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죄값을 물어야 사회 질서가 바로잡힌
다는 명목하에 처형이라는 이름의 '행정적 살인'은 오랜 세월 자행되어 왔다. 기요틴은 그런 처형 문화
에서 비롯된 산물이며, 동시에 죽음의 순간까지도 인권 차별이 엄존했음을 시사하는 용어다. 프랑스 혁
명 이전까지 귀족들은 사형 당할 때에도 특혜를 받았다. 평민들은 사지가 찢기거나 불에 달군 집게로
죽임을 당했고 조금 나은 대우를 받은 것이 교수형이었지만, 귀족들은 참수형으로 고통 없이 단번에 숨
질 수 있었다. 참수형은 죽는 순간까지도 귀족들에게만 베풀어지는 벌이었던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
명 당시 개업 의사이자 국민회의 의원이던 조제프 기요탱(1738∼1814)은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는 사회 위생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형수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덜어 주기 위해 '범죄인의 계급, 신분이
어떠하든 간에 같은 종류의 범죄는 같은 종류의 형벌로써 처벌한다'는 조항을 제안하고, 사형 집행에 기
계를 쓴다는 조문을 법에 명시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채택되어 프랑스 혁명 시대에 사형수를 대량으
로 처리하기 위해 '기요틴'이 사용되었다. 이 단두대는 독일어식으로 '길로틴' 또는 '기요틴'이라고 불리었
지만, 실제로는 옛날부터 프랑스 남부 지방과 이탈리아에서 널리 쓰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루이종'이라
고 불렸으나 곧 기요탱의 이름을 따 '라 기요틴'으로 알려졌다. 단번에 목을 자르기 때문에 우리말로는
'단두대'로 번역된다. 기요틴에 의해 사형에 처해진 첫 번째 희생자는 1792년 4월 25일 노상 강도로 유
죄를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무거운 칼날이 휙 내려와 순식간에 범죄자의 목을 깨끗이 잘라 내는 장면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 속에 지켜보았다. 기요틴은 사형 집행인의 노고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므로
'공포 정치'하의 프랑스에서 대량 살인에 큰 몫을 하였다. 이후 기요틴 사형이 대대적으로 집행되었으니
'공포 정치'가 자행되던 1793년 프랑스에서는 1만 8천 명에 달하는 사람이 처형당했다. '혁명의 적'이라고
간주되는 모든 사람이 기요틴 위에서 머리가 잘려 나갔다. 루이 16세와 왕비 앙트와네트도 기요틴에서
처형당했으며, 공포 정치를 자행했던 혁명가 당통,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추종자 21명도 같은 운명을 맞
이했다. 단두대가 프랑스에서 사라진 것은 1981년 9월, 사형 제도가 법으로 금지되면서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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