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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진짜 유럽 이야기 2

by Frais 2020. 5. 28.

이탈리아

 

이탈리아인은 없다. 로마사람, 밀라노 사람, 피렌체사람만 있을 뿐

지독한 지역주의

이탈리아인은 하나의 민족이라기보다는 이탈리아 여러 지방 사람들의 집합체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분명히 민족 자체는 하나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자신을 로마 사람, 밀라노 사람,

시칠리아 사람, 피렌체 사람으로 소개하지 이탈리아인으로 소개하지 않는다. 물론 해외에서

주로 생활하는 극소수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당신은 이탈리아 사람인가요?"라는 질

문에 ". 나는 이탈리아 사람입니다"라는 대답은 대개 이탈리아어 교본에나 나오는 '정답'

이다. 실제 그들의 대답은 "그렇소, 하지만 난 베네치아 사람이오" 하는 식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고속도로, 철도, 그리고 가톨릭 교회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기야 그도 무리가 아닌 것이 이탈리아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 1861

부터였고, 그 이전엔 로마제국 멸망 이후 수없이 많은 작은 나라와 도시에 흩어져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 고향이 곧 국가요, 세계요, 우주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 통일의 사상적 아버지였던 카밀로 카보우르 백작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드디어 이탈리아를 창조하였다. 이제는 이탈리아인을 창조할 차례다."

그가 아직 살아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의 꿈이 아직도 요원한 것임을 절실하게 깨달았을

게다. 다만 그가 기뻐했을 일이 있다면, 월드컵 축구 대회나 세계 스키 대회에 출전한 선수

들을 향해 "이탈리아!"라는 함성과 함께 국기를 흔들며 열광하는 응원단들, 그리고 서울에서

부터 남아공은 물론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고르게 퍼져 있는 이탈리아 식당들이 한결같이

'이탈리아'라는 말을 쓰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 밖에서의 일일 뿐이다.

'이탈리아'의 승리를 외치고 난 응원단조차 다음 순간 이탈리아를 까맣게 잊고 자신이 밀

라노, 로마, 제노바 사람임을 강조하며, 방금 메달을 거머쥔 선수가 자기 고장 사람임을 자

랑한다.

그래서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첫인사는 상대방에게 어디 출신인가를 묻는 것

이다. 이것은 미국 사람이나 독일 사람, 또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

이다. 한국인이라는 대답으로 끝내는 우리에게 그들은 통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는다. 특히

독일인의 경우, 이탈리아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란 곤혹스럽지 그지없다. "어디 사람이냐고

? 글쎄, 태어나기는 함부르크, 자라기는 뮌헨, 대학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녔고, 지금은

베를린에 사는데 어디 사람이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런 문제는 이탈리아 사람에겐 아주 분명하기 그지없다.

베네치아에서 태어났으면, 로마에서 자라고 밀라노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20여 년 간 미국

에 이민 가 살다가 다시 돌아와 피렌체에 살아도 그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베네치아인이

. 만약 그 자신이 원치 않아도(결코 그럴 리는 없지만) 모든 이탈리아인들은 그를 베네치

아인으로 인정할 뿐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이탈리아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자기가 태어난 고향을 등에 업고 다닌다. 이런 지독한 지역성(campanilismo)은 이탈리아인

의 정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그의 고향은 그의 세계이자 우주의 한복판이며,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고귀한 정신적 지주인 것이다. 그들은 지구 끝에서라

도 동향인을 만나면 바로 백년지기가 된다. 그러나 '다른 이탈리아인'(다른 지방 사람)'

국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좋을 정도다. 동향인끼리 있을 때 이탈리아인들은 곧 천국에서

노니는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지독한' 지역성은 넓게 보면 이탈리아인들이 해외에 이주해서도 이탈리아인으로 남

아 있는 기초적인 조건이 된다. 미국 뉴욕이나 LA등 대도시에는 어김없이 리틀 이탈리아라

는 이탈리아인 주거지역이 있고, 전세계적으로 이탈리아계 해외 이주민이 퍼져 살지만 결코

그들은 미국인, 아르헨티나인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계속 이탈리아인, 아니 그가 태어난 지

역인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결혼도 주로 자기들 공동체 안에서 하며, 마피아라고 하는 '고향조직'(?)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날 수도 없지만. 미국에만 2,000만 명에 이르는 이탈리아 성()을 가

진 이탈로-아메리칸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빈민촌에서 살건 대저택에 사는 갑부건 이탈리

아인이다. 프랑코 시나트라, 로베르토 데 니로, 프란치스코 코폴라, 실베스트로 스탈로네(

탤런)는 미국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이탈리아의 핏줄이 흐르고 있

.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유일한 나라

이탈리아 사람들은 외국인을 좋아한다. 특히 돈 많은 외국인은 더욱 환영이다. 그래서 매

년 알프스산맥을 넘어오는 600만 명에 달하는 게르만족들은 더더욱 대환영이다. 그들은 매

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하지만 과거 고대 로마 시대처럼 이탈리아 반

도를 점령하거나 멸망시키려는게 아니라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마르크, 프랑, 크로네, 길더

등을 아낌없이 쏟아놓고는 때가 되면 부탁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너무

'귀여운 야만족'들이다. 이들이 더욱 사랑스러운 것은 같은 서구 문명의 뿌리를 가진 공

동 문화권에 살고 있으면서 고대 로마 문화가 뿌려준 고귀한 문화의 씨앗에 대한 고마움을

알고 있고, 그래서 이탈리아의 문화와 이탈리아인에 대해 각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귀여운 게르만족', 즉 독일인, 네덜란드인, 스위스인,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굳이 '사람으로 쳐주자면'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만족까지도 이 찬란한 고대문화 유적에 한 없

이 겸손해하는 점이 이탈리아인들은 너무나 마음에 드는 것이다. '쥐뿔도 없는 노란 것'

(이탈리아인들이 보는 일본인, 한국인, 중국인)이 돈푼깨나 있다고 마구 브랜드 제품을 사대

며 저희네 말로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는 것도 '문화의 혜택을 보지 못한' 먼 나라 ET들의

짓이니 탓할 것이 못 된다. 어차피 그들은 유적지에서 사진을 찍어대느라 제대로 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제 나라에 돌아가면 이탈리아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을 것이 뻔하니,

중한 달러나 엔화만 잔뜩 풀어놓고 가면 그런 대로 봐줄 만은 하다.

그런데 이탈리아인들이 결코 봐줄 수 없는 고약한 인종이 있는데, 바로 프랑스인들이다.

'이것'들은 문화란 것을 이탈리아에서 수입해 가기 전까지만 해도 형편없는 야만인에 지나지

않았던 주제에, 언제 문화라는 것을 갖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그 위대한 이탈리아 문화 앞에

전혀 고개 숙일줄을 모르는 유일한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나 포로 로마노와 같이

전세계 사람들이 그 앞에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위대한 로마 문화를 찬양하는 옆에서

계속 하품만 해대는 오만하고 방자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인 것이다.

게다가 우쭐대기 좋아하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어서(이탈리아인들의 눈에는) 보기만 해도

울화통이 치미는데, 그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건 프랑스인들이 그 '형편없기 짝이없는'

도주로 이탈리아 포도주를 밀어내고 세계를 석권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사람들이 조금만

더 머리가 깨고 미각과 포도주 문화에 대한 최소한의 센스만 있더라도 이탈리아산 포도주를

두고 프랑스산 포도주를 살 리는 결코 없을 텐데 말이다.

한편 프랑스와는 개와 고양이 같은 관계를 지닌 영국인들을 보는 눈은 조금 착잡하다.

탈리아에 온 영국인들은 처음엔 그토록 견딜 수 없어 하던 냄새, 소음, 난장판이 곧 '미칠

듯한' 매력으로 둔갑하는 데 비해, 영국을 찾는 이탈리아인들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 음

울하고 차가운 정적과 질서를 견디지 못한다.

이탈리아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 이탈리아가 세상에서 가장 뒤죽박죽이며 엉망진창

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탈리아를 벗어나면 그 어디를 가도 형편없는 패스트푸드나

냉동식품으로 배를 채우고, 청바지 쪼가리나 걸치고 다니며, 빛나는 태양 대신 추적추적 내

리는 빗속에서 굳은 표정이나 짓고 다니는 슬프기 짝이 없는 나라들뿐이다. 그래서 이탈리

아인들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나라' 이탈리아를 운명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

 

으르렁거리는 남과 북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이 심각한 지경이라고 걱정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나라 한 국민 사이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한다는 숙명감이 전제되어 있고 국민화합 차

원에서 이를 문제삼고 있지만, 이탈리아의 남북감정은 이와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 로마를

중심으로 북과 남으로 확연히 갈라지는 지역정서는 서로를 완전히 이질적 존재로 규정해 버

리고는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갈라설 수 있다는 태도이다. 실제로 북부 이탈리아만 따로

떼어 '파다니아 공화국'을 수립하겠노라는 움베르토 보시를 중심으로 한 급진파들은, 이미

국기까지 만들어놓은 것은 물론 사제 장갑차를 동원하여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탑을

점거하는 바람에 군대가 출동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북부인들은 남부인들을 메초조르노라고 부르며 부패한 족속이자 반아랍인쯤으로 경멸한

.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 없이는 살 수 없는 게으른 '촌놈'이자 북쪽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형편없는 마피아들로 백안시한다. 남부 이탈리아인의 눈에 비치는 북부인들은 오스트리아인

과 다름없고(북부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인에

대한 반감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일감정과 유사하다) 반쪽 프랑스 ''들이며, 운이 좋아

부유한 북부에서 태어난 덕에 남부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 흘린 노동을 착취하며 호의호식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남과 북은 먹는 음식이나 언어까지 크게 달라, 남쪽에서는 주로 파스타와 올리브 기

름 없이는 요리를 못하는 반면, 북부에서는 옥수수, , 버터 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1960

대 남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어느 멜로 드라마는 북부의 극장에서 상영될 때 더빙을 하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사투리 차이도 심하다. 북부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현상들, 예컨대 인플레이션, 부정부패, 수출 부진, 파업 등을 모두 남부

사람들 탓으로 미뤄버린다. 그래서 '남부병'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그러나 실제로 이탈리아에

서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곳은 돈이 제일 많다는 이탈리아의 경제 중심지 밀라노이며, '뇌물

의 수도'라는 별명까지 얻고 있으니, 남부인들이 곱지 않은 눈으로 북쪽을 노려보는 것도 당

연하다.

지역별로 홈을 둔 축구팀들이 벌이는 이탈리안 축구 프로리그가 유별나게 애향심이 강한

이탈리아인들을 열광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남북 도시간의 경기라도 벌어지면

말 그대로 '남북전생'을 방불케 하는 남북 지역감정의 대리전쟁이 그라운드 위에서 불꽃을

튀기게 된다. 그러나 서로 으르렁거리는 남북이지만 쉽사리 등을 돌리고 갈라설 수 없는 이

유는, 만약 이탈리아가 둘로 쪼개진다면 북부는 노동력 부족으로, 남부는 자금 부족으로 경

제가 엉망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은 말 그대로 오월동주 처지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럴 경우,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은 머리조차 못 깎을 신세가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나라 이발사들은 거의 모두가 남부 출신들이기 때문에.

 

세계 패션계를 평천하한 이탈리아

구치, 아르마니, 베르사체, 미소니, 베네통... 패션 산업에서 디자인이 고부가가치의 열쇠라

는 사실이 새삼 강조되면서 우리나라도 패션 디자인 육성에 발벗고 나섰다. 그런데 어찌하

여 이탈리아 패션이 프랑스를 누르고 전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있을까. 그야말로 이탈리

아 패션이 평천하(平天下)한 듯,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최고급 쇼핑센터는 이탈리아 패션

브랜드가 완전히 석권하다시피 하고 있다.

혹자는 이탈리아인들의 디자인 감각이 뛰어나서, 혹자는 로마시대부터 사치의 전통이 있

어서, 혹자는 이탈리아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분석을 하는데, 모두 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탈리아 국민이다. 패션에 대해 유별나게 까다롭

고 나름대로 세련된 취향을 가진 소비자가 있었기에 이탈리아 패션이 그토록 성장할 수 있

었던 것이다. 일본 제품이 세계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게 된 것은 12,000만이라고 하는

엄청난 소비자를 가진 방대한 시장과 업체들 간의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더구나 일본 소비

자들은 세계 어느나라 국민들보다 까다롭기 그지없고 수준 미달의 품질에 '잔인'하다. 그 치

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다 보니 일본 제품의 품질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로 이탈리아인들의 옷에 대한 유별난 관심이 오늘의 이탈리아 패션 산업을 일구어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옷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굳이 고전적 의미에서 정장을 차려

입는다거나 격식을 갖춰 입는 것은 아니지만 입어야 할 옷을 '제대로' 입는다. 옷장에서 아

무 옷이나 대충 꺼내 걸쳐 입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찰관이면 경찰관,

학교수면 대학교수에 걸맞은 옷차림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지위, 어떤 직업, 어떤

입장이든 항상 그들의 옷차림은 나름대로의 매력을 살리고 자신이 빛나게 보이도록 배려한

. 대충 차려 입은 듯하면서도 자신의 몸매와 신분을 십분 살려내는 센스가 그들의 몸에

배어 있다.

