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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가지' 제목의 시조

by Frais 2020. 8. 27.

  1890년대 초, 피츠버그의 조미료 제조업자인  헨리 하인즈(1844∼1919)는 뉴욕의 고가  철
도를 달리는 전차 속에서 무심코 창 밖을  보다가 눈길을 떼지  못했다. 한  가게 앞에 '21
가지 모양의 신발들'이라고 씌어진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영감이 스
쳤다. 곧바로 그는 이 문구를 자신의 회사에 적용시켜 '57가지 종류'(57 varieties)라는 독특
한 숫자 슬로건을 창안해 냈다. 당시 그의 회사는 이미 60가지가 넘는 피클(오이절임), 향료, 
식초류 등을 생산하고 있었지만, 하인즈는  어쩐지 57이 마음에 들어 상징적 숫자로 정했다. 
그는  '57가지 종류'라고 쓰인 전단을 만들어  미국 전역의 수천 대에  달하는 전차 내부와 
자기 회사 소유의 4백여  대 화물 차량 표면에다 붙이는 한편,  전망  좋은 20여 곳의 언덕 
위에 3미터 높이의 광고용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는  모험을  감행했다. 자기 과시와도 같
은 이 광고는 주위의 우려와 달리 뜻밖에도 소비자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 성공했다. 하인즈 
피클은 19세기 후반 미국 가정은 물론  자취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 음식이  되었
다. 하인즈는 1896년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피클 왕'이라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새로운  
광고 아이디어를 짜내는데 항상 선두를 달려온  하인즈는 1900년 뉴욕 5번가에 6층  높이의 
광고탑을 세워  최초로 옥외 전기 광고를 시작했다. 이때 대형 네온 사인 간판에는 '식탁을 
위한 맛있는 음식  57가지'(57 good things for the table)라는  문구를  새겨 '57'의 상징성
을 계속 살려 나갔으며, 모든 광고 포스터에도 57을 브랜드처럼 사용하였다. 숫자를  이용한 
판매술은 20세기 들어 아이아코카라는 자동차 판매 영업인에  의해 다시 한 번 재현되었다. 
아이아코카는 1949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윌크스베어 지역의 포드  자동차 판매 총괄 지배
인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새로운 판매 계획을 세운  후 이를 밀고 나갔다. 그의  판매 전략
은 '56달러로 56년형 포드를'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이는 새로 나온 1956년형   
포드 자동차를 구입할 경우 매달 56달러씩 3년 동안 찻값을 나누어 갚을 수 있도록 해 주겠
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윌크스베어 지역의 폭발적 인기에 자극받은 포드사
는 아이아코카의 슬로건을  전국적으로  채택했으며,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진  그를 워싱턴 
D.C. 지역 지배인으로 승진시켰다. 우리 나라에서는  1990년대 들어 광고·출판계에서 숫자
를 이용한 광고 카피와 제목짓기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73도',  '7cm 자신감', '5분마다 팍
팍팍', '1센티의 자유' 등등 숫자를 앞세운 광고 카피가 홍수를 이뤘고 출판계에서도 <...101
가지 이야기>,  <...50가지> 등등 수많은 책들이 숫자를 제목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사람들은 왜 숫자에 현혹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추론되지만, 가장 큰 것은 
숫자의 간결성이다. 즉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한편 전
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숫자를 이용해  경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온 밥솥 
회사에서는 가장 맛있는 밥이 되는 숙성 온도인 73도를 강조하기 위해 73이라는 숫자를 이
용하고, 구두 회사에서는 여성의 다리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인체 미학적 지식을 바탕
으로 7cm 구두굽을 강조한다. 이에 반해 도서 제목의  숫자는 꼭지 수를 상징하는 것 외에
는  별다른 의미가 없지만, 일부  출판업자들은 베스트 셀러를 겨냥해  교묘히 독자들의 심
리적 허점을 파고들기도 한다. 즉 단순히 아무 숫자나 내세우지 않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
자 1, 3, 7을 나름대로 더하거나 곱한  수를 사용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의  마음
을 움직일 수 있을까'  고심했다는 점에서 하인즈나  아이아코카 혹은 우리 나라의  마케팅  
방법은 모두 정당하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미국의 경우 그 슬로건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으
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경우 유치한 따라하기로 번졌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분명한  
점은 숫자가 난무함으로써 숫자의 신비한 상징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숫자  유행품'은 물론 정말 숫자를 통해 홍보해야 할 상품마저 숫자가 내장하는 고유의 힘
을 잃어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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