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시앵 레짐은 '낡은 제도', '구체제'를 가리키는 프랑스어다. 영어권에서 구체제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굳이 프랑스어 낱말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는, 그것이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 탄생했다는 역사적 의미
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앙시앵 레짐은 17세기 말엽에서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의
1백년 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 끊임없는 긴장 상태와 수 차례 권력의 변동이 있었던 혼란스런 영국의
정치 상황에 비해, 프랑스는 모든 것이 통합적이었고 사회 안의 갈등 요서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생겼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는 평온한 겉모습 뒤에서 속으로 곪아 가고 있었다. 성직자와 귀족은
부와 명예를 누리는 특권 계급으로서 온갖 특혜를 누렸지만, 새로이 부상한 부르주아지와 농민은 인구
의 대다수를 차지하며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도 그에 어울리는 지위를 보장받지 못했다. '프
랑스 혁명'은 이런 시대 배경을 바탕으로 폭발하였으며,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단순히
지도층의 물갈이에 그치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사상, 예술의 사회 전반을 바꾸어 놓았다. 구체
적인 예를 살펴보면 그런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식생활만 하더라도 하루 두 끼 식사가 세 끼 식사로 바뀌었다. 18세기 중엽 프랑스인들은 하루
두 끼 식사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수프 또는 우유나 커피로 식사를 간단히 때우고, 오후 1시
쯤과 저녁 6시쯤 주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헌의회 회의 시간이 능률성을 고려한 끝에 정오에
서 오후 6시까지로 정해지자, 식사 시간이 문제가 되었다. 아침에 음료 한 잔 마신 것으로 오후 6시까지
견디기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그렇다고 회의 중에 밥을 먹고 다시 회의를 하자니 능률이 떨어질
것이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헌 회의 회원들은 회의 시작 전인 오전 11시쯤 두 번째 아침
식사를, 장시간의 회의에 대비하여 달걀과 고기류가 포함된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는 개
헌의회의 모든 결정이 사회 분위기를 주도하던 때라 이 식사 관습은 금세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오늘날의 점심 식사로 정착되었다.
달력에 있어서도 그레고리력이 폐지되고 매월이 30일로 된 월력으로 제도가 바뀌었으며, 아이 이름
짓는 방법에 대한 규제도 풀렸다. 혁명에의 열광은 일상 생활을 기저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자유의
여신상이 새겨진 항아리 혹은 혁명을 찬양하는 그림 부채, 바스티유 감옥 모양의 시계, 혁명 카드 놀이,
'폭군에게 죽음을'이라는 슬로건이 새겨진 코담뱃갑 등이 유행하였다. 결혼 문화에도 변화가 생겼다. 프
랑스 혁명 이후부터는 결혼의 개념이 가문 대 가문의 결합에서 벗어나 개인 대 개인의 결합으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결혼식도 엄숙한 종교적 형식성보다 신부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그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울러 이때부터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신부용 베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베일은
머리 끝에 착용해 대부분 얼굴 정면과 머리 뒤로 늘어뜨리도록 고안되었다. 색상은 대부분 흰색이었고,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혁명 바람이 한창일 때, 혁명가들은 모자를 통해 혁명 분위기를 더욱 조장하였
다. 이때 유행한 모자가 '테두리 없는 붉은색 모자'였다. 이 모자는 혁명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1789년
파리의 거리에 처음 나타났고, 1791년에는 자코뱅당이 정식으로 이 모자를 쓰도록 권장했다. 그런데 그
모자가 왜 혁명적인 분위기를 상징했을까? 유행의 기원은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
대에는 노예를 해방할 때 붉은 모자를 씌워 주어 자유의 몸이 되었음을 증명했다. '테두리'는 '구속 상태'
를 상징하는 바, '테두리 없음'은 '구속의 해제', 즉 '자유'를 뜻하고, 붉은색은 '행동'을 상징하므로 '테두
리 없는 붉은색 모자'는 '행동의 자유스러움'을 의미했던 것이다. 테두리 없는 붉은 모자는 '자유'의 상징
적 표지로 특히 로마인들 사이에서 애용되었기에, 로마의 부루투스는 붉은 모자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기
도 했다. 즉 부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살해한 후 화폐 문양의 가위표로 겹친 칼 사이에 이 모자를 새기도
록 하여 자신의 거사 목적이 시민들의 '자유' 회복에 있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로마 백성들은 폭군 네로 황제가 죽었을 때에도 이 모자를 쓰고 심리적 해방감을 만족했다. 테두리 없
는 붉은 모자는 세월이 한 참 지난 후, 네덜란드와 미국의 혁명 떼에도 쓰였으며, 마침내 프랑스에서 대
대적으로 유행하게 외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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