벨라 피구라(bella figura, 멋진 모습)는 이탈리아인들의 자주 입에 담는 말은 아니지만,

잠시도 이에 관심을 쏟지 않는 순간이란 없을 정도이다. 예컨대 수영장의 긴급구조원은 하

루 종일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어떤 수영복이 자신의 체형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이며, 어떤 폼으로 수영장 주변을 순시할 때 여성들에게 멋지게 보일 수 있는가

에 가장 큰 신경을 쓴다. 은행의 청원경찰조차 똑같은 유니폼이지만 어떻게 입어야 가장 멋

있게 보일지, 모자는 또 어느 정도 비스듬히 써야 할지, 허리에 찬 권총을 어떤 손으로 지그

시 누르고 있어야 쿨(cool)하게 보일 것인지에 대해 고심한다.

스포츠의 경우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수영장에 갔을 때 수영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얼마나 멋지게 보이느냐가 최대의 관심사다. 그래서 잠수

코스에 등록이라도 한 날이면 가장 먼저 스포츠용품점으로 달려가 남의 눈에 멋지게 보일

값비싼 수영 장비부터 구입한다. 물에만 들어가면 맥주병이나 다름없는 실력에도 잠수의 프

로 선수로 잠들이 보아주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것이다.

이탈리아인 가정의 창고엔 값비싼 고급 스키장비들이 완벽한 구색을 갖춘 채 쓸모없이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신 유행일 때 큰돈을 들여 구입한 뒤 스키 자

체보다는 스키장에서 패션쇼 하느라고 한두 번쯤 하루 종일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와 창고에

처박아버린다. 그러면 그 뒤로 새로운 스키 패션이 나타나 기껏 산 장비는 구식이 되어버려

다시는 햇볕 볼 기회가 없고, 그렇다고 버리거나 헐값에 팔아버리기엔 들인 돈이 너무 아까

워 그렇게 창고에서 썩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기 위하여 영하의 혹독한 추위에도 알다리에 스타

킹 하나만 걸치고 오돌오돌 떠는 여성들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들에게 스포츠란 멋진

몸매를 가꾸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멋진 몸매를 '보이기' 위한 것이다. 누가 보아도 멋지다고

보기엔 힘든 몸매를 가진 사람도 자신의 매력이 몸매의 결함을 충분히 보충할 수 있다고 믿

는 데에 커다란 비극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런 만큼 이탈리아인들은 항상 남들이 옷 입는

것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나름대로의 센스를 키워간다.

이런 재능은 외국인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이탈리아적 특성이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에

서 연합군과의 전투가 한창이었을 때 영군 패잔병들은 입고 있던 군복, 침대보. 커튼 등을

이용, 변장을 하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열이면 열 모조리 대번에 발각되어

포로수용소로 직행해야 했다. 그 어설픈 '패션 감각'으로는 독일군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이탈리아군의 눈은 결코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국민을 가진 이탈리아가 세계 패션

을 제패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멍청한' 남자와 '탁월한' 여자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경제적, 조직적, 정치적 단위는 가족이다. 이탈리아에서

얘기하는 가족이란 부부와 자녀들로 이루어진 핵가족만을 일컫는게 아니라 가지에 가지를

친 씨족을 통틀어 일컫는 개념으로, 이는 <대부>라는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는

알려져 있다.

핵가족이나 소가족은 온 가족을 먹여 살리는 가장으로서 모든 대소사를 혼자 결정하는 아

버지, 진짜 힘든 일을 모두 도맡아 하면서 모든 일은 아니지만 정말 중요한 일의 결정을 내

리는 어머니와 의타심으로 똘똘 뭉친 자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실 이탈리아의 아들들은

어렸을 때부터 잘못된 버릇이 몸에 배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노력해서 얻는다는 개

념을 전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딸들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자라난 탓에 오히려

나아서 오빠나 남동생들의 무능과 약점을 간파하고 비교적 강인하게 성장한다.

혈족, 씨족인 대가족은 영세, 결혼, 장례 등 대소사엔 어김없이 총집합하는 작은 군대로,

그 머리 숫자가 워낙 대단해서 우리나라 같으면 국회의원에 출마할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

들며 눈도장을 찍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회 단위이다. 가족잔치는 그들의 위세를 확인하

고 과시하는 행사로, 그 규모를 확대해 보면 김일성 생일행사를 치르는 북한의 모습과 유사

할 것이다. 비록 마피아가 아니더라도 대부와 다름없는 가로(家老)를 위시한 위계질서가 분

명하여, 핏줄로 짜여진 이 그물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족쇄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인으로서

일단 결정된 가문의 뜻을 거역한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우며, 한다 하더라도 영구히

가문에서 추방당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 27세 된 이탈리아인 전체의 4분의 3이 부

모에게 얹혀 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나라에서 가정을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나라와는 전

혀 다른 전제와 정서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버지는 닭으로 치면 머리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모든 일을 결정하

지만, 머리는 목이 돌리는 대로 돌아가게 마련이듯이 모든 이탈리아의 아버지 뒤엔 여성이

버티고 앉아 있다. 부인이든 연인이든, 대개 엄마라고 불리는 여인이. 이탈리아 남성들은 자

신의 어머니를 성녀 마리아라고 믿으며, 따라서 자신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며 인류에 대

한 신의 선물이라는 착각속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자들은 부모로부터 독립해 나

가기가 '끔찍할' 정도로 어렵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정말 헌신적이어서, 아들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정도로 지성을 다해 모든 걸 바친다. 결혼한 뒤에도 일주일에 한 번 쌓아두었

던 빨래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군소리 한마디 없이 깨끗이 빨래하고 다림질까지

해서 돌려준다.

서른 살이 넘은 아들이 부모 집에서 여전히 함께 사는 사실 자체가 이탈리아에서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이미 십대에 부모 품을 떠나 자립해 나가는 알프스 이북의 유럽

나라들과는 근본적으로 정서가 다르다. 손짓 하나만 까닥하면 뭐든지 다 알아서 해다 바치

는 어머니가 있고, 자신은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편안하고 경제적(!)이기 그지없는 집(부모)

을 왜 떠나야 하는지 그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이런 집을 놔두고 험

한 세상에 나가 침대 정리나 설거지처럼 평생 해보지 않은 고생을 사서 하려는지 모르겠다

는 것이다. 그러니 이탈리아엔 고령의 미혼 남성이 많을 수밖에 없고, 이들은 어김없이 부모

에게 당당하게 '기생'하며 산다.

이탈리아 여인들은 '멍청한 남자들'에 비해 탁월한 연극배우들이다. 겉으로는 양순하고 너

그럽게 남편들에게(또는 애인, 파트너) 편안함을 선사하지만, 알 것은 모두 알고 있으며,

기가 하고 싶은 일은 다 하고 살면서 정작 이탈리아 가정을 지배하는 사람은 여성들이다.

그네들은 남성들에게 체면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남성들한

테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위엄 있는 가장 역할을 맡도록 내버려두지만, 어렸을 때

부터 의타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이탈리아 남성들이 인생의 대소사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남정네들이 할 줄 아는 일이란 고작 멋이나 부리고, 커피나 마시며, 애나 만드는(낳기는

여자가 낳지만)일뿐인 것이다. 이런 허수아비 같은 남정네와 살면서 아이들만 손아귀에 쥐

면 가정의 모든 권한은 저절로 그네들이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여성들은 안다. 남자보다 조

금 낮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서 크게 자존심 상할 것은 없다. 그 적은 대가를 지불하는 대

신 가정의 헤게모니는 그네들 것인걸...

 

극우단체가 주로 벌이는 정치테러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환경을 유지하는 서구 선진국 가운데 유독 이탈리아만은 항상 정치

적으로 불안정한 위기가 연속되고 있다. 1948년 이후 내각이 수십 번이나 바뀌었고, 그나마

1년 이상 유지된 경우도 극히 드물다.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연합하

지 않으면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 연합이 깨지거나 정치적 주요 이슈가 발생할

때마다 내각이 바뀌고 수상이 바뀌는 불안정한 정치환경이 거듭된다. 그래서 최근에는 이럴

바에야 차라리 과반수가 안되더라도 국민의 최대 지지를 받는 정당에게 전권을 맡기도록 제

도를 바꾸자는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동요와 불안 속의 정치판에서도 판 자체가 깨지지 않고 나름대로 유지되는 이유는

기독교민주당(현재는 이탈리아국민당)이라는 중산보수층을 대변 정당이 언제나 어떤 형태로

든 내각에 발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상류층, 중산층 그리고 기업가 집단들을 기반으로 하

고 있는 이탈리아 국민당(PPI), 아무리 국민이 표를 몰아준 정당이 연합정권에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더라도 현실적으로 이탈리아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실력가들과 밀착된 일종의

정경유착의 형태를 공고히 유지함으로써 그 숱한 내각의 교체 과정에서도 무려(!) 50회 이

상이나 집권당의 하나로 이탈리아 정치의 핵심에 남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수우익 세력

인 이탈리아 국민당의 영향력이 강한 만큼. 정반대 세력인 이탈리아 공산당(PCI)이 서구에

선 유일하게 강력하고 거대한 견제세력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은 집권 여부를 떠나 이

탈리아 사회를 크게 개혁한다기보다는 사회의 점진적인 변화와 진보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 국가의 공산당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보수우익 세력과 진보좌익 세력의 이념 대립이 극심한 나라인 만큼 이탈리아는 유감스럽

게도 정치 테러에서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정치 테

러로 생명을 잃고 , 부상자는 수천 명에 달한다. 여기에 마피아와 국가 간의 '전쟁'으로 야기

된 폭력사태까지 정치적 테러로 분류한다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주로 극우단

체들이 극성을 부리는 정치 테러의 역사는 2차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이 끝난

뒤 왕국을 유지해야 한다는 세력과 공화국 건설을 주장하는 세력이 격돌하여 테러가 끊이지

않았는데, 이는 해방 후 우리나라의 좌,우익 대립과 흡사하다. 여기에 과거 무솔리니 시절

파시스트의 폭력시대를 20년 가까이나 겪었던 나라인지라 자기 주장을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경로를 통해 주장하기보다는 폭력을 사용해 정적과 반대자를 제거하는 테러로 해결하려 들

어 이탈리아 정치사는 유혈이 낭자한 현대사가 되고 말았다.

정치 테러는 1970-1980년대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아서 19808, 볼로냐 시철도역 폭탄

테러라는 이탈리아 테러 사상 최악의 사태를 야기했다. 무고한 여행객 85명이 즉사하고 200

여 명이 부상한 미증유의 스트라지(stragi=피바다)였다. 그 수많은 정치 테러는 아직까지도

범인이 체포되지 않았거나 미궁에 빠져 있다. 1978년의 경후 한 해 동안 무려 1,118건의 테

러가 자행되었는데, 이는 하루 평균 3건 이상으로, 이탈리아 신문들은 매일 지면을 테러 기

사로 채우기에 바쁘다. 하지만 현 이탈리아의 정치현실을 보건대 이러한 다혈질적 테러 사

태가 갑자기 줄어들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세계를 하나로 나라는 두 개로

이탈리아의 역사는 길고도 다양하다. 그런데 고대 로마 역사는 누구나 잘 알고 있으면서

도 그 뒤의 역사는 아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이 또 이탈리아 역사다. 이탈리아 역사는 크게

세 가지의 '동아리'로 묶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반도에 최초로 등장한 민족은 BC 10세기경의 이탈리아인과 강력한 해양민족이

었던 에트루리아인들이었다. 남부의 에트루리아인들은 BC 5세기경 그리스인들에게 축출되

, 이곳에 그리스인들은 식민지(Magna Grecia)를 건설하였으며, 중북부의 에트루리아인들

은 이탈리아계인 로마인에 의해 정복되었다. BC 42, 아우구스투스는 오늘의 국경에 해당

하는 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브리타니아, 아프리카, 스페인에서 중앙아시아 코카서스

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으며, 로마는 당시 지중해권 전역을 장악하는 강력

한 중앙집권 제국의 수도이자, 세계(고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소수 로마 귀족이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오랜 평화에서 오는 정신적 해이, 향락과 부패

로 로마제국은 내부로부터 붕괴되기 시작, 급기야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동서 로마제

국으로 분열되었고, BC 5세기에 이르러 게르만족의 침공에 의해 고대 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로마제국이 공중분해된 뒤 이탈리아 반도는 권력의 공백상태가 되고, 잇따른 게르만족의

침공 등으로 혼란이 가중되자, 강력한 통치권이 존재하지 않던 상황에서 교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의미가 증대하여, 로마는 유럽 문명을 하나로 묶는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탈리아 반도와 로마는 유럽의 패권을 노리는 이웃 열강들의 끊임

없는 세력 대결에 시달려야 했다. 로마제국이라는 단일국가가 사라진 자리에는 수없이 많은

군소 도시 중심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려한 로마 문화의 유산을 물려받아 문화, 제도에서 앞선 '선진국'들이었다.

12세기의 피렌체는 금융의 중심지로 최초의 은행이 등장했고, 13세기의 베네치아는 당시

지중해 동부권은 최대 무역센터였다. 그 밖의 여러 나라들도 새롭고 기능적인 정부조직으로

외세의 침략 속에서도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봉건주의 시대를 마감하고 강력한 중앙집

권시대가 열리면서 유럽은 부르봉(프랑스)왕조와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왕조의 세력으로

크게 양분되어 치열하게 경쟁했고, 특히 이탈리아 반도는 지리적, 정치적 이유와 로마를 가

운데 둔 두 세력의 끊임없는 세력대결로 고통받아야 했다.

