에 '금강산'이 문을 열었다.
이들 다방은 모두 일본인이 차린 것이고 위치도 일본인 촌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일본인을 상대로 했
다.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것은 1927년 관훈동 입구의 '카카듀'라는 다방이 최초이며, 뒤를 이어 '트로이
카', '멕시코', '제비' 등이 생겼다. 다방은 '유성기'와 '전축' 때문에 번창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유성
기는 웬만한 서민들은 구경조차 하기 어려운 고급품이었다. 당시 유성기는 장안의 몇 안 되는 다방이나
신식 귀족들에게 보급되면서 식민지의 애환을 달래는 동무가 되기도 했었는데, 암울했던 그 시절 문약
한 지식인들에게는 다방이나 카페의 유성기에서 흘러 나오는 <사의 찬미>니 <황성 옛터>니 하는 노래
가 큰 위안이었다. 정치 문화의 철저한 봉쇄 속에서도 이들은 음악 다방에 모여 한 가닥 문화의 명맥을
이어 갔던 것이다. 문인, 예술가들이 자주 이용했던 '다방 문화'는 이내 일반인들에게도 번지게 되었고,
다방은 자연스럽게 만남과 대화의 장소로 애용되었다. 해방이 되면서 다방 문화는 활짝 꽃을 피웠다.
'플라워', '휘가로', '낙랑', '모나리자' 등이 다방이 문화 예술인의 사랑방으로 이름을 떨쳤다. 개인의 많은
음반을 소유하기 힘든 경제적 사정과 FM 음악 방송이 없었던 관계로 음악 다방은 갈수록 유행이었다.
6·25 동란중인 1951년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가 대구역 앞 행촌동에 문을 열
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서는 '르네상스'와 '아폴로'가 쌍벽을 이루며 음악 감상실 문화를
선도했다. 이 시절의 대학 풍속도가 어떠했는가는 1962년 8월 10일자 조선일보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이 신문은 '대학생들의 유일한 안식처'라는 제목 아래 시내 중심부에 있는 음악 감상실에 하루 1천 5백
명이 출입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전축이 거실이나 안방을 장식하는 필수품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960년대 초반 들어 전축이 일반인에게 밀착되면서 음악 감상은 고상한 교양의
하나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창업된 천일사의 '별표 전축'과 비슷한 때 출발한 성우
전자의 '독수리표 전축'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호황을 누렸다. 한편 1960년대의 전축은 사치품으로 인식
됐던만큼 기능보다는 외관이 중시됐다. 요란한 장식등이 달리고 울긋불긋한 호마이카칠을 한데다 덩치
도 커 마치 장롱 같은 모양을 한 것이 주종이었다. 지금은 이른바 '오디오 시스템'이라 칭하고 성능을
중요시 여기지만, 당시는 가구로서의 전시 효과에 치중했던 것이다. 여하튼 전축은 우리의 '음악' 문화
발전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다방은 밝은 분위기의 커피 전문점에 밀려 사라져가고 있
다. 한때의 다방의 매력이었던 무거운 분위기가 이제는 칙칙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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