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청바지 열풍이 불던 무렵 유럽에서는 양복이 유행하였다. 일찍이 왕정 시대에
볼 수 있었던 귀족적인 품위는 1848년 2월 혁명 이래 잠잠해졌지만 부르주아 계급이 다시
금 세력을 얻게 되자,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일반 시민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복장부터 다르게
입었다. 당시 일반 사회에서는 시민적인 검소한 복장이 보급되었는데 기본적인 복식은 재킷
이라 불리는 웃옷을 착용한 후 판탈롱(신사복 바지의 원조)이라는 하의를 입는 형태였다.
그러나 궁중 귀족들은 프랙이라는 웃옷을 입었으며 계급에 따라 프랙의 색깔과 자수 색깔
을 달리하였다. 하지만 귀족들 중에도 시대 사조에 따라 복장의 시민화를 꾀하는 사람들
이 늘어 나기 시작했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판탈롱과 같은 바지를 입었다. 1850년경 판탈롱
모드로는 체크 무늬나 줄무늬 바지가 유행했다. 또한 종래에는 칼라(collar)를 턱 밑에까지
세우고 크라바트(남성용 스카프)를 목에 여러 번 감던 것을, 이 무렵부터는 넓은 칼라에 풀
을 먹이고 크라바트로 가느다란 밴드 모양의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다. 오늘날 넥타이 매
는 관습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860년경부터는 풀 먹인 칼라의 폭이 좁아져 턱 밑에서 꺾임에 따라 그 위에 나비 넥타이를
맸다. 지금처럼 접는 신사복 칼라의 형식은 이때 시작되었고, 1870년경에는 대대적으로 유행
하기에 이르렀다. 1870년경 남자들의 머리 모양은 근대 생활에 맞추어 간소화되었다. 신사들
은 머리카락을 목 근처나 그 위로 오도록 짧게 하여 그것을 구레나룻(볼수염)과 연결해 정
리하는 것이 유행했는데, 구레나룻은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남자의 표지로 간주되었다.
모자는 신사복과 함께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시대에 따라 크라운(모자의
춤)의 높이와 챙의 폭이 변화했다. 생활 양식이 변하고 1846년 미국에서 재봉틀이 발명됨에
따라 신발 역시 근대화되어, 간편하고 실용적인 구두가 세계적으로 보급되었다. 승마나 사냥
을 위해서는 목이 긴 부츠가, 일상용으로는 목이 짧은 슈즈가 유행했다. 이에 따라 남자들
은 과장된 권위의 심벌로서 복장을 갖출 필요가 없어지고 합리적이며 활동적, 기능적인 것
을 구하게 되었다.
따라서 19세기 중엽에 근대화를 끝낸 남자복은 그후 그다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미국의 미술사학자인 앤 홀랜더의 연구에 따르면, 오늘날 전세계의 남성들이 입는 신사복
은 모더니즘의 산물이고, 시각적으로 강력한 남성의 힘을 상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윗도
리, 조끼, 바지로 구성된 양복의 등장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의복을 통해 강조했을 뿐 아
니라 남성 중심주의와 남성의 성적 매력을 강화시켰다는 것이다. 홀랜더는 '오늘날의 패션
디자인은 그 선과 형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단순하면서도 역동적인 분위기를 풍
기며 강한 성적 매력을 만들어 낸다'고 지적했다. 우리 나라에서의 양복 착용은 관복에서
부터 비롯됐다. 1900년 4월 칙령으로 문관대례복제를 고쳐 양복을 입게 했는데, 이미 이전에
개화파 정객들이 일본에서 양복을 입어 국내 최초의 '양복쟁이'로 기록되고 있다.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은 1881년을 전후해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는
데 그 곳에서 양복을 사 입었다. 당시 양복은 몸깃이 작고 소매는 좁으며 앞단추가 3∼4개
달린 색 코트였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서의 양복 유행은 '양복=선진 국민 복장'이라는 그
릇된 인식하에 널리 퍼졌다는 아쉬움이 있다. 양복 수요가 급증한 1920년대에 어깨선이 알
맞게 강조된 영국식 양복이 유행하고, 모자와 지팡이, 회중시계가 액세서리로 등장한 것도
이런 정서를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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