두 세력 간 충돌의 하이라이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이었다(1796/97). 오스트리아를

격파한 나폴레옹은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대부분을 점령, 1805년 이탈리아

왕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외세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통일 이탈리아 건설이 절실하다는 각성이 일어 독립, 통일 운동이 활발해졌는

, 마치나(Giuseppe Mazzini)와 카보우르(Camillo Benso di Cavour)가 이끄는 '젊은 이탈리

(Giovine Italiana)라는 과격 민주, 민족주의 운동과 가리발디 장군(giuseppe garibaldi)

이끄는 엠마누엘레 2(emmanuelle 2)를 왕으로 한 이탈리아 왕국 건설운동이 정면 대결,

오늘도 이탈리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신화적 인물 가리발디에 의해 1870, 통일 이

탈리아 왕국이 건설되었다.

여러 개의 나라를 하나로 묶은 이탈리아 왕국은 통일이 되면서부터 남북 갈등을 겪어야

했다. 급속한 산업화로 서유럽처럼 산업국가화된 북부와 농업에 의존하고 있는 남북 간의

빈부 격차가 심각해졌고, 이로 인한 갈등은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경제발전에 힘입어 당시 유행(?)이던 해외 식민지 경략에 눈을 돌린 이탈리아는 1915,

뒤늦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명목상 승전국의 대역에 낄 수 있었다. 공중분해된 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영토의 일부를 얻기는 했으나, 과거 독일의 식민지였던 해외 영토

분할에 아무런 혜택도 받지 못하게 되자, 엄청난 전쟁비용 부담과 겹쳐 이탈리아 국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를 교묘하게 이용한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정권을

뒤엎고,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다음 강력한 파시스트 독재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는 패전을

딛고 일어난 독일의 히틀러와 손잡고 베를린-로마 추축국을 형성. 1940, 세계 제2차대전

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패전 끝에, 1943년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그 뒤 수립된 히

틀러 괴뢰정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스위스로 도주중 체포되어 총살되었다(1945).

2차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는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었다. 파시스트에 협력했던 국왕은

국민투표에 의해 영구 추방되었고 왕정은 폐지되었으며, 1948, 새로운 민주공화헌법에 의

해 오늘의 이탈리아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수많은 정당이 생겨나 정치혼란이

가중되었으나, 보우우익정당인 기독교민주당(DC:democrazia cristiana)이 최대 정다으로 밥

먹듯 바뀌는 내각에 항상 참여하고 있고,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공산당으로서, 1970년대에는 독자노선을 선언하며 소련과 결별, 이른바 유러 코뮤니즘(유럽

식 공산주의)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2년 총선에서는 보수대연합을 표방한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DC,PCI

를 꺾고 집권에 성공하여 수상이 되었으나, 언론재벌인 그가 권력을 개인사업에 이용한다는

여론에 밀려 19949, 사임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정당들은 고지식한 과거의 이념대립 시

대에서 벗어나 국민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이미 1990, 이탈리아 사회당

(PARTITO SOZIALISTIA ITALIANA:PSI)은 민주당으로, 기독교민주당(DC)은 보수적 냄

새가 지나치다 하여 1993, 국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대로마제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무대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선조들의 영광이 곧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바로 자신들의 영

광임을 알고 역사를 창조해 가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스크루지 영감 뺨치는 구두쇠들의 집합

스위스는 작은 나라지만 네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복합문화를 지니고 있다. 서로 다른 언

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사고방식과 행동양식도 언어권에 따라 크게 다름을 의미한다. 그러나

네 개 지역을 이루는 작은 지역 또한 서로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스

위스 전체 인구의 사실상 대다수(75%)를 차지하는 독일어권을 주로 다루기로 한다. 그렇다

고 해도 전체 스위스인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기본 의식은 모두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스위스 국민의 기본정서는 불안

스위스의 경제가 세계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스위스는 내륙국가다. 그래서 수산자원이란 꿈조차 꿀 수 없는 처지이다. 인구를

보아도 전국을 통틀어 700만에 지나지 않으니 1,000만 명을 웃도는(주변 위성도시 포함)

리나 런던의 한 도시보다도 더 작다. 더구나 네 개 이상의 언어를 쓰고 있으니 온 국민이

경제적으로 '단합'하기도 어렵고, 사실상 나라 전역을 차지하다시피 하는 알프스 산은 별다

른 지하자원을 캐낼 만한 곳도 못 된다. abffgs 수력발전으로 전기를 일으킬 수 있고 호수

에서 고기를 낚아 올릴 수 있다 하더라도, 스위스는 현실적으로 지하자원이 전혀 없다시피

한 척박한 땅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 한 조각이나마 해외 식민지가 있어 수출상품을 마음놓

고 밀어낼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떠들썩하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유럽연합(EU)

회원국도 아니다. 그런 만큼 밀 한 톨을 수입하더라도 반드시 관세란게 붙게 되어 있어서

거의 모든 생필품을 사다 써야 되는 스위스 국내시장 물가는 이웃 EU 가맹국에 비해 터무

니없이 비싸다.

이러한 경제적 입지조건만 놓고 본다면 도대체 스위스란 나라는 소젖이나 짜고 산딸기나

따먹으며 연명해야 될 나라가 아닌가. 그런데도 스위스 돈인 프랑은 금보다 안전하고, 스위

스 경제는 융프라우봉의 바위보다도 단단하며, 국민 평균소득은 세계 최고의 자리를 언제나

굳게 지키고 있다. 물론 석유로 떼돈 번 중동 국가가 수치상 앞지른 적도 있지만, 사실 몇몇

권력자가 모든 돈을 독차지하고 있다시피 하여 국민 평균소득이 고를 리 없는 중동 국가를

국민이 고르게 잘사는 스위스와 비교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이러한 스위스의 빛나는 경제도 스위스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람... 지금부터 700여 년 전 스위스 연방이 탄생했을 때부터 스위스

인들의 마음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불안감이다. 스위스를 둘러싸고 있는 힘센

이웃 강국들에 비해 너무나 보잘것없는 작은 나라. 그 욕심 많은 이웃 나라들한테 언제 어

떻게 잡아먹힐지 모르는 일...

지금은 비록 부를 누리고 평화롭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짐나 이 모든 건 순간뿐, 언젠

간느 '눈물의 바다'로 끝날지도 모르는 일... 이런 불안심리가 이미 한참 전에 목적지에 도착

했는데도 그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고 마치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잘 달리고 있는 말에

다 쉴새없이 채찍질을 해대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고나 할까.

스위스인들은 지금도 자신들이 평생 공들여 이룩해 놓은 것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잃게 되

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바로 코앞에서 백만 붉은 군대가 한

반도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불장난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도 태연하기만 한 '통큰' 한국인과

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길 건너 이웃의 말을 못 알아듣는 세계에서 유일한 직접민주주의

스위스는 하나의 나라라기보다는 23, 정확히 얘기하면 26개 작은 나라들의 집합체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23개 칸톤() 중에서 3개의 주가 또 2개의 반 칸톤으로 나누어져

있어 26개라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주권을 가진 엄연한 주

인 만큼 26개 독립국가의 동맹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각 칸톤은 미니 국가들이다. 재정 및

예산이 독립되어 있고, 세금도 독자적으로 징수하며, 독자적인 법원 및 경찰이 있고, 교육제

도에서 운전면허 시험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립국가나 다름없다.

리고 실제로 그렇다고 믿는 주민들도 있다. 게다가 스위스 연방 전체에는 3,000개가 넘는 지

역별 자치단위가 있는데 가스, 수도, 전기 문제는 물론 도로 건설이며 지역 휴일을 정하는

문제까지 독자적으로 결정한다.

각 자치단위들은 3개월에 한번씩 마을 광장에서 '유권자 주민'들의 회의를 열어, 마을의

일을 주민이 직접 결정한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직접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운영하

고 있는 나라인 것이다. 이렇게 자기 고장, 자기 주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주인의식이 큰 만

큼 상대적으로 스위스라는 국가에 대한 애정은 찾아보기 어려워, 스위스 국민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항상 먼저 취리히 시민, 베른 사람, 제네바 주민임을 내세운다. 그래서 스위스인

들의 공통점은 빨간색 표지의 여권과 이웃 칸톤 주민과 결코 같아서는 안된다는 엄청난 경

쟁심뿐이라는 말까지 있다.

 

국어가 네 개인 나라

스위스는 인구 700만의 작은 나라지만 벨기에와 더불어 또렷한 '언어지도'라는 것을 가지

고 있다. 독일어권, 프랑스어권, 이탈리아어권, 레토로맨스어권이 지도상에 분명히 금 그어져

있고, 이 언어 경계선을 중심으로 거짓말처럼 말이 바뀐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 서

로 상대방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나라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그들에게 길

건너는 내가 전혀 상관할 바 없는 별세계인 것이다. 내가 그쪽으로 넘어가서 살 일 없고 그

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와 살겠다고만 하지 않으면 이런 묘한 언어 경계선은 그들의 삶에 아

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공존하는 데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온 세상이 세계화다

뭐다 하여 난리를 치고 어학공부를 해야 한다고 법석이지만 이들에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동으로만 비칠 뿐이다.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의 공존, 즉 스위스의 '한 지붕 여러 가족 문화'는 어떻게 보면 심각

한 갈등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 두 개의 언어권으로 분리되어 갈라서자고 으르렁대는 벨기

, 유혈 테러가 끊이지 않는 북아일랜드, 민족문제로 유혈 인종청소까지 벌어졌던 보스니아

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나 스위스는 700년 전부터 분명히 그어져 온 확실한 지역(칸톤) 경계와 서로가 서로

를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는 건국이념(?) 덕분에 이질적 문화집단이 혼재함으로써 야기된 벨

기에나 북아일랜드, 보스니아처럼 혼란이 빚어질 우려가 없다. 또한 우물거리는 사이에 산적

한 문제가 곪아터지는 대신, 직접민주주의를 통해 주민 스스로가 그때 그때의 현안들을 '

주적으로' 해결해 나감으로써 갈등의 소지를 극소화시킨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

라 중의 하나답게 ''이라는 강력한 접착제가 있는 한, 한 지붕 여러 가족 사이에 갈등이

증폭될 우려는 크지 않다. 다만 지금까지 누려왔던 영구중립이라는 기본 노선이 이른바 글

로벌리제이션이라는 세계의 지구촌화 추세로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자, 1990년대

이후 그들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음산한 공기처럼 나라전체의

분위기를 침울하게 짓누르고 있다. '불안'이야 원래 스위스인들의 기본정서라고는 하지만 공

산주의 몰락 이후 세계 정치, 경제의 새로운 판짜기에서 자신들만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이

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처지라 그 불안감은 날로 증폭되어 가고 있다.

스위스에서는 주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하는 이는 여론의 몰매를 맞는다. 아픈데를 건드리

는 것을 좋아할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마련이다. 더 이상

스위스의 고립을 보다못해 일부 지식인들이 용감하게 입을 열어 유럽 사회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지만, 이는 반사적으로 극우주의를 자극하여, 오히려 스위스 고립을 주장하는 자들이

'애국자'로 인정되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나라가 오늘날의 스위스다.

 

고만고만한 칸톤끼리 늘 벌이는 경쟁

스위스인들은 스위스와 관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세계 최고'라고 믿는다. 공산품이든

채소든, 심지어 사람까지도(물론 스위스인). 슈퍼마켓에 이탈리아산 딸기가 스위스산의 반값

에 나왔다 하더라도 스위스인들은 두 배의 돈을 치르고 딸기를 산다. 왜냐하면 스위스 딸기

의 질이 이탈리아 딸기보다 월등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같은 '메이드 인 스위스' 에도 품질

의 차이는 있다. 인간이 바로 그렇다. 도시인들은 지방인들을 속으로 깔보고, 지방인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며 불신한다.

도시와 농촌 간의 이 정도 불신은 어느 나라에나 있게 마련이므로 별나다고는 할 수 없으

, 스위스 도시 주민들의 상호 경쟁심은 한마디로 구제불능일 정도로 치열하다. 취리히 시

민은 국제 규모의 공항(인구 345,000!)으로 보나, 하이테크 시설로 보나, 세계적인 은행

들이 밀집한 것으로 보나 전 스위스에서 취리히가 유일한 세계적 도시라고 으스대지만,

른 시민들은 스위스의 수도는 취리히가 아니라 베른이라고 지치지 않고 강조한다.

취리히 시민과 베른 시민이 만나면 사이좋게 바젤을 평가절하하기에 바쁘다. 독일, 프랑스

와 맞닿아 있는 '위험한' 동네며, 별로 향기롭지 못한 냄새를 풍기는 공장들이 밀집해 있어

사람 살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젤에는 취리히, 베른 출신자들이

일자리를 갖고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바젤이 좋아서가 아니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니 어쩔

수 없이 바젤에서 산다고 주장하는 형편이다.

제네바는 세계적인 외교도시요, 문화도시임을 은근히 내세우지만, 다른 도시들은 한결같이

제네바가 비스위스적인 도시라고 매몰차게 쏘아붙인다. 매일같이 수천명의 인근 지역 프랑

스인들이 제네바로 출근하고 제네바 주민의 5분의 1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주로 외

국 외교관들). 이렇게 온통 외국인투성이에다 해외문화에 오염된 도시라는 이유에서이다.

