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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흑인 목소리를 가진 백인 가수

by Frais 2020. 8. 28.

  선 레코드사의 샘 필립스가 습관처럼 중얼거리던 말이 있었다. "흑인 목소리와 흑인 감정을 지닌 백인 
남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10억 달러를 버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찾아보면 어딘가에 그런 가수
가 있을 거야." 샘 필립스의 말은 흑인들의 풍부한 감정을 인정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백인이어야 대중들
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인종 차별의 현실을  반증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필립스는 엘비스 프레슬리
를 만남으로 해서 그 소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프레슬리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오랫동안 소망해 
왔던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한다. 빈민 출신의 프레슬리는 감상
적이며 연약했을 뿐 자신의 재능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열 살 때 자전거 대신 12달러짜리 기타를 선택
한 것과 흑인 음악의 메카인  멤피스에서 자랐다는 것이 그의 음악적  배경의 전부였다. 고교시절 그는 
같은 반의 백인 친구들보다는 이웃의 흑인들과 어울려 함께  노래 부르며 외로움을 달랬다. 졸업 후 가
족의 생계를 위하여 트럭 운전수로 일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자신의 레코드를 취입하기 
위해 레코드사에 들렀다. 그때 그의 녹음 장면으  지켜본 필립스가 프레슬리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스카우트함으로써 프레슬리는 일약 운명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54년 7월 선 레코드사는 곧 그의 목
소리를 레코드 판에 담았고, 반응 또한 아주 좋았다. 필립스는 프레슬리와의 전속 계약권을 미국의 최대 
레코드사인 RCA빅터사에 3만 5천 달러를 받고 팔았다. 이 무렵 프레슬리는 흥행업자인 커널 톰 파커를 
만났는데 그가 그 후 프레슬리의 음악 활동을  관리했다. 프레슬리의 흑인풍 노래는 필립스의 예상대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1956년 프레슬리는 1백만 장 이상 팔린 45편의 음반들 가운데 첫 번째 음반인 <
하트브레이크 호텔>을 내놓음으로써 선풍을 일으켰다. 대중적인 록의 역사는  그의 첫 음반으로부터 시
작됐다는 평가가 나오는가 하면, 훗날 비틀스의 존  레논이 "엘비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어떤 것도 내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회상할 정도로 프레슬리의 출현은 대중 문화계에 혁명적 영향을 미쳤다.
  프레슬리는 인기 TV 쇼인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하여 당시로서는 말세적 현상으로  표현될 만큼 격
렬하고 섹시한 하체 율동을 선보였다. 그러나 몸을 흔들고  비비 꼬는 선정적인 표현에 대한 대중의 저
항감 때문에 TV 화면에는 허리 위 부분만 방송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섹시한 율동은 거센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키며 그만의 독특한 캐릭터로 자리잡았고, 전세계 여성들은 그의 목소리,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매료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프레슬리의 인기몰이에 대한 반향은 TV의 첫 소개에서 단적으로 드러
나는데, 이때 사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젊은이가 도대체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확실히 
미치게 하고 있습니다." 프레슬리는 흑인 록 가수들의 정열적인 율동과 발성법을 빌어 성공했던 것이지
만, 그의 인기에는 카리스마적인 스타일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섹시하게  엉덩이를 흔드는 모습은 그에
게 'Elvis the Pelvis'(골반뼈 엘비스)라는  별명을 가져다 주었으며, 오리꼬리  모양의 머리카락과 우수, 
냉소가 깃든 표정은 젊은 팬들, 특히 여성 팬들로 하여금 열광적인 환성을  자아내게 했다. 나아가 프레
슬리는 10대 여성 팬들에게 섹스, 독립 그리고 권위에 대한 반항의 상징적  존재로 통했다. 그러자 재미
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여성 팬들이 프레슬리의  사진을 방 안에 붙여 놓는  것은 물론 그의 모든 것에 
대해 전폭적인 애정을 보이면서 수많은 남자들이 프레슬리  패션을 흉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프레
슬리 열풍은 그가 갑작스레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미국의 많은  나이트클럽,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등에서 프레슬리의 이미지가 차용되고 있다. 그에 대한  팬들의 광적인 인기가 어떠한지
는 그 사례를 들기 어렵지 않다. 1982년 공개되기  시작한 그의 자택 그레이스랜드로는 매년 75만 명의 
추모객이 다녀가고 있으며, 프레슬리 기념품점을 통해 거둬들이는 수입은 연간 1천5백만 달러를 상회한
다. 특히 엘비스 상표의 티셔츠, 열쇠 고리 등은 아직까지도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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