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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신작로의 탄생

by Frais 2020. 8. 27.

  조선시대 도성 안의 도로는 대로·중로·소로의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큰  도로는 너비 
56자, 보통 도로는 16자, 작은 도로는 11자이며 길 옆 도랑의  너비는 가가 2자였다. 도리의 
기준점은 궐문으로 하고, 각  지방의 도리 기준점은 성문을  기점으로 하였다. 전국  도로의  
기점은 창덕궁의 돈화문이었다. 따라서 돈화문에서  숭례문, 창의문, 돈의문, 흥인지문  등의 
성문들을 도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도로의 종착점은 봉화와 수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목
적지 변방의  영위였다. 파발마들이 이용하는 길이었던 이들 대로는  소읍이나 마을들을 그
냥 비껴  지나 최단거리로 이어져 있었다.  이렇게  해서 북쪽의 경흥까지 가장 멀리  뻗은 
길의 길이는 2천 1백리, 지금의 부산에 해당하는 남쪽 동래까지는 9백 50리, 전라남도  해남
까지는 9백 70리로 계산했다. 우리 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 이라고  표현할 때의 삼천리란 
이들 남북 대로의 합산치인 것이다. 이를 10리 5.1km로 환산하면 요즘의 측량  거리와 흡사
하다. 근래에 들어  도로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기한 이는 풍운
아 김옥균이었다. 그는 1882년 일본에 다녀온 뒤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면 산업을 개발해야  
하고, 산업을 개발하려면 도로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도
로가 닦인 것은 일제의 내정 간섭 후부터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한 뒤, 일제
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이른바 통감  정치를 실시하였다. 통감부가 가장  우선시했던 사업은 
도로 개수였다. 1906년 7개년 계속 사업으로 도로 개수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그 해 내부 
산하에 치도국을 설치하여 그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개수되었거나 신설된 도
로를 흔히 '신작로'라 불렀으며, 이후 신작로라는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기존의 꼬불꼬불한 
길에 비해 한결 시원해 보이는 '신작로'는  도시 개발의 상징이었으며, 따라서 신작로란 곧 
근대적 도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작 신작로는  우리 민족에게 수탈의 통
로에 지나지 않았다. 고대  로마가 신속한 군대 출동을 위해 식민지에까지 대규모의 도로를 
닦았다면, 일제는 식량이나 광산물 등 기타 가치 있는  자원을 일본으로 반출하고자 수송의 
편리를 위해 신작로를 닦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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