고만고만한 칸톤, 고만고만한 도시들이 한결같이 서로 경쟁을 하며 살다보니, 늘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이웃보다, 남보다 더 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쟁심이 스위

스 발전의 주요 원동력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늘 강박관념으로 그들을 짓누르기도 g

. 그래서 스위스인들은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도 가자미눈을 하고 이웃 마을, 이웃 도시,

이웃 칸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예민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크게는 이웃 나라의 동향도 결

코 무관심할 수 없는 관찰대상이다. 늘 불안 속에 경쟁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이다.

 

세계를 곁눈질하는 고질적인 불안감

스위스는 유엔 회원국이 아니다. 나토 가맹국도 아니다. 더더구나 유럽연합 회원국도 아니

. 표면적인 이유는 스위스가 영구 중립국이기 때문에 패거리에 끼여 이 원칙을 깨뜨릴 수

없다는 것이지만 내면적인 이유는 그런 기구들에게 가입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

. 유럽경제공동체 가입 문제를 놓고 국민투표에 부친 결과 부결되었는데, 도대체 그런 '

털터리들이 모여 만든 기구'에 가입해서 얻을 게 무어냐는 정서가 지배적이었던 까닭이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는 과연 그게 잘한 결정인지, 그 고질적인 불안감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있다. 그런 불안 속에서 스위스는 부지런히 세계를 곁눈질하고 새 정치, 외교, 경제

판의 강자들을 불안한 눈으로 저울질한다.

스위스 국민들은 미국이란 나라를 아주 좋아하면서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

한다. 스위스와 너무나 정반대인 까닭이다. 미국은 거대한 땅덩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단일문

화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스위스가 작은 나라이면서도 복합문화를 지닌 것과는 너무 대조적

이다. 스위스인들에게 미국인은 그 광활한 대륙을 기분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

, 격식 따윈 아예 모르는 애리조나 카우보이로 비치는데 비해, 자신들은 옴치고 뛸 수 없

이 꽉 짜여진 조직사회에서 관료주의에 발목 잡힌 소시민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아중주

유감스러워한다. 그래서 스위스의 도시 규모나 도로 사정에 전혀 걸맞지 않게 커다란 미국

차를 사는 이가 적지 않은 것일까.

이해할 수 없기는 영국인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의 반을 무릎 꿇려 식민지로 만든 능력도

놀랍기 그지없지만, 홍콩 반환을 끝으로 전세계 식민지를 모조리 잃어버리고도 자학하는 모

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더더욱 경이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영국인들은 아직까지 스위스인

들에겐 티 타임을 지키는 '젠틀맨'이다. 비록 악명 높은 축구 훌리건(영국의 광적인 축구 팬

)이 전 유럽 구장을 때려부수고 박살내기는 하지만, 스위스인들은 독일인을 부러워한다.

독일어를 어쩌면 그렇게 잘할까... 아무리 모국어라 하더라도 스위스인들은 자신의 독일어가

'진짜' 독일어에 비하면 혀에 종기가 난 듯 이상하다는, 그래서 자신들이 입을 열면 독일인

들이 점잖은 체면에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시뻘게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스위스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식민지를 가져본 적도 없고 침략을 받은 적

도 없었던 만큼 외국인을 접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실상 라틴계, 게르

만계 등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사는 나라인지라 인종차별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2

대전 뒤 노동력 부족으로 슬금슬금 받아들이기 시작한 외국인들의 수가 아차 하는 순간 100

만이 넘으면서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게 되었다. 스위스에는 현대 약 150만 명의 외

국인이 살고 있으며, 그중 50만 명은 스위스 국적을 얻어 귀화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스위스인 대접을 받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스위스처럼 국적을 얻기 어려운 나라에서

고생고생해서 국적을 얻었다 해도 스위스 본토박이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는 영원한 외

국인이며 이방인이다. 스위스인 대접을 받으려면 다음 넷 중 한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

. 부모가 스위스인이든가, 배우자가 스위스인이든가, 예술가, 그것도 돈 많은 예술가든가,

아니면 적어도 10년 이상 스위스에서 살았든가...

 

돈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

스위스는 고만고만한 미니 국가들의 집합체인지라 지배층이 권력을 휘둘러보았자 호랑이

없는 숲에서 여우가 왕초인 격, 그 권력이나마 언제 외적의 침입으로 허물어질지 모르는 형

편이었던 만큼 차라리 모두가 똘똘 뭉쳐 고슴도치처럼 자기 방어벽을 만드는게 상책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권력계급은 알량한 세 과시보다는 스스로 몸을 낮춰 주민과 함께하는 편

이 안전함을 일찌감치 터득한 터였다. 그래서 스위스는 여타 다른 유럽국들과는 달리 계급

이 없는 사회다. 대신 돈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 항시 불안 속에서 살며 그 누구도 믿을

이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돈만이 자신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항상 믿어왔

. 이 점에 있어서는 큰돈 없이 남의 민족 틈에 빌붙어 살아오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움

켜쥐고 이를 자신을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으로 삼았던 유대인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스

위스인들은 돈에 대해서만큼은 신앙과 다름없는 경배심을 가지고 있으며, 가난을 일종의 죄

악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능하고 게으른 자가 아니고서야 가난할 수 없다는

것이 기본 관점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최고로 안정된 화폐라고 하는 스위스 프랑을 거래수단으로 쓰고 있는 나라답게

스위스는 물가 또한 최고이다. 달러에 대한 상대가치로 미친 사람 널 뛰듯 하는 엔화 때문

에 살인적 물가로 둔감한 일본의 경우와는 판이하게 스위스는 벌기도 많이 벌고 대신 엄청

나게 높은 프랑 물가도 감수하고 산다. 스위스의 생활비는 세계 최고로 높다. 한 예로 한 달

2,000스위스 프랑(200여만 원)을 버는 이는 극빈자층으로 정부의 빈민보조금을 받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나가기 어렵다.

국민 기본 정서가 '불안'인 나라인 만큼 스위스 국민들은 부지런히 저축하고 만약의 경우

에 대비해 열심히 갖가지 보험에 든다. 월 수입의 20%가 보험표로 지불되는 나라는 아마

스위스밖에 없을 것이다. 스웨덴같이 사회주의 냄새가 뒤섞인 사회복지국가가 아닌 완전한

자유개방 시장경제국가 가운데서 말이다. 여기에 국민 저축률이 일본에 이어 세계 제2위로,

인구 1,700명당 한 개의 금융기관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또한 세계 기록이다.

 

스크루지 영감 뺨치는 구두쇠 정신

저출률이 일본이 세계 제1위라고는 하지만, 사실 일본의 경우 노후보장 연금제도가 스위

스를 따라가려면 어림도 없기 때문에 저축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늙어서 추한 꼴 보이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저축해 대는 것이고, 해외여행 다니는 것 이외에는 마땅히 인생을 즐기

기 위해 돈 쓸 만한데도 없는 나라가 일본이고 보면 돈은 저절로 은행에 쌓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스위스는 형편이 다르다. 나이 들어 정년퇴직하면 죽을 때까지 먹고 살 연금 나오

겠다. 온갖 보험 다 들어 놓아 무슨 일이 터져도 목돈 들어갈 일이 없는데도 꾸역꾸역 은행

에 돈을 갖다 쌓아놓는다. 이웃 프랑스나 독일 국민들은 1년 저축한 것을 여름이면 휴가여

행 가서 홀랑 까먹고 오기가 일쑤여서 웬만한 가정치고 은행 구좌에 몇백만 원 예금을 갖기

가 어려운데도, 인생을 즐겨야지 저축은 뭐하러 하느냐는 인생관을 갖고 있다. 이렇게 저축

대신 쓰고 놀자주의 이웃들을 둔 스위스 국민이 그 유혹을 잘도 견디고 세계 제2위 국민저

축 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은행에 돈을 잔뜩 쌓아놓지 않고는 불안해 못 견디는

국민성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가치가 낮은 돈(달러든, 마르크든 스위스 프랑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화폐)을 가지고 스위

스를 찾는 이들은 그 살인적인 물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그러나 워낙 고임금 고

물가에 '단련된' 스위스인들은 외국인들이 왜 그리 놀라는지 오히려 놀라워한다. 그들에겐

별로 비싼 것도 아닌데.... 그도 그럴 것이,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은행연합이 조사한 <세계

의 임금과 물가비교>를 보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스위스 임금 수준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한 예를 보면 스위스의 시내버스 기사 평균 봉급

은 서구 선진국(G7 국가)생산직 작업반장 평균 봉급의 두 배다. 스위스 생산직 작업반장의

평균 봉급은 뉴욕 시내버스 기사 평균 봉급의 세배나 된다. 결론적으로 스위스 시내버스 기

사의 봉급은 뉴욕 시내버스 기사의 여섯 배, 런던 시내버스 기사의 네 배나 된다. 그런 봉급

을 받는 나라에서 뉴욕이나 런던의 물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며, 이는 스위스인들 스

스로도 잘 알고 있다.

누구는 아닐까마는 스위스인들은 돈을 특히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돈이라고 다 돈이 아

니다. 바로 스위스 프랑만이 진짜 돈이고, 이 프랑을 벌고 저축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

지 않는다. 외국인들이 스위스의 대표적 기념품이라고 사가는 뻐꾸기시계는 정작 스위스 가

정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 눈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키치(예술품으로 보이나 가치

없는 사이비 예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뻐꾸기시계는 아시아 저개발국가에

서 만들어진 상당히 '조잡한' 상품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스위스 프랑을 내고 사

가겠다는 멍청한 외국인들이 있는데 안 만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관광객들이 또 어김없이 사가는 것 중에 빨간 손잡이에 금박으로 십자가가 새겨진 이른바

'스위스 군용 칼' 이 있다. 그러나 이는 스위스 군대에서 사용하는 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지만 돈 주고 사가겠다는데 굳이 이를 해명해 주는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 필요가 어디 있

겠는가.

작게는 초콜릿에서는 크게는 롤렉스 금딱지시계에 이르기까지 상품을 팔아서 QSJ 프랑은

고스란히 은행으로 직행한다. 스위스인들에겐 절약이 미덕이다. 시간 절약, 에너지 절약,

히 돈 절약, 그중에서도 가장 큰 미덕은 프랑의 절약이다. 그들 사이엔 심심해 죽을 정도가

아니면, 그게 없어서 죽을 정도만 아니면 물건은 사지 않는 게 현명한 것이며 미덕이다.

들의 눈으로 볼 때 플라스틱 신용카드를 몇 장씩 갖고 다니며 꼭 필요한 물건도 아닌데 척

척 구입해 버리는 외국인들은 너무도 신기하고 멍청한 족속들이다. 신용카드란 결국 외상인

, 충동구매를 위해 빚을 진다는 것은 스위스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

이다. 바보천치나 하는 짓이며 낭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스위스인들의 이러한 절약정신은 스위스의 역사를 알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꼭 써야 할

데에도 안 쓰는 것은 아니니까 구두쇠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물건을 살 때면 하나를 사

더라도 제 값을 주고 고급 제품을 구입하지만, 사지 않아도 될 물건은 아무리 값이 싼 특별

할인가격으로 나왔더라도 아예 쇼 위도를 쳐다보지조차 않는다.

 

청교도 정신과 불안심리의 완벽한 조화

스위스는 유럽에서 가장 먼저 종교개혁이 일어난 나라다. 울리히 츠빙글리를 효시로 시작

된 종교개혁 운동은 장 칼뱅의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졌고, 한때 이 청교도 의식이 스위스를

지배했다. 그래서 가톨릭의 본산인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위스에, 48%에 이르는 가톨릭교도

에 버금가는 무려 44%의 개신교도가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장 칼뱅은 통치기간 동안 엄격하게 금욕을 강요했고, 근검 절약을 국민의 미덕으로 삼았

. 이러한 청교도 정신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심리가 맞물려 스위스 국민들의

근검, 절약, 저축 정신이 뿌리내리게 되었으며, 돈이 미덕인 사회가 되었다. 반면에 청교도

정신은 부가 비록 미덕이기는 하나 금욕의 일환으로 부의 과시를 금기시하였다. 그래서 스

위스인들의 돈에 대한 정서는, 돈은 소유하는 것이지 과시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한 예로, 적지 않은 스위스 회사들은 사원을 뽑을 때

고용계약서에 회사에서 받는 봉급 액수를 사내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항목을 명기하는가 하

, 사람 모집 광고에 급여 액수나 수준에 대해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가진 이가 어디 좀이 쑤셔 그냥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

론하고 인간의 공통적인 속물근성이다. 스위스인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부를 과시

하는 방식은 아주 은근하다. 예컨대 고급 브랜드 제품을 입되 상표는 떼도 입는 식이다.

길거리를 돌아 다니는 자동차를 보아도 제조회사 상표는 붙어 있되 차종 표시는 떼어버린

차가 많다. 예컨대 현대 차의 경우 현대라는 제조회사 마크는 붙어 있지만 소나타, 그랜저,

아반테 같은 차종 표시는 떼어버린다. 만약 그랜저 표시가 붙어 있다면 2.0, 2.5, 3.0 따위의

등급 표시는 떼고 다닌다. 이것이 그들이 부를 과시하지 않는 척하면서 과시하는 방식이다.

