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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현대 비밀

육전 소설과 붉은 딱지본

by Frais 2020. 8. 27.

  최남선(1890∼1957)이 1904년 10월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처음 동경에 도착했을   때 보
고 놀란 것은 집도, 전차도, 무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책방에 진열되어 있는 온갖 잡지와 신
간 서적이었다. 그 순간 그는 결심하였다. '저 책들이  오늘의  일본을 만들었구나. 내가 고
국으로 돌아가서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출판이다.' 1907년 가을, 최남선은  인쇄기를 
구입하여 귀국한 후 자택에 출판사 신문관을 설치하고 인쇄·출판업을 시작했다. 1908년 신
문관에서 발행한 <소년>은 근대적 종합 잡지의 효시인데, 당시 '소년'이란 뜻은 노년에  대
한 대칭 개념으로 '어린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젊은 사람'을 뜻했다. 잡지  성격도 지금의 
소년 잡지와 다른 청년들이 읽을 교양 잡지였다. 때문에 훗날 이  잡지가  창간된 11월 1일
이 '잡지의 날'로 정해졌다. 그는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실어 한국 근대시사에서 
최초로 신체시(새로운 형식의 시)를 선보였으며, 또한 잡지를 통해 새로운 문장을 소개했으
니 한문투나  문어체를 우리말투로 바꾸는  문체 변혁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열아홉이었다. 최남선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문맹을 타파하고 나아가 독서에 
대한 관심을 더욱 확산시키려면 읽기 쉬운 대중 소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에 새로운 기획
물을 개발하였다. <심청전>, <흥부전> 등 옛날 소설을 정리 순화하고, '육전 소설' 발간 사
업을 벌여 고전 소설을 값싸게 보급하였다. 그는  옛 소설을  새로 발간함에 있어 풍기음란
한 내용이나 쓸데없는 넋두리를 줄이고 그 대신  아름다운 우리말로 고쳐  아주 다른 책을 
만들었다. 1913년부터 발행된 육전 소설은 B6판  소형  판형인 까닭에 부담없이 휴대할 수 
있었던데다, 값을 아주 싸게 6전으로 매겼기에 널리 보급되었다. 최남선은  이미 1909년 '십
전총서'를 발행한 바 있으나, 좀더  낮은 값으로 구매력을 높이기  위하여 당시 시장터에서 
국수 한 그릇 값  정도인 파격적인 가격을 책정하였던 것이다. 육전 소설은 불과 1년  사이
에 10여 종이 발간될 만큼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 열기는 '붉은 딱지본'의 유행과 맞물려 
전국 각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사실 1910년대는 '대중 소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또한 최남선 혼자만이 활동
한 것은 아니었다. 1910년대 들어  기울어 가는 국운에 안타까움을  느낀  여러 선각자들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독서 열기를 높이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고전 
소설을 읽기 쉬운 문체로 다듬고 신소설을 선보이는 한편 책의 표지를 붉은색으로 치장함으
로써 이른바 '붉은 딱지 책'을  유행시켰다. 이때의 활자본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독자들의 
수요를 한꺼번에 무제한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이 매체가 등장함으로써 이전까지  부녀자나 
하층 서민들을 중심으로 완만한  영향력을 끼쳐 왔던 이야기책이 양적, 질적인 면에서 그야
말로 충격적 영행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초창기 활자본의 체재는  국판 크기에 띄어쓰
기를 하지 않은 내리닫이 조판이었으며 흑백 표지 형식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곧 크기
를 4×6판으로 바꾸고 표지에도 여러 가지  색을 쓰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얼룩덜룩하게 
독자의 시선을 끄는 모습으로 변화를 보이게 되는데, 이를 '딱지본'이라고 이름하였다. 딱지
본이란 대개 그 책의 표지가 아이들 놀이에 쓰이는 딱지처럼 울긋불긋하게  인쇄되어 있는 
데서 유래된  말이다. 딱지본으로 출간된 최초의 소설은 보급서관에서 1912년 발행한 <옥중
화>라는 작품이다. 같은 해 심청전의 개작인 <강상련>이 광동서국에서 출판되었으며, 이어 
토끼전의 개작인 <불노초>가 유일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이러한 대중  소설 출간 붐은 1930
년대 말까지 이어지는데, 이들 작품을 모두  통산하면 그 종류가 무려 250여 종에 이른다. '
붉은 딱지본'의 대중적  인기는 참으로 대단해서  도시는  물론 시걸에까지  보급되었으며, 
박종화(1901∼1981)와 채만식(1902∼1950)을 소설가로  만들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붉은 
딱지본'에 홀려 소설에 재미를 들였고,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년 시절 월탄 박종화의 집 근처에는 '신구서림' 이라는 큰  책방이 있었는데 때는 바야
흐로 독서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신문학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던 무렵이었다. 월탄은 한
문 공부를 하다가도 피곤하든가 지루해지면  얼른 신구서림으로  달려가곤 하였다.  화려한 
표지에  근대화된 장정의 고대 소설들은 흥미진진했다. <구운몽>, <춘향전> 등 고대  소설
뿐 아니라 <귀의 성>, <치악산> 등   이인직을 비롯한 이해조, 안국선의 신소설을  모조리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이 월탄을 붓 한자루로 살아 가게 만든 가장 큰 바탕이며 동기가 되었
다. 채만식 또한 붉은 딱지본에  현혹되어 문인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지금 나는 순수  문학을 합네,  순수 소설을 씁네 하지만, 내가 문학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은 어렸을 때 시골서 이른바 '붉은 딱지책'을 읽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
습니다. 그 당시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전> 따위의 10전짜리 소설에 재미를 들였던  
것인데, 그 뒤 춘원의 소설과 일본  작가들의 소설, 그리고 대학에 가서는 서구의  명작들을 
읽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체홉이나 발자크, 모파상을 읽었던 것이 아니요, 이해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날 소설가가 된 것은 '붉은 딱지 책'의 은덕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붉은 딱지 책'의 은공을 갚기 위해 내 생전에 3대 작품을 써 놓고야 말겠습니다. 최대
의 희극 소설로 <배비장>, 최대의 비극 소설로 <심청전>, 최대의 연애  소설로 <춘향전>, 
이 세 편을 문학적으로  다루어 완성시킴으로써  '붉은 딱지  책'의 은덕을 갚자는  것입니
다." 채만식은 과연 훗날 <배비장>을  써서 박문출판사에서  출간했는데  서점가에서 인기
가 대단했다 한다. 
그는 이어 <심청전>을 월간 <신세대>에  연재하였으나 연재 도중 총독부에서 발표  금지 
처분을 내려 부득이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춘향전>은 끝내  착수조차 못한 채 그는 세
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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