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영국은 끊임없는 국력 소모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밖으로는 프랑스와의 전쟁(1803∼
1815)과 미국과의 전쟁(1812∼1815), 안으로는 노동자의 기계 파괴 운동인 러다이트 운동(1811∼1812)으
로 인해 재정적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국가 경제가 이러하니 국민들 가정 형편 또한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실업자들은 그 불만을 기계 파괴로 분출했지만 그렇다고 배고픈 현실이 해결되지는 않았
다. 사람들의 불만은 자꾸만 쌓여 갔고, 아울러 무언가를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하려는 욕구가 강해져 갔
다.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영국 런던에서는 투견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투견은 빈민들의 도
박이자 스트레스 해소책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런데 투견은 반드시 개 한 마리의 희생을 필요로
했기에 개 주인의 손실이 컸다. 이때 등장한 것이 '쥐잡기'였다. 투견을 응용한 신종 도박으로 쥐잡기가
생겨 난 것이다. 쥐잡기는 불결한 주거 환경 때문에 급격히 늘어 난 쥐도 잡고 투견으로 인한 개의 희
생도 없앤 아이디어 도박이었다. '곰놀리기'가 귀족, 부자들의 유흥거리였다면 쥐잡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오락이었다. 쥐 공급은 어렵지 않았다. 푼돈을 벌기 위해서 집 안 곳곳의 쥐를 잡는 사람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도박의 진행은 이러했다. 천장에 촛불 등잔이 걸리고 사방이 나무 판자로 막힌 어두컴컴한 도박장에
개 주인이 각각의 개를 출전시키면 사람들은 우승 확률이 높은 개에게 돈을 걸고 심판관은 쥐 사냥을
주관한다. 그런 뒤 일정한 시간 안에 개 한 마리가 도박장 안의 쥐를 얼마나 죽이는가를 세는 것이다.
1820년경 빌리라는 개는 뛰어난 쥐 사냥으로 유명했는데, 5분 30초 동안에 1백 마리의 쥐를 잡았다고
한다. 이 잔인한 도박은 1820년대의 영국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니. 가난이 빚은 지저분한 오락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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