스위스인들의 가정 즐거워하는 게임(?)의 하나는 고급 자동차, 예컨대 메르세데스 벤츠나

BMW를 구입하고 그 등급 표시를 떼어버려, 이웃 사람들이 과연 저게 어느 등급일까 궁금

해 몸살나 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것이다. 저 벤츠가 190일까 200일까 아니면 320일까...

돈을 사랑하는 나라다운, 미국에선 결코 볼 수 없는 진풍경의 하나가 고액권의 유통이다.

미국 슈퍼마켓에서 100달러짜리를 내면 한참으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가짜가 아닌가 감식

기에 넣어보고, 돈 낸 사람을 위아래로 살펴본다. 1,000달러짜리가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

만 평생 구경해 본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그 강력한 프랑 화폐로 500프랑,

1,000프랑짜리(100만 원)를 꺼내는 장면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더욱 놀

라운 것은 가게 점원이 미국처럼 난리를 피우지 않고 그저 잠시 쓱 훑어보고는 위조지폐인

지 확인도 해보지 않은 채 990여 프랑의 잔돈을 꺼내주는 장면이다. 1프랑짜리든 1,000프랑

짜리든 돈은 돈이다. 스위스인들에겐 "돈은 결코 냄새 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상대방의 이름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스위스인과 사귀려면 반드시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더구나 스위스에서 지내려면 더

더욱 이름 외우기 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 자체가 워낙 작고 이웃집 숟가락 개수

까지 뻔히 꿰고 있는 처지니 만큼 인사말을 할 때도 반드시 상대방 이름을 불러 친근함을

표시하는 게 습관이 되어 있다. 아침에 만나 그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만 하는 것은 대

단히 큰 실례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드시 '안녕하세요, 로젠탈 씨!' 해야 한다. 전화를

받아도 그냥 '여보세요'라고 하면 큰 실례다. 반드시 '안녕하세요, 이원복입니다!' 하고 자기

이름을 대야 한다. 전화번호를 문의하거나 역에 기차 시간을 물어볼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

방이 내 이름을 기억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상대방의 이름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스위스 아파트에서 한 번이라도 인사를 나눈 이웃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으면 그와 우연히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머리를 짜내든 무슨 수를 쓰든 그의 이름을 기억해

내기 전에는 문을 나서서는 안된다.

 

하나의 나라, YES 하나의 방식, NO!

스위스의 역사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특수한 역사다. 스위스란 서류에 등장하는 국가일

뿐 실제로는 26개의 독립국가(칸톤이라 불리는 주)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지븡'

이라 일컬어지는 알프스 산맥 지대에 자리잡은 이 나라(?)의 원래 터줏대감은 북서지방에서

이주해 온 헬베티아족과 남쪽에서 이주해 온 레토족이었다.

원래 용맹하고 사나운 헬베티아족은 BC 58, 지금의 남부 프랑스 지방의 정벌을 계획했

.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지방을 정벌하러 가던 카이사르의 로마 군대를 만나, 대부분이

무자비하게 살육되고 나머지는 살고 있던 산속으로 황급히 되돌아가게 되었고, 로마는 이

지역을 점령, 관리하면서 로마 문명을 전파하고 경제의 꽃을 피웠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로마화되어 갔는데, 당시의 경계는 놀라웁게도 지금의 스위스 국경과 일치하고

있다.

험악한 산악이라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독자적인 삶을 누리던 여러

주들은 점차 세력을 확대해 오는 이웃 합스부르크 왕가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필요

가 절실해졌다.

12918월 초 어느 날, 브룬넨이란 곳에서 세 남자가 만나 동맹을 결성한다. 이것이 바로

스위스 동맹의 탄생이며, 스위스란 나라가 지금도 지키고 있는 국가 구성 원칙이 결정된 계

기이기도 하다. 합스부르크 세력 확장에 맞서 많은 주들이 속속 이 동맹에 가담하여 싸웠다.

당시 스위스 용병은 '인기 수출품'(?)이어서 프랑스, 헝가리, 로마 교황청에서 높은 임금을

받고 대리전쟁에 나서고 있었는데, 이러한 용감한 군인들이 고향을 위해 싸웠으니 합스부르

크 대군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에서 터졌다. 종교분쟁이 바

로 그것이다. 스위스 종교사에서 수없이 많은 종교개혁가를 배출하였는데, 취리히 출신 울리

히 츠빙글리, 제네바의 기욤 파렐, 장 칼뱅은 로마 가톨릭, 즉 로마교황에 대항해 투쟁의 깃

발을 높이 저명한 종교개혁가들이다.

, 구교로 갈라져 유혈충돌이 계속되었으나 1529, 카펠 강화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서

로 인정하게 되면서 내전을 끝났다. 그러나 1531, 전투가 다시 시작되고, 츠빙글리는 전사

했으며, 칼뱅은 제네바를 신교 지역으로 선포하는 등 종교분쟁이 사라지지 않자 1597년 대

협상으로 각 주의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어 평화공존의 시대가 열렸다. 이 과정에서

, 구교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칸톤()은 신, 구교 지역 두 개로 쪼개어 반주라는 희한한

형태가 탄생되기도 했다.

당시의 유럽은 스위스뿐 아니라 모든 지역에서 종교문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이 자행되던

대격동기였고, 이는 결국 신, 구교 세력이 국가별로 연합해 최초의 세계대전의 성격을 띤

'30년 종교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3O년 전쟁이 끝난 뒤 열린 베스트팔레 강화회담에서 스위

스는 최초로 독립을 국제적으로 공인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립을 표방한 스위스는 외세의

침략, 내부갈등 없는 평화로운 세원을 보낼 수 있었는데, 이 평화는 이탈리아를 치기 위해

'들른' 나폴레옹에 의해 크게 뒤흔들리고 말았다.

1798, 베른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모델을 따라 스위스에 '헬베티아 공화국'

선언하였다. 이는 각 칸톤의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베른의 중앙집권 체제를 의미한다.

폴레옹이 떠나자 스위스 전국에는 심각한 소요가 계속되었다. 혼란을 막기 위해 나폴레옹은

협상안을 내놓았다. 각 주의 자주, 독립 유지를 위해 스위스는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군대를

파견, 러시아 원정에 올라야 했고, 1985,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이런 '과거'는 당연히 승전

국들의 도마 위에 올라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스위스는 자각하게 되었다. 격렬한 찬반논쟁과 소요 끝에 스위스는

1848, 드디어 '통일헌법'을 제정한다. 26개의 '독립 미니국가 클럽'이었던 스위스가 비로소

나라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스위스의 탄생이다. 칸톤끼리의 교역에서는

세금이 면제되고 계량형, 통화, 우표를 단일화했으며, 각 주의 세금 등 모든 행정은 자주권

을 지니고 중앙정부와 무관하게 독립을 유지하되, 외교, 국방 그리고 사회간접자본 투자 설

비 일부분은 중앙접부가 맡기로 한 것이다.

특수한 역사를 지닌 영구중립국 스위스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에서도 머리털끝 하나 다

치지 않은 채 경제발전을 계속하여 세계 5대 부자나라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세계가 미, 소를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에 돌입하자 국제기구, 국제회의 등이

중립국이라는 조건으로 스위스에 몰려들어 냉전 특수(?)를 즐기게 되었고, 스위스 은행들은

세계의 '검은 돈 예치소'가 되어 세계적인 비난 속에서도 유례 없는 호경기를 누릴 수 있었

. 그러나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여 냉전체제가 허물어지자 중립국이라는 스위스의 입장

은 그 빛을 잃어가 서서히 그 의미에 회의가 일고 있으며, 최근 계속 폭로되는 스위스의 2

차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의 협력 사실. 그리고 스위스 은행에 예치된 막대한 액수의 유대인

돈의 유용 등으로 스위스는 점차 그 도덕성에 의심을 받고 있기도 하다.

독특한 역사답게 스위스는 독특한(?) 민주주의 방식을 지니고 있다. 1971년까지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1971년에야 여성도 투표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펜첼 주

의 여성들은 지금도 투표권이 없다.

 

오스트리아

점보제국에서 덤보 공화국으로

문화의 충돌지대 인종의 용광로

유럽 대륙 중앙에 자리잡은 내륙국가 오스트리아. 모차르트, 슈베르트, 그리고 <사운드 오

브 뮤직>(비록 미국인이 만든 영화지만)으로 잘 알려진 음악의 나라. 다뉴브 강과 빈, 알프

스 산맥... 이 정도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다.

세계 역사를 좀더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나라가 합스부르크 왕조의 종주국이며, 한때

프랑스와 함께 유럽대륙을 호령했던 대제국이었다는 것,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거

의 모든 영토를 잃고 조그만 알프스 공화국으로 '전락'했다는 사실 정도를 알고 있을 터이

. 하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먼 나라로 머물고 있다. 독일어를 쓰는 독일 민족의 국가이기

때문에 언뜻 생각하기엔 독일이란 나라의 연장이거나 게르만 문화와 유사할 것 같지만,

스트리아는 역사는 물론 문화나 국민성도 독일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우선 민족성만 하더라도 그렇다. 독일은 다양한 핏줄을 지닌 복합민족으로 이루어졌음에

도 독일 민족이라는 단일민족 중심인 데 비하여, 오스트리아는 유럽과 동방이 마주치는 문

화의 충돌지대이자 인종의 용광로라는 점에서 미국과 흡사하다. 다만 유럽 대륙 내 인종 사

이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민족 구성은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 가장 복잡하다. 순수한 역사

의 산물로 독일인, 체코인, 우크라이나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마자르인(헝가리인), 슬로

베니아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루마니아인 등 그야말로 과거 오스트리아 제

국의 영토였던 지방의 민족들이 뒤엉켜 그만큼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문화와 그에 따른 복잡

한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 것이다.

빌헬름 텔이 맞서 싸운 상대가 오스트리아 총독이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스위스도

과거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였으며, 독일 남부, 이탈리아 북부, 폴란드 분할로 인한 그 일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칸 반도에 이르기까지 명실공히 오스트리아는 거대제국을 이

루었다. 그러나 이 점보제국은 이후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멸망(1866), 프러시아와

벌인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의 패배(1866), 1차대전의 패망(1917)등 계속되는 세 위축과 영

토 축소를 거듭하던 끝에 드디어 오늘날엔 유럽 정치판도에서 그 영향력을 잃고 한걸음 물

러선 덤보공화국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제국의 대부분을 잃고 과거 영토의 10분의 1 정도로

줄어든 오스트리아를 천적 프랑스의 수상 클레망소(1차대전 당시의 수상)는 이렇게 동정했

.

"L'AUTRICHE, C'EST CE QUI RESTE." (오스트리아, 그것은 그 나머지다.)

여기서 얘기하는 ''란 과거 거대했던 대제국을 일컬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차대전 패망 전까지 오스트리아는 유례가 없는 이른바 'K&K 왕국'이었다.

즉 오스트리아 제국(KAISERREICH=EMPIRE)과 헝가리 왕국(KONIGREICH=KINGDOM)

의 중복왕국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형식상 서로 다른 나라였지만 사실상 오스트리아

황제와 내각의 일부 각료는 헝가리의 왕위와 내각을 겸임하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오스

트리아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이는 중, 동부 유럽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점령했던 부분

을 제외한 발칸 반도의 일부분을 지배하던 실력자가 오스트리아였고, 이 오스트리아 제국이

라는 세계 속에서 다양한 민족이 혼합되고 교류하는 동안, 오늘날 인구 780만의 작은 나라

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문화와 사고가 혼재하는 '별난' 세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실체가 아닌 역사가 남겨놓은 하나의 환상이다. 이 환상 속에서 진정한 오

스트리아는 없고 과거가 물려준 향수와 잔잔한 비애만이 의식의 저변을 흐른다. 그럼에도

위대했던 대제국 시대의 영화와 긍지는 힘은 없지만 꺼지지 않고 타는 촛불마냥 오스트리아

인들의 자존심의 에너지원이다.

 

대충대충 적당적당

헬무트 콜 독일 수상은 매년 여름휴가를 잘츠부르크 근처 볼프강 호에서 보낸다. 하도 자

주 오니까 동네에서 감사패까지 증정했을 정도다. 수상뿐 아니라 독일인들이 가장 즐겨 찾

는 휴양지가 바로 오스트리아다. 말이 통하고 자연이 아름답고 독일보다 물가가 싸니 매년

수백만 명의 독일인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 그러면서도 돌아갈 때마다 독일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청결, 정확, 조직, 질서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그들에게 오스트리아는 너

무나 '아니올시다' 이기 때문이다. 뭐든지 대충대충, 적당적당, 무엇 하나 이가 제대로 맞아

돌아가지 않는데도 무사태평인 오스트리아인들을 독일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아마 속으로 자문했을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인들, 게르만 민족 맞아?" 만약 이 질문을 들

었다면 오스트리아인들은 이렇게 대답했을 게다. "아냐, 우린 복합민족인걸."

이처럼 무슨 일이든 철저한 계획과 준비, 조직에 의하지 않고 늘 해오던 식으로 대충대충

해치우는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독일인들, 스위스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이는 프러시아

가 강성해지기 시작한 1800년대 이수, 오스트리아군이 프러시아군과 맞붙어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는 역사를 봐도 증명된다.

