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알프스 산은 유럽인들에게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그저 높은 산일 뿐이었다.
더 심하게 말하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17세기 초 빙하들이 샤모니 계곡의 바닥까지 전진
해 경작지와 거주지를 파괴, 매몰시켰던 탓에 그런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몇몇
사람에 의해 서서히 그런 관념이 바뀌기 시작했다. J.J. 루소와 같은 저술가들이 자연을 찬양하고, H.B.
소쉬르와 같은 과학자들이 나타나면서 대중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이다. 특히 스위스의 물리학자인
소쉬르(1740∼1799)는 초기 알프스 산맥의 탐험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등산을 탄생시켰다. 18세기 중엽 당시의 과학자였던 유럽 자연 철학자들은 자연을 과학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으로 현장 답사 여행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이들 과학자들은 몽블랑('흰 산'이라는
뜻) 산맥의 거대한 빙하 때문에 프랑스의 샤모니 주변 지역에 특별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들 중의 한
명이었던 소쉬르는 1760년 처음 샤모니에 가서 유럽에서 가장 높은 몽블랑(4,807m)을 보고 언젠가는 그
산 정상에 올라가거나 그 산의 정복에 이바지하겠다고 결심했다. 이때 그는 몽블랑을 처음 정복하는 사
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그 일은 26년이 지난 1786년에야 이루어졌다. 소쉬르가 내놓은 현
상금을 받은 사람은 샤모니의 의사인 미셸 가브리엘 파카르와 짐꾼으로 고용된 자크 발머였다. 미셸은
사냥꾼으로 산길에 익숙한 자크와 함께 몽블랑 정상까지 올라감으로써 상금은 물론, '유럽 최고봉 처녀
등정'이라는 명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의 등정은 큰 화제가 되었으며, 등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유발했다. 소쉬르 자신이 이듬해 직접 몽블랑 등정에 나서서 성공했고, 이후 전문적 등반가 외에도 설산
풍경을 감상하고자 샤모니를 찾는 관광객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바야흐로 '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제는 현상금이 없어도 사람들은 성취감을 위해 스스로 산을
찾아 나섰고, 은근히 국가적 경쟁도 벌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영국 등반대가 스위스, 이탈리아, 프
랑스의 안내원들과 함께 스위스의 높은 봉우리들을 잇달아 올랐다. 또한 이 무렵 스위스에서는 등반 안
내인 동호회가 생겼으며, 이들은 중부 유럽 전역의 산봉우리에 오르는 길을 차례로 안내하면서 등산을
인기 있는 스포츠로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1870년대에 이르러 알프스의 주요 봉우리들은 각국의 등반객들에 의해 차례로 정복되었다. 등산가들
은 이미 정복한 봉우리로 올라가기보다 어렵고 새로운 코스를 찾기 시작했다. 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
북아메리카의 로키 산맥, 카프카스 산맥, 아프리카의 봉우리들, 그리고 결국에는 히말라야 산맥으로 관
심을 돌렸다. 이들 산맥은 19세기 말엽에 모두 정복되었으나, 마지막 요새인 에베레스트산만은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정복자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베레스트 산은 히말라야 산맥 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1852년에 인도 정부 측량국을 통해 지상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확인되었다. 오래 전부터 그
웅장한 크기와 높이 때문에 티베트어로 '초모룽마'('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라는 뜻)라고 불렸으나, 1865년
이후 인도 측량국장을 지낸 영국인 관리 조지 에베레스트 경의 이름에서 따 온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 공인된 에베레스트 산의 고도(8,848m)는 1955년에 인도 측량국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려는 시도는 1920년 티베트 등반로가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의 원정대가 다투어 올랐으나, 정상 정복은 그로부터 30년 뒤에 이루어졌다. 1953년 영국 왕립지
리학회와 히말라야 공동 산악위원회의 지원을 받은 원정대에 의해서였다. 1953년 5월 29일 마지막 캠프
에서 출발한 뉴질랜드 출신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게이는 남동쪽 능선을 오른
후 남봉을 지나 정오 무렵 정상에 이르렀다. 한국인으로서는 산악인 고상돈이 에베레스트 등정 사상 열
네 번째로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1977년 9월 15일 낮 12시 50분, 고상돈은 마지막 캠프를 떠난 지 7시
간 20분 동안의 사투 끝에 에베레스트 봉에 올라 이렇게 소리쳤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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