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우리 나라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답사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그것은 붕당 정치의 폐단에서 비롯된 일종의 탈출구였다.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 정치는 숙종(1674∼1720 재위) 때 절정에 달했다. 그에 따라 봉건 체제가 무너져
가고 사호는 위기 의식에 휩싸였다. 위에서는 정권 다툼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일삼았으며 아래에
서는 삶의 터전을 잃은 채 고행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이 세상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에서 시국을 걱정하는 일부 선비들이 통일신라 때의 유적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답사하며 '하나된 마음'
혹은 '평화', '안정'을 기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뜻 있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했다. 특히 석굴암은 당시
사람들에게 남다르게 보인 듯싶다. 답사객들은, 통일신라 때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멀리 동해 바
다를 바라보게끔 세워진 석굴암을 우러러보면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했을 것이
다. 통일을 이룩한 뒤 거국적 시각에서 민족의 발전을 꿈꾸었던 그때처럼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 오기
를... 숙종 때 정시한은 1688년 5월 15일 석굴암을 방문한 뒤 큰 감동을 받아 <산중일기>를 지었는데,
그 느낌을 이렇게 기술했다. '불상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정시한 외에도 많은 승려, 시인, 신도들이 석
굴암을 방문하고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이후 많은 선비들이 이 곳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았으며 감상기
를 남겼다. 영조 때 사람 남경희는 <우중숙석굴>과 <석굴>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시기의 이관오는
<석굴암>을, 최천익은 <유석굴증등여상인>이라는 한시를 읊어 당시 석굴암의 존재와 그 종교적 의의를
기린 바 있다. 근세의 미속화가인 정선도 1733년 명승지를 그린 <교남명승첩> 2권 가운데 경주의 석굴
을 그려 넣었다. 정선의 화첩은 석굴암에 전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어 20세기 들어 복원 공사를 할
때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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