스위스의 경제력을 부러워해 많은 오스트리아 기업가들이 합작을 꾀하지만,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은 대부분 스위스측의 '합병'으로 결말이 나는 게 정해진 코스다. 스위스

인들은 오스트리아 기업을 잡아먹으면서도 마치 오스트리아측의 간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

여 인수해 주는 책임 있는 기업인인 척 폼(?)을 잡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렇게 모든 면에

서 안전 제일, 완벽주의에다가 조직적이며 기획에 능한 스위스인들을 오스트리아인들은 질

투 반, 경외심 반으로 지켜보지만, 사람이 어찌 그렇게 철저할 수 있는가는 오스트리아인들

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의문이다. 이런 의식은 우스갯소리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어느 날 스위스의 한 수영장에서 지붕이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이 기사를 읽은 오스트리아인 왈 "스위스에서도 사고가 날 때가 있구나!"

그럼에도 과거 동서장벽이 존재하던 시기의 '중립국'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이웃 헝가리로서

는 유일하게 서방으로 열린 창이었다. 비록 호텔 요금이나 외국인을 겨냥한 공공요금은 독

일 마르크로 매겨졌지만, 사업, 특히 컴퓨터나 자동차 사업에 있어서는 손을 잡기 위해 기웃

거릴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독일 마르크와 '알프스 달러'라 일컬어지는 오스트리아의

실링을 벌기 위한 헝가리 국경지대 상가들의 간판이 독일어로 되어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

.

반면에 오스트리아는 모든 면에서 '멀수록 좋은' 독일과 독일인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

. 우선 오스트리아 일간지의 반 이상이 독일인 수중에 들어가 있고, 오스트리아 작가가 작

품이라도 출판하려면 독일 출판사를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식인 사회에선 자기

네끼리 싸움이 붙어도 독일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교수 자리(특히

논란이 끊이지 않는 현대사 영역에서)를 놓고 오스트리아 학자끼리 경합이 붙어 끝내 결론

이 나지 않을 경우엔 독일인 교수를 초빙하는 예가 많다.

 

두 얼굴을 가진 오스트리아인

오스트리아인들은 역사의 과정에서 위대했던 제국의 몰락과정을 슬픈 얼굴로 지켜보아야

했다. 시대의 숙명과도 같은 이 과정, 민족용광로에서 서서히 민족별로 몸체에서 떨어져 나

가는 과정을 울부짖거나 소리 높여 원망, 저주하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 그 비애를 삭여야

만 했다. 그 와중에서 그들은 체통과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또 극

기하는 훈련을 쌓아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대단히 다양한 민족의 혼합체다. 이는 곧 다양한 사고 방식과 행동양식이

혼재해 있다는 의미이며, 이런 사회에서 솔직한 감정표현과 행동은 언제 어떤 불이익으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의 독특한 환경은 그곳에 사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를 보호색으로 감추는 기술을 자연적으로 습득하게 하였다. 이는 곧 생존을 위한 기술이기

도 하여, 오스트리아인들은 밀과 행동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절도 있고 품위 있으며 친절하기 그지 없는 태도를 보이지만 본심은 표정이나 행동과 정반

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은 불쾌감을 처리하는 데 프로이다. 낯선 이들 앞에서나 사회생활에서는 결코 화난

얼굴이나 험상궂은 표현을 쓰지 않는 신사로 보이지만 어느 순간에 갑자기 공격적이고 원색

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 더욱이 19세기 초 역사의 격변기에 철권정치의 장본인이었던 메테

르니히는 무자비한 언론탄압, 반대파 숙청 등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제국을 통제하였는데,

때 오스트리아인들은 함부로 입을 열거나 쉽사리 본심을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

과를 가져오는지 뼈저리게 체험했기에 이런 이중성이 더욱 심해졌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지극히 친절하고 겸손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오만하고 공격적으로 될 소

지를 얼마든지 안고 있다. 따라서 말하는 것과 그의 생각이 일치한다고 믿었다간 왕왕 곤혹

스러운 경우를 당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인은 이렇다'고 정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어떠

한 정의도 맞지 않을 만큼 그들은 경우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음을 외국인들은

항상 명심해야 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의 이중성은 진보와 보수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시대변화에 순

응하며 새로운 변화를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화

하는 것은 드물며, 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변화, 진보에 Yes라고

얘기하면서도 속으로는 No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중엽 요제프 2세 황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그 당시엔 온 나라가 물자절약

에 목청을 높이고 있던 때였는데, 황제가 역시 물자절약의 일환으로 이른바 '리사이클링 관'

을 고안해 낸 것이다. 한 번밖에 쓰지 않은 '멀쩡한 자원'을 땅에 묻어버리는 것은 극히 소

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고안해 낸 관은 한쪽 끝에 여닫이가 달려 있어서,

시신을 장지에서 관에 넣어 모신 다음, 파놓은 구덩이 위에서 여닫이 뚜껑을 열어 시신을

구덩이에 떨어뜨리고 난 다음에 그 관을 몇 번이고 재활용해서 쓸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는 끝내 아이디어로 끝나고 말았다. 재활용을 외치던 그의 신민들 사운

데 아무도 이를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깍듯하고도 품격 있는 형식과 예의, 그러면서도 독일인들과는 전혀 다르게 철저하지 못하

, 느슨하기 짝이 없으며, 믿고 맡겨둘 수 없는게 오스트리아 식이다. 편지 한 장, 봉투지

한 장,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 식탁에서의 예절 등 모든 면에서의 빈틈없는 격식과 절차는

과거 제국시대의 양반 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실제 내용은 대충대충 되는 대로

놓아두는 오스트리아인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삶의 방식 자체를 그다지 잘못되었다거나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어로 얘기하자면 'LET IT BE...." 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오스트리아인들이 자주 하는 말 가운데 슈메라는 것이 있다. 우스갯소리 같으면서도

뭔가 뼈가 있고 비꼬는 가시가 있으며, 듣기엔 좋지만 뒤 끝에 뭔가 찌르는 그 무엇이 있는,

그렇다고 영국인들의 블랙 유머와는 다른, 오스트리아인으로 태어나기 전엔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그네들의 이중성을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슈메다.

 

안전 제일, 조심이 최고

제국의 침몰을 목격해 온 민족, 그리고 자신은 원치 않았으나 어쨋든 히틀러에 의해 독일

에 합병되어 2차대전의 패전국이 된 오스트리아, 자칫하다간 소련의 위성국이 될 처지에서

재빠르게 중립을 선언하고 소련에 사정사정하여 이를 면한 나라. 그러나 그 중립이란 것이

언제 어떻게 하루아침에 허물어질지 모르는 모래 위에 성이 아니던가. 그들은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의 저항과 붉은 군대의 발굽이 단숨에 이를 짓뭉개버리는 광경을 목격했고, 중립

이라 해서 확실한 안전을 보장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거기에 수없이 복잡한 민족이 뒤엉켜 사는 '안심할 수 없는' 사회인데다가 전후 몇 차례의

심각한 금융파동과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겪어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인들에게 가

장 중요한 것은 위기에 대비한 저축이었고, 모든 일에는 무조건 조심조심 안전이 제일이었

. 그리고 이는 저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더

불어 유럽에서 가장 높은 국민 저축률을 자랑하는 나라이며, 안전 제일, 조심이 최고라는 의

식은 무기명 통장이 크게 사랑받고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는 있지만 그 계좌 주인이 누구인가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으

, 오로지 계좌 주인만 알고 있는 무기명 계좌는 곧 자신이 돈을 가진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기 위한 '조심'이기도 하다. 이렇게 국민이 스스로 돈을 갖다 맡기는 나라에서 은행이 높

은 이자를 줄 리 없다. 오스트리아 은행 금리는 그래서 세계 최하 수준이며, 거기에다 금융

소득의 25%를 국가가 떼어가 버리니, 은행에 돈 맡겼다고 이자소득 얻기란 거의 바라지 않

는 편이 나은 형편이다. 이 틈새에서 배를 불리는 것은 오스트리아의 각종 금융기관들 아닌

!

 

타이틀과 연줄은 출세의 보증수표

과거 대제국의 풍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믿고 사는(?) 국민들답게 형식을 엄격히

따지는 오스트리아. 이런 사회에서는 한 개인의 인격보다 그가 차지하는 사회적 신분이 그

를 얘기한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는 유별나게 타이틀이 중요한 사회다. 그리고 또 하나 타이

틀 못지 않게 속어로 이른바 ''이라고 부르는 연줄이 출세의 관건이다. 직장이든 학교든

관청이든 타이틀과 연줄이 든든하면 이는 곧 출세의 보증서나 다름없고, 저명한 유력인사의

소개장은 뛰어난 능력이나 성적증명서보다 항상 우위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유력인사와의

연줄, 그럴듯한 타이틀을 갖지 못하면 출세는 바라보기 힘든 사회인 셈이다.

'유감스럽게도' 모든 귀족 칭호는 1918년에 범에 의해 사라졌지만, 1910년에 도입된 19

공직 가운데 아직도 15개 공식 직함은 유지되고 있다. 버스 운전기사도 그냥 기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파르마이스터(fahrmeister)라는 타이틀로 불리고, 어떠한 타이틀이든 한번 딴

타이틀은 죽을 때까지 자기 무덤 속에까지 가지고 간다.

오스트리아 학위 중 가장 낮은 것이 마기스터(magister, 흔히 석사로 번역되나 오스트리

아 대학 졸업 학위이므로 실질적으로는 학사에 해당한다)인데 이 학위를 딴 사람은 문패나

명함, 편지봉투는 물론 모든 서류에 '마기스터 아무개'라는 타이틀을 붙이다. 국가시험을 통

과한 기술자는 반드시 이름 앞에 디플로인게니우어(diploingenieur)라는 타이틀이 붙으며,

사학위인 독토르(doctor)타이틀은 오스트리아 최고의 타이틀로, 만약 바그너 씨가 박사학위

세 개를 받았다면, 아무리 스스로를 부르기 힘들어도 반드시 DR. DR. DR. WAGNER이며

DR의 숫자는 그에 대한 존경의 척도가 된다.

물론 지식인 사이에서 하나님 다음가는 타이틀이 교수지만, 전임강사급이라 할 수 있는

엑스트라오르디나리우스(EXTRAORDINARIUS)란 칭호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영광스런

칭호로, EXTRAORDINARIUS WAGNER로 표기한다. 교수 칭호를 받게 되면 덩달아 그 부

인까지도 교수 칭호를 얻어 FRAU(MRS.) PROFESSOR가 된다. 남편 바그너 씨가 PROF.

DR. DR. WAGNER 이면 그 부인은 죽을 때까지 FRAU PROF. DR. DR. WAGNER란 칭

호를 사용할 명예와 권리를 갖는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마기스터 K씨는 그 부인이 FRAU

PROF. DR. DR. K라도 결코 자신의 이름 앞에 교수 칭호를 붙일 수 없다.

교수나 박사 학위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마치 만능 카드와 같아서 만원식당에 가도 좋은 자

리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TV토론을 독차지하는 등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타이틀 좋아하는 사회답게 이런 고매한(?)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또 대접해 준다. 사정

이 이러니 자연 학위나 타이틀에 대한 연정(?)은 편법을 낳게 마련이어서 이름없는 아프리

카 나라의 학위를 돈 주고 사는 경우가 자주 발각되기도 한다. 한번은 들어본 적도 없는 제

3극빈국가의 명예영사 호칭을 즐겨 쓰고 다니는 이가 있었는데, 이 경우는 오스트리아에 대

사관 건물과 직원을 둘 돈이 없는 나라에 지원하여 명예영사 자리를 사거나 위탁받은 경우

.

실속보다 껍데기, 실제 인간보다 그가 지닌 학위나 타이틀을 중요시하는 사회인지라 사회

적 신분은 주로 그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에 의해 결정(!)된다. 청교도의 영향으로 자동차의

등급을 가리고 다니는 이가 많은 스위스와는 반대로 자신의 신분을 자동차로 과시하려는 속

물근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가엾은 프롤레타

리아이며 벤츠나 BMW를 타는 사람은 뭔가 남과 다른 능력자로 보인다. 그래서 오스트리아

인들은 벤츠나 BMW 등 고급 자동차 가격을 훤히 꿰뚫고 있으며, 외국인 노동자들은 무리

를 해서라도 이런 고급 차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자신에 대한 차별대우를 사전에 방어하기

도 한다.

 

죽음에 대한 유별난 찬미

아흔아홉 칸 고대광실에서 단칸방으로 살림 줄여 옮겨 앉은 이가 잠자리에 누우면 무슨

생각을 할까. 평생을 계속해서 기우는 가세를 지켜보며 자란 아이들의 마음엔 어떤 정서가

흐르고 있을까. 그 영화롭던 시절, 집안 큰어른의 웅장하고 화려했던 장례식을 보았던 가족

들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장식하고 싶을까...

멜랑콜리(우수, 비애), 그리고 늘 실감하며 살았던 죽음, 그리고 그에 대한 화려한 장식과

의미 부여, 영원한 삶에 대한 기대...

오스트리아인들은 '죽음'에 대해 다른 민족과는 다른 독특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지 종말이 아니라는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오스트리아에 독특한 죽음의 문화

를 창조했다. 그들은 다른 나라에선 터부로 되어 있는 '죽음'과 사우의 세계를 아주 자연스

럽게 화제로 삼으며, 자기 장례식에 관한 얘기가 가장 즐겨 다루는 대화의 주제 중 하나다.

