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내정 개혁에 주력하여 1895년 11월 15일 국민들에게 머리
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이날 고종은 솔선해서 단발하고 양복을 입었으며, 전 국민에
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이 칼을 들고, 또 각 가
정에까지 들어가서 머리를 깎도록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반발이 심했다. 예로부터 우리 나
라에서는 모발을 매우 소중히 여겨 승려나 백정들만이 머리를 깎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을사사변으로 인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터인데다 단발을 강행하니, 정부의 대
신들 가운데에서도 이도재 같은 이는 반대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사퇴했으며, 전국의 유생
들은 크게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정부는 친위대를 파견하여 이들
을 진압해야 했다. 그러나 배일 감정은 더욱 거세어졌으며, 뒤에 김홍집은 피살되고 친일 내
각은 무너졌다. 그런데 단발령은 엉뚱한 유행을 낳았다. 머리를 깎기 전에 상투튼 자신의
모습을 기념으로 남겨 두자는 의미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초상 사진을 찍게 만들었던 것이
다. 이런 사회적 현상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하면 안 된다는 관념도 작용했지
만, 한편으로 머리를 깎게 되면 상놈·양반 구분이 안 된다는 신분적 자괴감도 한몫 했다.
다시 말해, 사진으로나마 자신이 상투 튼 양반임을 남기고 싶어하는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신미양요 당시 미 해병 종군 기자에 의해 카메라가 첫 선을 보였지만, 우리
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촬영은 1884년 일본에서 카메라 촬영 기술을 배워 온 김용원, 지
운영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지운영은 고종 황제의 얼굴을 제일 먼저 찍고 영업 허가를
받아 냈는데, 단발령이 실시되면서 상투 튼 모습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늘어 나면서 카메라
촬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사진 촬영비가 부담스러운 사람은 초상화로 자신의 상투 튼 모
습을 남겼으며, 이렇게 마련한 초상 사진(또는 초상화)을 안방 벽 한쪽 혹은 출입문 위에 소
중히 걸어 놓았다. 가장의 초상화를 벽에 걸어 두는 유행은 1960년대까지 계속 이어졌으나,
이후 점차 카메라가 대중화되고 가족 사진에 대한 관심이 싹트면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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