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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도그와 햄버거의 유래 패스트푸드는 미국에서 생성된 음식 문화다. 시간을 돈으로 생각하는 실용주의적 관념이 '셀프 서비스' 문화와 함께 빨리 먹을 수 있는 편리한 음식을 낳은 것인데, 패스트푸드의 대표적인 예가 핫도그(hot dog)와 햄버거(hamburger)이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핫도 그라는 소시지, 즉 프랑크는 1852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축산 협동 조합에서 처음 만들어 졌다. 만들어 놓고 보니 모양이 독일의 사냥개 닥스훈트(dachshund)와 닮아서 '독'(dog)이 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큰 소시지를 그대로 접시 위에 올려놓고 썰어 먹었으며 사워크라우트라는 시큼한 맛의 절인 배추를 곁들였다. 19세기 말엽 미국으로 이민온 독일 인들도 같은 방식으로 먹었는데, 어떤 파티장에서 프랑크의 기름이 자꾸.. 2020. 8. 27.
기차 여행과 추리 소설 19세기 영국이 산업 혁명을 드높이 외쳤을 때, 대도시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에 따라 빈민촌이 급증하였다. 노동자 계급의 생활은 대체로 가난했다. 어린이까지 나서서 밤 늦도록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수도 사정도 좋지 못해서 빨래는 물론 식수도 제대로 확보하기 힘들었다. 공중 목욕탕과 공동 세탁실이 마련되긴 했지만 언제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그나마 위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노동자들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가 절망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였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 1860년대 부터 차츰 생활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영국 노동자들은 이 무렵 토요일에 반일 휴가를 얻었으며, 큰 회사에서는 매해 14일의 유급 휴가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철도의 보급과 함께 여가.. 2020. 8. 27.
오리 궁둥이 댄스 무희들이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유명한 '캉캉'은 프랑스에서 유래한 활기차 고 대담한 춤이다. 1830년대 파리의 무도장에서는 '카드리유'라는 사교춤이 유행했는데, 남 녀 4∼5쌍이 정사각형으로 서서 마주 보며 일정하게 규정된 대형으로 춤추었다. 카드리유는 '사교'가 '눈요깃감'으로 변형된 형태로 1840년대 유흥가 술집 무대에 등장했다. 활기찬 4 분의 2박자 음악과 일제히 다리를 치켜 올려 속옷과 다리를 드러내는 동작은 금세 호색한 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유명한 캉캉 춤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의 캉캉은 여성 4명 또는 남성 2명과 여성 2명이 한 조가 되어 춤추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맨살 다리와 속옷을 보 여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관심을 끌었다. 또한 오리가 궁둥이를 흔들 듯 엉덩이를 .. 2020. 8. 27.
목숨 건 도박, 결투 19세기 말엽, 미국 서부 지역에서는 결투가 반목과 이견 있는 사람 간에 결론을 내는 수 단으로 널리 유행하였다. 쌍방 간에 결투 장소와 시간, 무기를 협의한 뒤 약속된 시간에 참 관자 1명 씩을 대동하고 나타난다. 그런 뒤 서로 등을 마주 대고 일정 걸음을 걸은 다음 상대방을 향해 총을 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총을 반발만 쏘아 상대방을 쓰러뜨렸으며 확인 사살은 하지 않았다. 즉 '맞추는 자'가 승리한 자로 합의된 것이기 때문에 맞추는 데 의미가 있지 상대방을 살인하는 데 목적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총상은 매우 치명적이었 던 까닭에 대부분의 패자는 목숨을 잃기 일쑤였다. 미국인의 결투는 17∼18세기 유럽에서 성행했던 귀족들 간의 1대1 승부, 혹은 18세기경 1대1 육상 경주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2020. 8. 27.
남사당의 비극 구한말 유랑 예인 집단인 사당패는 우두머리인 꼭두쇠를 중심으로 일단을 조직하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떠돌아 다니며 절이나 광장 근처에서 춤과 노래, 그리고 매춘으로 생활의 방편을 잡았다. 사당이라고 하면 원래는 여사당을 의미하였으나 남자들만의 사당패가 출현, 이를 '남사당패', '남사당'이라 불렀다. 사당패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계급으로 대부분 가난한 농가 출신과 고아들로 이루 어진 조직이었으나 규율이 엄격했으며 재주 배우는 것에도 단계가 있었다. 꼭두쇠 밑에는 각 놀이 분야의 선임자인 '뜬쇠'가 있었고, 뜬쇠 밑에는 가열(보통 기능자), 가열 밑에는 삐 리(초입자)가 있었는데, 삐리는 잔심부름부터 시작하여 한가지씩 재주를 익혀 가열이 되었으 며, 이들이 가열이 되기까지는 여장을 하는 것이 상례였.. 2020. 8. 27.
단발령과 초상 사진 붐 김홍집 내각은 을미사변 이후 내정 개혁에 주력하여 1895년 11월 15일 국민들에게 머리 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렸다. 이날 고종은 솔선해서 단발하고 양복을 입었으며, 전 국민에 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이 칼을 들고, 또 각 가 정에까지 들어가서 머리를 깎도록 했다. 하지만 예상보다 반발이 심했다. 예로부터 우리 나 라에서는 모발을 매우 소중히 여겨 승려나 백정들만이 머리를 깎는 것으로 알았다. 그리고 을사사변으로 인해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 터인데다 단발을 강행하니, 정부의 대 신들 가운데에서도 이도재 같은 이는 반대 상소를 올리고 관직을 사퇴했으며, 전국의 유생 들은 크게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정부는 친위대를 파견하여 이들 .. 2020.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