그들은 자기가 죽은 후에 아주 장엄하고 아름다운 장례식이 치러지기를 원하며, 이는 새로

운 탄생, 영원한 삶의 시작이기에 화려할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죽으면 '아름

다운 시신'(이를 빈 사람들은 SCHONE LEICH라 한다)을 친척과 친지에게 보여주고 장중한

비애 속에 영결받기를 원하며, 꽃과 음악 속에서 대지에 묻히기를 원한다.

빈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장례식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나누는 오스트

리아인들의 뇌리에는 아마도 늘 보아왔던 유명인사들, 특히 황제들의 장엄한 장례식 장면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등 오스트

리아에서(빈에서) 활동했던 대작곡가들은 거의 장엄미사곡을 남겼다. 이는 황제나 제후,

족들의 장례식을 화려하고 숭고하게 장식하기 위한 것으로, 오스트리아인들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죽음으로 인해 영원히 살 수 있다는(이집트인들은 아니지만 영생에 대한 바람은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철학은 '위대했던' 제국의 황제 시신을 '분할'해서 매장한 데서도

나타난다. 합스부르크 황제의 시신은 분해되어 심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에, 방부 처리된

내장은 스테판 대성당에,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땅에 매장되었다. 빈에 있는 장의박물관에

가보면 오스트리아인들이 죽음과 장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가를 다각도로 알아볼 수

있다. 또한 빈 시내에 있는 묘지를 보아도 다른 나라와의 차이를 금방 알 수 있다. 파리 시

내 몽마르트에도 대규모 묘지가 있지만 빈의 공동묘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베토벤,

차르트(빈 묘지), 슈베르트 등 위대한 예술가로부터 이름없는 시민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규

모의 묘지가 빈에 자리잡고 있는데, 걷기 힘든 노인들은 위해 묘지 안을 오가는 버스까지

있다. 이 묘지 안을 거니는 황혼녘의 빈 시민들, 그들은 다가오고 있는 죽음, 아니 영원한

새 삶의 시작을 멜랑콜리에 찬 눈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으로 응시하는 것일까.

대작곡가 구스타프말러는 말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살아 있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부터 맞

이해야 하는가..."

 

자살은 아름다운 선택

죽음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스스로 죽음의 신을 찾아 그 손에 입맞

추는 것도 오스트리아인들에겐 하나의 아름다운 선택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는 유별나게

자살하는 이들이 많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건 찬미에서건, 비록 절대 다수가 신봉하는 카

톨릭 교회는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지만 사회의 저명인사, 예술가, 학자들이 줄줄이 자

살로 생을 마감하고 '영원한 삶'을 택한다. 유명작가 페르디난트 라이문트는 미친개에 물리

자 광견병에 걸릴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철학자 오토 바이니거는 세인의 이

목을 끌기 위해 베토벤이 운명한 집에서 자살했다.

저명인사 중 자살을 한 이들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대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두

형제,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의 두 아들, 소설가 아르투르 슈니츨러의 딸들, 작곡가 구스타

프 말러의 형이 자살을 했고, 건축가 에두아르트눌은 황제가 그의 설계에서 못마땅한 점을

지적했다 하여 우울증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그외에도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알프

레트 쿠빈, 알반베르크, 후고 볼프 등 세계 문화사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스스로 세상을

하직하는 등, 유별나게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은 오스트리아적인 죽음의

철학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스트리아 대제국을 물려받을 황태자 루돌프가 그의 연인 마

리와 함께 마이얼링에서 동반자살한 사실은 두고두고 지금까지 '아름다운 죽음'의 표상으로,

우수에 찬 회상의 대상으로 몇 번에 걸쳐 끊임없이 영화화되고 있다.

이런 자살의 미학을 지닌 오스트리아인들에게 가장 '구질구질한' 죽음의 예는 바로 모차르

트다. 세기적 천재이자 위대한 작곡가였지만 말년에 가난과 병에 찌든 채 살다가 죽어 어딘

지도 모르는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지금까지 정확한 위치조차 모르는 모차르트의 죽음은 그

들이 납득할 수 없는 구차하고 비참한 '동물적 죽음'에 불과하다. 모차르트는 당연히 자살했

어야 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상징은 카페하우스

오스트리아는 세계적으로 위대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나라다. 특히 고전음악 분야에서는

오스트리아와 빈을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위치가 아직도 확고하다. 빈은

18,19세기 유럽 음악의 메카로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출

신의 유명한 음악가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요제프 하이든, 프란츠 슈베르트이고 빈

에서 활약했던 음악가들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리하르트 바그너, 요하네스 브람스이다.

스트리아는 또 끊임없이 공연되는 최고 수준의 오페라와 세계적인 음악제로도 유명하다.

한편 음악뿐 아니라 미술 쪽에서도 독특한 바로크 양식을 지니고 있으며, 현대 미술에서

도 많은 거장이 나타나 오스트리아 미술의 세계적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

, 에곤 실레, 오스카르 코코슈카,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서 등이 있다.

또한 한문, 철학, 문학계에서도 오스트리아는 위대한 인물을 수없이 배출하여 세계문화에

기여하였다. 특히 현대 심리학, 언어, 철학의 문을 연 대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카를 포퍼, 콘라트 로렌츠에서부터 오늘날 세계 최고 스타로 각광받는 아르놀

트 슈바르첸네서(미국식으로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모두 오스트리아 출신이다.

파리의 명물 중 하나는 카페다. 파리 특유의 거리로 향한 열린 카페는 파리지앵들의 사교

와 휴식의 장소이자 사색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몽파르나스의 카페, 몽마르트의 카페는

기라성 같은 대작가, 사상가, 예술가들이 모여 시대정신을 논하고 사상적 유행창조의 계기를

마련했던 장소였다.

빈에서 물론이고 전 오스트리아에는 어느 골목에나 카페하우스가 있다. 파리의 카페가 유

명하다면 빈의 상징, 오스트리아적 특징은 카페하우스다. 이를 영어로 커피하우스라고 번역

하면 그 뉘앙스가 전혀 달라지는 오스트리아적인 아늑함 그 자체이다. 이곳은 빈 시민들이

외출할 때면 꼭 한 번, 그리고 외출할 일이 없으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일부러 들르

는 사교와 휴식의 공간이다. 파리의 카페가 세계 그 어느 도시의 카페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듯, 빈의 카페하우스 역시 세계 그 어느 도시의 커피집과도 비교

할 수 없는 가장 빈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파리의 카페가 유리문을 경계로 거리에까지

테이블을 내놓은 데 비해 빈과 오스트리아의 카페하우스는 아늑하게 꾸민 실내에 레이스 달

린 커튼과 촛불이 빠진 수 없는 아늑하기 그지없는, 극히 상반된 분위기다.

이외에도 오스트리아인들이 즐겨 찾는 사교 및 휴식 장소로 호이리게가 있다. 카페하우스

가 도시나 큰 마을에 주로 자리한다면, 호이리게는 포도주 제조공장이 있는 작은 마을과 같

은 오붓한 장소에 있다. 말 자체는 호이어에서 온 것으로, 가장 최근에 담긴 포도주를 시음

하는 곳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오스트리아는 주로 백포도주를 생산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은

이 호이리게에서 몇 잔 포도주에 얼큰히 취하면 인생의 비애와 죽음을 얘기하며 '우수적 환

'에 젖곤 한다.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클래식 음악

바로크 시대(16세기) 이후 오스트리아는 음악 등 게르만 문화권의 예술의 중심지였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빈에 국한된 것이었다. 누군가가 "빈의 거리는 예술로 포장되어 있고, 다른

도시들의 거리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고 말했을 만큼 빈 밖은 그야말로 예술의 황무

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빈은 음악의 도시, 미술의 도시, 연극과 문학의 도시였다.

음악사에 빛나는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브루크너, 슈트라우스, 그리

고 말러, 쉰베르크, 클림트 같은 거장 화가, 슈니츨러 같은 극작가뿐 아니라 프로이트에 곰

브리치 같은 거인들이 오스트리아에서 활약하였으나, 이들의 활동무대는 빈으로 제한되어

있어 사실상 '오스트리아적'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이렇듯 심각한 수도와 지방의 격차를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람은 막스 라인하르트였

. 그가 1920년대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개최한 잘츠부르크 축제는 이제 세계

최고의 음악축제의 하나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여기에는 1989년 타계한 거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공헌도 지대했다. 이를 기폭제로 하여 오스트리아 전국이 음악, 미술, 연극 등 대

대적인 축제가 벌어지는 예술의 나라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기질은 여러 면에서 여전하다. 가령 세계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빈 필하모니는 여성 단원을 절대 받지 않는 전통을 고수하다가 1997년에야 이를

마지못해 풀었는데, 아직도 단원 대부분이 빈 토박이 출신이라고 한다. 빈 소년 합창단이란

이름은 세계적이지만 빈 소녀 합창단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오스트리아인들의 클래식 음악, 특히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선술집에서는 새로

막을 올린 오페라에 대한 찬반 양론의 토론이 열띠게 벌어지며, 빈 오페라하우스의 지정석

회원권은 마치 골프 회원권처럼 대를 물려 전해진다. 전설적인 일요 콘서트는 오스트리아인

들에겐 음악을 즐기는 것 이상의 하나의 의식과도 같은 것이다.

또한 연극에 대한 열정도 대단하다. 연극은 오스트리아인들에겐 먹고 마시는 것 다음으로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필수요소처럼 되어 있어서 연극이 끝나는 시간이 일상생활이 시작되

는 시간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이런 문화적 풍토에서 TV는 다른 나라처럼 위력을 발

휘하지 못한다. 비록 소프트 포르노를 방영하는 채널까지 등장했지만, TV란 아무래도 오스

트리아인들에겐 '너무 편하기만 한' 비문화인 것이다. 성장을 하고 가서 이웃과 예의를 갖춘

대화를 나누고 와인 마시기를 즐겨 하는 이들은 말이 오르는 순간의 희열이 없는 TV문화

를 용납하지 않는다.

반면에 끊임없이 클래식 음악을 방송하는 오스트리아 라디오는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

는다. 라디오 덕에 오스트리아인들은 클래식 음악으로 아침 잠을 깨고 잠 안 오는 밤이면

클래식 음악으로 수면제를 대신한다. 오스트리아는 클래식 음악으로 아침 잠을 깨고 잠 안

오는 밤이면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해가 뜨고 클래식 음악과 함께 해가 저문다.

 

K&K 시대의 영광을 그리며

오늘날 유럽이 기독교 문명권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낸 두 번

에 걸친 결정적인 승리의 결과였다. 732, 프랑스 푸아티에에서 칼 마르텔이 거둔 승리로

아랍인 이슬람 세력을 피레네 산맥 아래로 몰아냈고, 그리고 1529, 1683년 두 번에 걸쳐

오스만 투르크 대군을 빈 바로 앞에서 격멸시켜 이슬람 세력을 저지시킨 것이다. 오스트리

아는 바로 유럽의 동쪽 끝이자 동방으로 향한 문이며 유럽을 지킨 요새라는 의미인데 오스

트리아(동쪽나라)란 나라 이름도 이래서 나온 것이다.

로마인들은 도나우 강을 로마제국의 북쪽 경계로 삼아 이 지역을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

, 게르만족을 방어하기 위해 도나우 강을 따라 이른바 리메스라는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

는데, 이들이 오늘날 오스트리아 주요 도시의 기초가 된다. 로마제국이 무너지면서 게르만족

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이 지역을 지배하고, 카롤링 왕가의 카를대제(샤를마뉴)는 그 영토를

지금의 헝가리까지 넓혔다(9세기).

996, 이 지방에 최초로 '동쪽나라'라는 뜻의 '오스타리히' 왕국이 등장했는데, 이것이 곧

오스트리아의 모태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 중앙의 역사는 대단히 복잡하다. 이 지방의

주도적 민족이 도이치족이었기 때문에 두 나라 역사는 서로 뒤얽히고 중복되며 이합집산이

거듭된다. 그러나 어쨌든 도이치족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장악했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14

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지금의 오스트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유럽 동부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오스트리아 왕은 곧 독일 황제였으며, 독일 민족의 정신적 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상징적으로는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으며, 로마 교황의 보호

자였으므로 스스로 전 유럽의 지배자를 자처하였고, 이는 새로운 유럽의 강자로 떠오른 프

랑스 부르봉 왕가의 천적의 관계로, 수백 년에 걸친 경쟁의 근본 원인이 된다. 오스트리아가

유럽의 강자로 떠오르게 된 것은 1529년과 1683, 두 번에 걸친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을

물리치면서부터이다.

1529, 이슬람을 물리쳤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스페인과 네덜란드까지 지배하는 강자로

떠올랐고, 1683년에 승리한 오스트리아는 패전으로 약화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를 빼

앗아 방대한 대제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승리와 국위선양에 도취한 합스부르크 가

문은 스스로의 권위와 긍지를 과시하기 위한 독자적인 건축양식을 창조해 내었으니, 이것이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양식이다. 지금도 오스트리아 곳곳에 남아 있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들은 화려했던 대제국의 영광과 긍지를 말해 주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국력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그 절정에 이르러, 빈은 파리와 쌍벽을 이

루며 유럽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이를 저지하는 데

주도적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운명을 뒤흔들어 버렸다. 오스텔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섬멸한 나폴레옹은 빈을 점령하고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이자 유럽 지배 명분이었던 신성 로

마제국을 멸망시킨다. 치욕적인 역사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유럽을 새로 짜는 주도권은

다시 오스트리아의 손으로 돌아왔다. 빈 회담에서 '유럽의 인도자'를 자처한 메테르니히의

능란한 외교솜씨는 오스트리아 영토의 확장은 물론,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전 유럽에서 프랑

스 대혁명의 '잔재'인 자유주의, 평등주의, 민족주의의 흔적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나갔다.

