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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영화 <아리랑>과 민요 <아리랑>

by Frais 2020. 8. 27.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나오기 이전까지만 해도 <아리랑> 이라는 민요는 사실 그렇게 알려져 있
지 않았다. 춘사 나운규 역시 이 민요를 당시 영화계 선배였던 이 경손의 민요 채록집에서 발견했다. <
아리랑> 원작 경위에 대해서 후일 이경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운규는 그의 <아리랑> 원작이 나의 
민요 <아리랑>에서 암시받았다고 말한 모양이다. 그러나 운규의 <아리랑>은 철두철미 운규 자신의 창
작품이었다. 비록 사소한 어구나 어떤 암시 또는 기술상으로 나의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런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또한 문젯거리도 아니었다." 이경손의 말은  상당히 겸손했지만, 그의 민요 노트에
서 나운규가 아리랑을 알게 된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발표되자 민요 <아리
랑>도 비로소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만큼 나운규의 <아리랑>은 당시  한국인의 울분을 대변하여 일제
에 시달림을 받는 민족의 비애를 여실히 각인시켜 준 작품이었다. 그렇기에 <아리랑>은 관객의 절찬을 
받으며 전국적으로 풍미하게 되었다.
  무성 영화 <아리랑>의 내용은 이렇다. '개와 고양이'라는 자막에 이어 변사의 해설이 시작된다. 3·1
운동의 충격으로 미친 김영진에게는 영희라는 여동생이 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영진의 친구 현구가 찾
아오지만 영진은 알아보지 못한다. 현구와 영희는 애뜻한 마음으로 영진과  서로를 염려한다. 그럴 무렵 
왜경 앞잡이이기도 한 머슴 기호가  영진네 집을 기웃거리다가 혼자 있는  영희를 보고 겁탈하려 든다. 
그때 마침 현구가 돌아와 기호와 격투를  벌인다. 멍청하니 히죽히죽 웃던 영진은  환상을 본다. 사막에 
쓰러진 한 쌍의 연인이 지나가는 대상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상인은 물을 주기는커녕 여자
를 끌어안는다. 그 순간 영진은 낫을 번쩍  들어 후려친다. 비명 소리에 깜짝 놀란  영진은 기호가 흘린 
피를 보고 맑은 정신을 찾는다. 어느 새 영진의 손에 포승이 묶여진다.  영진은 오열하는 마을 사람들에
게 말한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 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저는 
죽음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오니 여러분, 눈물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러한  변
사의 해설과 함께 영진이 일본 순경에게 끌려가면서  주제가 <아리랑>이 흐른다. 영화 속에서 물을 가
진 대상은 곧 일본 제국주의를 상징하며, 기갈에 허덕이는 남녀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것임을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리랑>은 영화적인 문법으로 볼 때도 결코 뒤떨어지는 작품이 아니었다. 사
막 장면, 환상 장면에는 작품 주제가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인공 영진으로 하여금 살인할 수 있는 
모티브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은 곧 심리적 몽타주 수법의 성공이다.
  영화 용어에서 '몽타주'(montage)란 복수의 상이나 장면을 합성하여 하나의 화면을 만드는  것을 일컫
는 말이다. 세계 영화사상 몽타주  수법은 이 해(1926)에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나운규는 
같은 해에 제작된 <아리랑>에서 몽타주 수법을  구사함으로써 또 하나의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렇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감동은 역시 항일 민족  정신의 고취를 작품 주제로 삼아, 그것을 전통 민
요인 <아리랑>과 연결 승화시킨 부분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진이 수감을 찬 채 아리랑 고개를 넘을 
때 관객들은 나라없는 설움을 통절히 느끼면서 눈물지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가
였던 민요 <아리랑>은 암담한 시대를 사는 온  겨레의 애국가요, 겨레의 가슴마다 민족혼을 불어 넣는 
노래로 전해지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제작되고 상영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나운규가 일본인 제작자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데 있다. 당시 '조선키네마'라는 제작 회사
의 소유주는 일본인 쓰가미였는데, 그는 한국인 관객을 끌기 위하여 감독과 배우를 모두 한국인으로 기
용했던 것이다. 나운규가 아리랑의 제작을 제안했을 때  쓰가미는 흥행 성공을 예감하면서 적극 지원하
였고 각본·감독을 김창선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하기까지 했다. 김창선은 곧 '쓰가미'의 한국 이름이었으
니, 이것은 나운규가 창안한 묘안이었다. 그 당시 총독부의 영화 검열이 가혹하여 조금이라도 민족 사상
이 담긴 작품은 여지없이 가위질을 당했기 때문에,  나운규는 일본의 쓰가미를 이용하여 검열을 통과하
려 했던 것이고, 쓰가미는 나운규의 인기를 이용하여 많은 돈을 벌고자 그  묘안에 기꺼이 응했다. 영화 
<아리랑>은 이와 같은 역경 속에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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