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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조선 시대 사람들은 어디로 수학 여행을 갔나

by Frais 2020. 8. 25.

  17세기 말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우리 나라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답사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그것은 붕당 정치의 폐단에서 비롯된  일종의 탈출구였다. 조선 중기 
이래 계속되어 온 붕당 정치는 숙종(1674∼1720 재위) 때 절정에 달했다. 그에 따라 봉건 체제가 무너져 
가고 사호는 위기 의식에 휩싸였다. 위에서는 정권  다툼으로 피비린내 나는 정쟁을 일삼았으며 아래에
서는 삶의 터전을 잃은 채 고행을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민이 세상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에서 시국을 걱정하는 일부 선비들이 통일신라 때의 유적인 불국사와  석굴암을 답사하며 '하나된 마음' 
혹은 '평화', '안정'을 기원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뜻 있는 사람들 사이에 유행했다. 특히 석굴암은 당시 
사람들에게 남다르게 보인 듯싶다. 답사객들은, 통일신라 때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멀리 동해 바
다를 바라보게끔 세워진 석굴암을 우러러보면서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했을 것이
다. 통일을 이룩한 뒤 거국적  시각에서 민족의 발전을 꿈꾸었던 그때처럼  하루빨리 평화가 찾아 오기
를... 숙종 때 정시한은 1688년 5월  15일 석굴암을 방문한 뒤 큰 감동을  받아 <산중일기>를 지었는데, 
그 느낌을 이렇게 기술했다. '불상들이 살아 있는 것 같다.' 정시한 외에도 많은 승려, 시인, 신도들이 석
굴암을 방문하고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이후 많은 선비들이 이 곳 불국사와 석굴암을 찾았으며 감상기
를 남겼다. 영조 때 사람 남경희는 <우중숙석굴>과 <석굴>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시기의 이관오는 
<석굴암>을, 최천익은 <유석굴증등여상인>이라는 한시를 읊어 당시 석굴암의 존재와 그 종교적 의의를 
기린 바 있다. 근세의 미속화가인 정선도 1733년 명승지를 그린 <교남명승첩> 2권 가운데 경주의 석굴
을 그려 넣었다. 정선의 화첩은 석굴암에 전실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어 20세기 들어 복원 공사를 할 
때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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