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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벨이 전화를 발명한 동기

by Frais 2020. 8. 26.

  그레이엄 벨은 28세 때인 1875년 마침내 전화를 발명하는데 성공했다. 벨은 실험 도중 약
품을 엎지르자 엉겁결에 "윗슨! 빨리 내 방으로 올라와 주게"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래층
에 있던 윗슨이 실제 이 소리를 듣고 뛰어올라옴으로써  발명의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한 것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세가지 요인에 의해 가능
했다. 다시 말해 가문  대대로 내려온 발성학 연구 전통, 농아 교육을 통해 얻은 귀에  관한 
지식, 관찰력의 적극적 활용이 그것이다. 그레이엄 벨의 집안은 대대로 발성학에 대해  연구
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벨은 할아버지로부터  웅변술과 연설 기법을 배웠고 시화법의 창시
자인 아버지로부터는 여러 가지 발성법을   배웠다. 1858년부터 농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벨은 농아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기에 망설임 없이  자신이 가르쳤던 귀머거리 소녀와 결혼
하기도 했다. 
벨은 사람 목소리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을까 여러 모로 실험하였다.  귓속에는 고막이 있
어서 이것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말의 음향에 반응하여 진동하므로,  이  현상을 확대하여 
귀의 고막보다 두꺼운 막에 진동을 일으킬 수만 있다면 그 진동을 그대로 전선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오랜 실험 끝에 전화를 발명하는데 성공한 그는 1876년 2월 14일 특
허청에 이를 등록하였다. 그러나 벨의 예상과 달리, 대기업들은 벨의 발명품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과학적인 장난감으로는 훌륭하지만 상업적인 가치는 희소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미국 독립 백년제를 기념하는 전람회가 개최되자 벨은 이 놀라운 발명품
을 출품했다. 전람회장에서 심사 위원들은 여러 가지 진열품을  심사했으나 웬 일인지 벨의 
발명품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사 기간은 끝나 가고 벨은 초조했다. 그때 마침  브
라질의 페드로 황제가 전람회를 구경하러 왔다가 벨의 발명품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벨은 
용기를 내어 수화기를 들고 황제의 귀에 댈 것을 권고했다. 황제가 수화기를 귀로 가져갔을  
때, 벨이 별실에서 송신기에다 무어라고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황제는 깜짝 놀라면서  이  
발명품에 감탄했다. 그러자 심사위원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과학자  톰슨 경도 수화기를 귀에 
대 보고는 역시 경탄하여 "완전히 들린다.  이것은 내가 미국에서 본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발명이다"라고 격찬했다. 하마터면 빛을 못 보고 묻혀 버릴  뻔한 전화는 이런 사연을 안고 
탄생했다.
  전화는 텔레비전의 발명에 직접적 동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많은 발명
가들이 유선으로 소리를 전달할 수 있다면, '모습' 또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고 
실제로 텔레비전을 발명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전화의  가장 큰 공로는 무엇보다도 '답답
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한 데 있다. 전화는 일상 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불
러일으켰다. 서신을 통해서, 그것도 며칠 몇  달 걸려 소식을 주고 받았던 사람들이  원하는  
순간 바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일이었다.  특히 서민들간에 
긴급한 일을 알려야 할 때 전화는 정말 유용한  물건이었다. 따라서 설치 비용이 만만치 않
았음에도 전화 보급 초기에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어 난  것은 당연지사였으며, 사람들이 
별로 할 얘기가 없으면서 자랑 삼아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당시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전화는 그 자체 못지않게 디자인 면에서도 많은 유행을 낳았다. 초기에
는 원목 가구풍의 전화가 압도적이었으나 점차 다양한 전화가 만들어졌고, 실용적 못지않게  
장식성이 중요시되었다. 오늘날 다른 전자 제품에 비해 유독 전화 디자인이 다양한 것은 이
를 '자랑'이자 '장식품'으로 중히 여겼던 초기 관념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화로 인해 '정성 문자'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화  발명 이전에 주요한 
통신 수단이었던 편지는 사실 단순한 도구 이상의 큰 역할을 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사랑
의 연락자, 멀리 떨어진 친구들의  하인, 외로운 사람의 위로자, 흩어진 가족의 이음새, 소식
과 지식의 전달자, 사람들 간 평화·친선의  매개자가 곧 편지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전쟁
터로 나간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열애와 그리움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었던 것도, 마르셀 
프루스트와 루시엥 도데가 우정 이상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의 육상   스타 
마이클 존슨이 제시 오웬스의 미망인으로부터 격려받고 감동한 것도, 요즈음 대통령이 특사
를  통해 외국 원수에게 친필로 성의를 표시하는 것도 모두 편지 덕택이다. 또한 편지를 쓰
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한데,  그 정성을 편의성이 대체함으로써 '정성 문화' 대신 '인사치
레 형식 문화'가 형성되었다. "잘 지내고 있지?" "언제 한 번 만나야지?"  떠오르는 대로 임
시 방편  삼아 인사말을 교환하는 것이다. 편지  쓰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F까? 이에 대해 
17세기 프랑스 사교계에서 활약했던 탕생  후작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머리를 이
끌 때 편지는 잘 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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