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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

by Frais 2020. 8. 25.

  레스토랑은 프랑스에서 발생해 프랑스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1530년대부터 이탈리아 궁정 요리사
에게서 솜씨를 익힌 프랑스인들은 놀랍도록 빨리 응용 요리를 내놓았고 16세기 중엽에는 명실공히 프랑
스 요리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550년, 프랑스 장군 드 비에이유비르는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말했
다. "그리스도의 세계, 아니 세계의 어떤 왕이라 할지라도 뛰어난  프랑스 요리의 미묘함을 흉내낼 수는 
없다." 레스토랑은 이러한 궁중 요리사가 거리로 나오게 되면서 생기게 되었다. 최초의 레스토랑 경영자
는 1765년 파리에서 수프 판매점을 했던 A. 블랑자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정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불
리는 수프를 팔아서 손님들의  주목을 끌었다. 당시 숙박업소에서도  종종 주인이 투숙객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어떤 고객이든  고급 식단의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공공 장소가 만들어진 
것은 블랑자의 식당이 처음이었다. 블랑자는 그 식당 문 위에 표지판을 달고 '블랑자는 신기한 강장제를 
판다. 내게로 오라, 당신 위의 고통을 내가 다시 채워 주겠다.'며 '레스토랑'을 광고했다. 레스토랑은 바로 
그 표지판에서 이름을 따 온 것인데, 지금도 'Restaurant'이라는 단어는 영국, 덴마크, 루마니아 등 다른 
여러 나라에서 식당을 지칭하는 말로 변형되어 쓰이고 있다. 한편 블랑자의 식당은 뜻하지 않은 소송으
로 인해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즉 블랑자는 소스 조합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스나 라고트(소스의 
일종)를 팔 수 없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그가 차선책으로 손님들에게  백포도주 소스를 넣은 
양의 다리를 제공하자, 조합원들이 양의 다리에 백포도주를  묻힌 것은 라고트의 판매나 다름없다고 법
적으로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재판은 블랑자의 승리로 끝나고 블랑자의  식당은 더욱 유명해졌다. 미식
가였던 루이 15세는 베르사유에서 문제의 요리를 맛보고는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
에 너도나도 블랑자의 식당에 몰려들었다.
  본격적인 레스토랑은 1782년 무렵, 보빌리에가 파리에서  가장 큰 요리점을 경영하면서부터 시작되었
다. 보빌리에는 미식가이자 뛰어난 요리법 해설가로서,  뒷날 프랑스 요리법의 기본서로 자리잡은 '요리
의 기술'을 펴내기도 했다. 이 곳에는 주로 장관들 혹은 대사들이 드나들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귀족
들은 집 안에 훌륭한 조리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혁명을 거친 뒤에는 가정에서 조리사를 구하는 경우
가 줄어들었고, 그에 따라 수많은  주방장과 요리사들이 레스토랑을 개업하게 되었다.  왕족과 귀족들을 
위해 요리하던 전문 요리사들이 먹고 살기 위해 시중에 나와 다투어 레스토랑을 개업했던 것이다. 1804
년에 이르자 파리의 레스토랑 수는 5백 군데에 달했으며 귀족, 유명인들 사이에서는 화려한 레스토랑에
서 식사를 즐기는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돈 많은  귀족들은 파리의 레스토랑 '맥심'에서 
저녁을 즐겼고, 소설가 발자크는 루브르 궁 근처의 '메리'에서 식사를 하면서 엄청난 양의 굴, 생선, 육류 
요리를 먹고 술을 즐겼다고 한다.  마들렌 모퉁이에 자리잡은 '뒤랑'  레스토랑은 아나톨 프랑스와 에밀 
졸라를 비롯한 정치가, 예술가, 작가들이 즐겨 모임을 가졌던 곳이다.
  오늘날 프랑스의 레스토랑에서 빈 자리가 보여도 종업원의 안내를 받기 전까지는 앉지 않는 불문율도 
이 무렵에 생겼다. 즉, '일꾼'들의 안내를 받아 자리에 착석했던  귀족들의 행태가 그대로 유행하여 일반
인들도 따라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지금은 마치 종업원의 권리처럼  인식되고 있으니 관습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메뉴'란 식사로 제공되는 모든 요리의 이름을 얇은  종이나 카드에 써 놓은 식단표를 이르는 말이다. 
'Menu'란 말은 '작게 된 것'을 뜻하는 라틴어 'Minutus'에  어원을 두고 있다. 메뉴의 아이디어 역시 레
스토랑의 탄생지 프랑스에서 비롯되었다. 메뉴의 아이디어  역시 레스토랑의 탄생지 프랑스에서 비롯되
었다. 메뉴의 유래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프랑스에서는 에스크리토라 하여  식단표가 있었는
데, 주로 식비 산출을 위해서 이용되었다. 1571년 카운팅 하우스에서 있었던 결혼식 메뉴는 일종의 계산
서였다. 즉, 이때의 메뉴란 큰 축연에 제공될 음식을  사는 데 쓰일 돈의 총액을 의미했으며, 이것은 왕
궁의 주방장이나 요리사가 성찬에 여러 가지 요리를  제공하기 위해 쓰여진 소개서로, 주방장이 물러날 
때면 다른 사람에게 계승해야 했다. 이것이 점차 변형되어 레스토랑에서 요리 종류와 가격을 알리는 메
뉴판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메뉴는 19세기 초까지도 쓰이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중엽 왕궁 식당에 출입하는 식도락가들을 위해 요리 포스터를 제작한 것이  현재 메뉴판의 효시가 되었
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 있는 왕국 식당에는 귀족이나  저명 인사들이 식도락을 즐기기 위해 자주 드나
들었는데, 요리사들은 이들을 위해 그날의 요리를 포스터로 만들어 식당  문에 붙이기 시작했고, 이것이 
점차 관습이 되었다. 그 포스터에  힌트를 얻은 레스토랑 주인들은 정성을  들여 메뉴판을 만들어 식당 
입구에 세워 놓음으로써 식도락가들을  끌어들이려 하였다. 당시 메뉴판  중에는 당대의 예술가가 직접 
도안한 것도 많았다. 또한 메뉴판은 식탁에서도 볼 수 있게끔 작게 만들어져 손님에게 제공되었고, 이때
부터 식당의 관행이 되었다. 한편, 레스토랑 출입구에 메뉴와 가격을 동시에 표시하는 것은 일본인의 머
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일본인들은 타인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배려하기로  유명한데, 같은 맥락에서 
식당 입구에 모형으로 음식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가격을 붙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입구 메뉴판은 고객
이 식당에 들어와서 가격을 보고 당황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차원에서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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