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 현대 비밀

세계 대전이 낳은 것

by Frais 2020. 8. 27.

  20세기의 전쟁은 이전의 그것과 달리 대량 살상 또는 중상이라는 가공할 위력으로 다가와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와 소외의 절망감, 그리고 그리움의  정서를 불러 일으켰다. 그 전쟁  
문화의 대표적 산물이 라디오이다. 1907년  라디오 진공관 특허를 받은 미국   물리학자 리 
드 포리스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개최된 엔리코 카루소의 공연을 실황  중계
했다.  그후 관심 있는 무선사들만이 라디오 방송으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레코드를 틀어 주
었지만, 사업가들은 이미 그 가치를 간파하고 있었다. 전쟁 기간 내내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
은 것이 바로 라디오였기 때문이다. 1920년 1월 미국 워싱턴의 해군 비행장으로부터 군악대 
연주 방송이 워싱턴 지역에 성공적으로 전달되고, 같은 해 11월 미국 피츠버그에 있던 웨스
팅하우스사가 라디오 방송국을 개국하여 29대 하딩 대통령의 당선을  알리는 방송을 내보내
면서 라디오 방송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웨스팅사는 시내 높은   건물 옥상에 천
막으로 스튜디오를 꾸미고 100W의 출력으로 역사적인 전파를 쏘아 보냈다.  같은  해 영국
에서도 마르코니 무선  회사에 의해  실험 방송이  이루어지면서 프랑스는  1921년, 영국은 
1922년, 독일 1923년의 순으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라디오는 기계 문명에 익숙한  미
국인들에게도 매우 희한한 물건이었다. 미국인들은 값비싼  라디오를 보물 다루듯이 대했고 
들을 때에도 매우 신기해했다.  삽화가 노먼 록웰은 1922년 한  잡지에 라디오 듣는 노부부
의 모습을 그려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그런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다. 사실 그 무렵  노인들
은 전화, 사진, 자동차, 심지어 비행기의  탄생까지 몸소  겪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라
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오페라 음악을 접하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토가  넓은 미국
에서는 1924년 대통령 선거 이래 라디오가 정견 발표의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선거전에서 후보자는 전국 5백 개의 라디오국을 통해서 수백만 세대의 사람들을 향하여 지
지를 호소했던 것이다.
  라디오는 전쟁 문화에도 새로운 양상을  낳았다. 심리전이라는 새로운 전략이 등장한  것
이다. 일찍이 라디오의 이용 가치에 주목한 사람은  히틀러였다. 그는 단절된 세계를 대상으
로  할 때 라디오 선전이 보병의 돌격에 앞서 집중 포격을  가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고  말했다. 라디오는 히틀러의 격렬한 웅변에 잘 들어맞는 매체였다. 독일의 효시로 1·2차 
대전 내내 라디오 심리전이  여러 나라에서 진행되었으며, 자국  병사들에게는 용기를 심어 
주는 방송을 하는 한편, 적군 병사들에게는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매력적인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를 띄었다. 라디오 선전의 주요한 임무는 적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는 것이었는데,  독
일의 선전은 특히 프랑스를 패배시키는  데 효과가 컸다. 그만큼  프랑스인이 감성적이라는 
사실을 확인케 해 주는 사례이기도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사람들은 '소리의 향수'에 깊이 
젖어 들었으니 레코드 제작, 활기 띤 라디오 방송, 음악 관련 사업 발달 등은 이에  따른 자
연스런 현상이었다. 영화, TV 드라마 등  시각 문화가 발달한 오늘날에도 라디오 청취자는 
여전히 많은데 이것은  군중 속의 고독을 시사해 주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근, 현대 비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희가 재즈를 아느냐  (0) 2020.08.27
빈 방 있습니까  (0) 2020.08.27
우리는 지금 자장면을 먹는다  (0) 2020.08.27
팬시 상품 1호  (0) 2020.08.27
스위스제 손목시계는 왜 유명한가  (0) 2020.08.2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