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 현대 비밀

서양 족보, 동양 족보

by Frais 2020. 8. 25.

 고종이 집권할 때(1864)의 신분 구조는 양반이 65%, 상민이 33%, 그리고 천민이 2% 미만이었고 토지 
소유도 소작지와 소작인이 각각 60%와 45% 이상을 점유했다. 이보다 168년 앞선 1669년만 하여도 양반
은 불과 8.3%에 불과하고 상민이 51.5%, 그리고 노비가 40.6%였다. 이러한 신분 구조의 변화를 통해 조
선 말엽의 상민이 모두 양반화되었음은 물론 노비의 양반화까지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7세기 
말엽 숙종 치하에서는 전국적으로 민심이 흉흉했다. 숙종 6년(1680) 양인들의  군역 기피 현상이 심하게 
나타났으며, 숙종 7년(1681) 경기·충청·강원도에 큰 지진이 발생했다.  숙종 8년(1682)에는 전염병으로 
각 도에서 1만여 마리의 소가 떼죽음을 당했으며, 숙종 11년(1685) 호패를 위조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호
패 위조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까지 생겼다. 재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숙종 12년(1686)에 정부는 
기아 해결책으로 솔잎 먹는 법을 민간에 널리 주지시켰고, 숙종 16년(1690)  기아민 구제를 위하여 공명
첩 2만 장을 각 도에 분배하여 팔면서 호패 재질을 종이패에서 나무패로  바꾸게 했다. 숙종 18년(1692)
엔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도에 큰 지진에 일어났고, 숙종 19년(1693) 제주도에 천연두가 퍼져 약 
2천 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또한 숙종 21년(1695) 경기·호남 지방에 도둑이 횡행하였고, 숙종 
22년(1696)에는 전국적으로 수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가 속출했다. 이 틈을 타 숙종 23년(1697) 장길산이 
지휘하는 농민국이 봉기하였고 이 무렵 정부는 도성 안에 있는 거지들을 각 섬에 보내는 지경에 이르렀
다. 사정이 이러하니 숙종 26년(1700)에는 과거 제도가 몹시 문란해져 인재들이 설 땅이 좁아졌고, 매관 
매직이 공공연히 거래되었다.
  이처럼 조선 중기 상민의 양반화, 또는 천민의 양반화 및 상민화 현상이 보편적으로, 그리고 급진적으
로 진행된 것은 자연 재해로 인한 경제 혼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과거에서의 대량 합격, 면천(노비
를 면하게 해 줌) 등의 합법적인 일에서만 가능했던 신분 변동이 매매와 아울러 비합법적인  모칭, 족보 
매매, 입적 등의 방법으로 손쉽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양반으로 하여금 족보 매
매, 위장 입적에 나서게 만들었고 노비와  상민은 이런 신분 상승의 호기를 놓치지  않았다. 농업, 상업, 
공업과 같은 생업에 종사하는 상민과 노비는 생계 이상의 잉여 가치를 생산, 충분한 경제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가난한 유생이 배부른 '상놈'보다 우위에 설 수 없는 '배고픈 현실'이 이런 기현
상을 낳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양반의 수가 급격히 늘어 가자 '가짜 양반' 시비가 새로운 논쟁거리로 등
장하였다. 따라서 가짜 양반들은 자신의 뿌리를 입증할 족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족보 제작은 비밀스
런 유행이 되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왕이면 왕족의 후손처럼 보이기 위해 김·이·박 씨를 성씨로 
택했기 때문에 오늘날 김·이·박 씨가 대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양반 숫자가 전
체 인구의 5%를 넘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족보는 신분 높은 몇몇 집안에서만 제작되었다. 
하지만 족보는 조산 중엽에 이르러 양반들의 결속을 위한 상징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특히 숙종 이
후 많은 족보가 쏟아져 나왔다.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떨어져 군역을 맡는 등 사회적인 차별을 받았
기 때문에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한몫 끼는 일도 있었다. 또 족보 위조를 중개하는 일종의 사기꾼까
지 등장했으며, 신분적 패쇄로 사회 계급이 고정화됨으로써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대립이 조장되는 측면
도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이 오래 지속되자 족보로 말미암은 폐단은 심각해졌다. 종회가 그러했다. 숙종 
이후 많은 종회가 생겨 종친의 친목을 꾀한다 하였으나 그것이 순수하게 운영되지 못하고, 때로는 당쟁
에 이용되어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기도 하였다. '족보'에 대한 가치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크게 변화했
다. 즉 재정 형편이 어려운 국가에서 돈을  받고 임명장을 파는 제도를 실시함에 따라  관직 매매, 족보 
위조 등의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때문에 점차로 진짜 양반 가문을 가려 내기가 힘들어졌다. 그 
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타파되면서 '족보' 없는 집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족보를 통해 자기 뿌리를 밝히려는 유행은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있었다. 경제적 여유로 사
회적 활기를 보였던 19세기 말엽 아메리카 대륙의 미국인들은 유럽의 귀족 가문에 뿌리를 둔 것처럼 보
이는 족보를 다투어 만들어 신분을 과시하려 했다. 이른바 '유럽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유행이었으나, 이
때 이들이 제작한 족보는 우리처럼 이름을 적어 뿌리를 밝힌 '문서  족보'가 아니라 나무 뿌리에 빗대어 
얼굴이나 이름을 적은 '그림 족보'가 대부분이었다. 이때 족보를 만든 사람들은 대부분 백인이었다. 이후 
족보 열풍은 1970년대 후반기에 거세게 불어닥쳤다. 당시 '뿌리'라는 TV 연속극이 방영되면서 미국인들
로 하여금 백인들은 물론 흑인들까지 '뿌리' 찾기에  나서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족보 회사들
이 난립했고 사립 탐정들이 족보 추적에 나서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족보 열풍은 많은 사람, 특히 흑
인들에게 조상에 대한 그리움만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었을 뿐, 현실화된 족보를 손에 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프리카 시절에 대한 뿌리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추적 비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족보 유행의 관점에서 우리 나라와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경제적 호황으로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을 때 심리적으로 과거를 정리해 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데서 비롯된 현상이라는 점이다.

'근, 현대 비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 여행을 갔나  (0) 2020.08.25
김치 맛의 비밀  (0) 2020.08.25
일본 미인화  (0) 2020.08.25
물감을 아껴라  (0) 2020.08.25
터키풍, 유행하다  (0) 2020.08.2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