러나 한번 불붙은 민족주의 운동은 날로 거세져 갔고, 독립의 소리도 높아져 갔다. 한편으로

는 북에서 성장한 프러시아가 날로 그 세력을 확장하면서 오스트리아와 충돌하게 되었고,

독일민족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와 현 독일의 남쪽에서 세력을 그

대로 누리려던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대패한 오스트

리아는 이로써 영구히 독일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

프러시아에 패한, 허약해진 오스트리아에 대해 헝가리 등의 민족주의자들의 독립투쟁은

더욱 거세졌는데, 헝가리를 사실상 독립시켜 주되, 왕과 내각을 오스트리아가 겸임한다는 기

묘한 협상안이 채택되어 1876K&K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방대했으며, 당연히 복잡한 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으로 사실상 헝가리가 독립되는 것을 목격한 민족주의자들은 더욱 거세게 독

립투쟁을 전개했고, 정부는 비밀경찰, 군대들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에 겹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식민주의자들의 세력은 오스트리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영토를

탐내 이들의 독립운동을 뒤에서 부추기고 있었는데, 1914629, 사라예보에서 세르비

아의 비밀결사대원에게 황태자 페르디난트가 암살되는 사건은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

선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노린 열강, 이 열강이 이미 차지한 식민

지를 노리는 독일. 이런 복잡한 이해가 뒤얽힌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대

프랑스, 영국 등이 힘겨루기 전쟁으로 1918, 독일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을 끝났고 합스부르

크 왕가는 몰락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말 그대로 산산조각, 공중

분해되고 말았다.

터키는 물론 오스트리아도 독일어권 지역만 남기고 모조리 민족국가로 독립시킴으로써 대

제국 오스트리아는 대제국에서 오늘의 조그만 영토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얼떨결에 이끌려 들어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함께 패전국이 되었고,

역시 독일과 마찬가지로 4개국에 분할 점령되었다. 그 와중에서 1945년의 자유선거가 있었

지만 독립된 제2공화국인 수립된 것은 10년 뒤인 1955515.

한국, 독일과 같은 국토 분단의 위기에 처한 오스트리아는 끈질기게 소련과의 협상을 거

, 드디어는 오스트리아를 독일과는 별도로 취급한다는 소련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

4개 점령국이 모두 철수하고 중립국 오스트리아가 탄생하게 되었다. 알프스의 조그만 중립

공화국으로 다시 태어난 오스트리아...

경제 여건상 항상 서방과 훨씬 밀접한 관계를 맺고 경제발전을 해왔지만, 오스트리아는

결코 서방세계건 공산세계건 어떠한 블록과도 동맹을 맺고 않고 철저한 중립을 유지하여 빈

은 뉴욕, 제네바에 이어 세 번째의 UN 도시가 되기도 했다.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짐으로써

중립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 1990년대,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중립을 지킬 이유도 필요도 없

.

199711, 오스트리아는 EU에 가입하여 새로운 출발을 했다. '위대한' 합스부르크의

후예들은 이제 드디어 알프스 산골짝을 벗어난 것이다.

 

 

 

============================== 03

이원복교수의 진짜 유럽 이야기 3

지은이:이원복

출판사:두산동아

봉사자: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박소연

 

네덜란드

네덜란드인들은 요즘 세상을 더들썩하게 하고 있는 세계화의 첫 주자들이다. 스페인, 포르

투갈, 그 뒤를 이어 프랑스, 영국인들이 식민지를 착취의 대상으로 여겨 소의 젖 짜오듯 단

물만 빨아먹는 재미에 푹 젖어 있을 때, 식민지를 차지할 엄두도 낼 수 없었던 네덜란드는

장사를 통해 돈을 버는 방법을 택했다.

뒷날 인도네시아란 거대한 식민지를 300년이나 지배했지만 네덜란드인들의 근본 속셈은

장사였다. 배에 가득 상품을 싣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다. 장사란 다른

사람을 노예나 하수인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대해야 한다. 따라서 네

덜란드 인들은 오늘날 얘기하는 세계무역이자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화를 시작한 사람들인

것이다. 다른 식민지 지배자가 위압적이고 일방적이며 폭력적인 사고에 젖어 있을 때, 그들

은 좀더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개방적인 사고를 했다. 다른 민족

들보다 훨씬 앞선, 말하자면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워낙 무역상들이 주도권을 잡고 또 수출상품을 제조하던 공장주들이

큰소리치던 나라인데다가, 봉건영주들과 싸움을 해서든 돈을 주고 샀든 이들 시민계급이 얻

어낸 자유를 기반으로 고귀한 자유시민국가를 형성한 만큼 국가권력이란 세금만 제대로 걷

히는 한도 내에서 국민들에게 최대의 자율과 자유를 허용했다. 그리고 권력을 과시하기보다

는 수출을 좀더 진흥시키고, 물류를 원활케 하며, 시민 사이의 분쟁을 효율적으로 조정하는

기능을 맡아 통치자라기보다는 매니저의 기능에 치중했다. 이러한 사실은 현 베아트릭스 여

왕이 스스로를 일컬어 "국가 최고의 매니저"라고 말한 테서도 예로부터 현재까지 그 정신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나라에서 국민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국민은 자신의 개성을 두려움 없

이 강조하고 표출할 수 있다. 또 이런 사회의 법은 앞장서서 국민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바뀌는 시민들의 의식과 가치관에 맞추어 바뀌어간다. 법과 권력에 앞서 시민 한

개인 개인이 중심이 되고 법과 권력은 전체 질서에 결정적인 해가 되지 않는 한 이를 보호

한다. 깨어난 시민정신을 바탕으로 한 개인이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한 터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윤리적,도덕적 잣대란 대부분 오랜 시간을 통하여 종교, 국가,

사회권력이 개인을 통제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구애받

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이런 자율성, 자주성이 아주 강한 국민들이 사는 나라가

네덜란드이고, 이것이 바로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본 코드다.

"가장 전형적인 네덜란드 스타일은 어떤 것입니까?" 이건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다. 네덜

란드인의 대답은, "전형적인 네덜란드인이 없는데 어떻게 네덜란드 스타일이 있을 수 있습

니까?" 1500만 가까이 되는 네덜란드인이 모두 제각각이란 뜻이다. 그런 만큼 네덜란드인에

대해 얘기한다는 자체가 오류요, 선입견에 지나지 않지만 그 제멋대로인 가운데에도 몇 가

지 공통점은 나타나게 마련이다. 네덜란드는 두 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벨기에와

독일. 그러나 벨기에는 1930년에 네덜란드에서 떨어져 나간 '나라아닌 나라'이다. 네덜란드

들은 벨기에를 네덜란드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굼뜨고 지저분하고 뚱뚱하기만 한 족속들이라

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0년이나 한솥밥을 같이 먹고 살아온 형제이고, 더구나 벨기에 북구

플랑드르 지방은 사투리가 섞였다 해도 자기네 나라 말인 네덜란드어를 쓰고 있는 만큼 프

랑스어족과의 싸움에 나몰라라 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결국 이웃나라라고는 독일과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영국이 고작이고, 프랑스는 매력있는

언어 빼놓고는 콧대 높은 스놉(어떤 분야에 통달한 체하는 속물 신사)들이 사는 밥맛없는

나라다. 그 밖의 다른 나라들, 즉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그저 여름에 놀러 가는 나라, 시끄

럽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나라일 뿐이며,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동물원에서 벗어나지 않았으

면 좋았을 커다랗고 못생긴 몰골을 지닌 족속들이다. 영국은 오랫동안 경쟁상태를 유지해

(영국인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곱지 않은 이웃이긴 해도 그들이 이루어놓은 일

들을 보면 실력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는 민족이긴 하다.

그러나 네덜란드 말이 마치 목젖에 종기가 난 듯하다고 낄낄대는 영국인들의 문화에 대한

무지만큼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언어학적으로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도 네덜란드

어가 영어에 영향을 미쳤지 그 반대는 절대 아닌데도, 네덜란드어가 영어와 독일어를 뒤섞

어 반으로 나눈 듯하다며 네덜란드어가 영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우기는 영국인들의 '파렴치

' 주장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웃나라와는 애증이 교차한다고 하지만, 네덜란드인이 독일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애

()의 감정이란 전혀 없다. 미련하고 몽매한, 그러면서도 단단한 마르크 화폐하나만 믿고

마치 자기집 안마당 휘젓듯 네덜란드에서 설치고 다니는 독일인들을 보면 역겹기 그지없다.

더구나 2차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선언한 자기네 땅을 '치사하게' 예고도 없이 탱크로 덮치

않았던가. 그러고도 뻔뻔하게 프랑스로 가는 길을 빌리기 위한 것이라고 너스레 떨던 꼴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짓이었다. 그래서 독일인들이 너무너무 잊고 싶어하는 나치의 만행,

독일인의 만행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안네프랑크의 일기"를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 만들고, 그 가족이 숨어 있던 집을 관광명소로 만들어 우회적인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독일인들이 다가와서, 너는 독일어를 알 것 아

니냐는 식으로 독일어로 말을 거는 것이다. 하지만 네덜란드를 조금이라도 아는 독일인들은

영어나 혹은 엉터리라도 네덜란드어로 말을 걸지 독일어로 말을 걸지 않는다.

사실상 1980년대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에선 어디 가나 독일어가 통했다. 독일어로 대답은

못해도 나치 점령 때의 역사와 외국어가 곧 핌이라는 현실적인 국민성이 강력한 이웃 나라

말인 독일어를 스스로 배우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독일어는 통하지도 않을뿐

더러 외국어로서도 가장 인기가 없다.

최근 독일 정부는 네덜란드 학생들 중 독일어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계속 줄어들자 고심

끝에 슈퍼 모델 클라우디아 시퍼까지 동원한 책자까지 만들어 학생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비참하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에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한 학생은 1980

28000명이던 것이, 1996년에는 18000명으로 3분의 1 이상 줄었고, 전체 대학에서

독일어 전공 학생은 불과 250명에 불과하다는 '엄청난' 통계! 1500만 인구를 통틀어 이모

이니 우리나라로 치면 전국의 대학에서 독어독문학 전공학생이 750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

기인 것이다. 전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경제력과 영향력을 지닌 독일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문화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경향은 독일어는 구식, 인기있는 외국어는 프랑스

, 스페인어 순으로 나타났다. 영어야 중학생 정도면 이미 유창한 회화를 하는 수준이니까.

그렇다고 독일인이 네덜란드인을 예쁘게만 보아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비교가 안되는 덩

치니까 '귀엽게' 봐주는 것일 뿐이다. 자신의 경쟁상대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조차 않으

, 이것은 대국의 오만인가, 여유인가. 반대로 네덜란드인의 독일인에 대한 태도에는 비아

냥과 깔보기가 깔려 있으니, 이는 작은 나라의 자존심인가, 앙탈인가. 그들이 독일인을 지

칭하는 대표적인 별명이 있다. 카스로프( 치즈로 된 머리). 구멍이 뻥뻥 뚫린 에멘탈 치즈처

럼 골이 비고 어리석다는 뜻일 게다. 독일인을 겨냥한 농담도 많다.

질문 : 독일인의 머리로 네덜란드인은 무엇을 할까? 정답 : 나막신을 만든다. 뭐든지 제멋

대로고 제가 제일 잘났다고 우기며 양보할 줄 모르는 네덜란드인을 빗댄 독일인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질문 : 네덜란드인들의 버스는 폭이 20미터이고 길이가 1미터이다. 왜 그럴까?

정답 : 모두들 앞자리에 앉으려고 하니까. 네덜란드인들이 싫어하건 말건 독일인들은 화장실

드나들 듯 차를 몰고 네덜란드로 달려가서 장난감 같은 집들을 둘러보며 생선튀김같은 걸

사먹고 즐긴다. 그런데 이렇게 떼거리로 몰려드는 독일인들은 제자리에 제대로 주차하는 법

이 없다. 아무데나 자리만 있으면 주차금지 표시를 무시하고 차를 세워놓고는 제 볼일을 본

. 작은 시골 마을 같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암스테르담같이 주차공간이 절대 보족한 대

도시에선 독일 차들의 이런 불법주차는 교통마비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해도 외국이기 때문에 볓 달씩 걸리는데다가 같은 EU 국가이지만

벌금도 외화유출이 분명하기에 독일 관청은 뭉그적뭉그적 시간을 끌어 범칙금을 실제 납부

한 주차 위반자는 찾아보기 어렵고, 내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한다. 그러니 아무데나 주차

해 놓고 볼일 다 보고 한참 뒤에 돌아와서는 범칙금 스티커가 붙어 있으면 싱긋 웃고는 북

북 찢어버리고 만다.

그런데 드디어 네덜란드 정부가 분노의 칼을 뽑아들었다. 스페인에나 있는 주차위반 차량

용 족쇄를 도입한 것이다. 위반한 차량에 쇳덩이 족쇄를 채우고는 범칙금을 완납한 뒤 (

론 주차료와 함께) 영수증을 가져와야만 족쇄를 풀어준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복수는 이제

부터가 시작이다. 주차 위반자가 범칙금을 내고 싶어도 돈 내는 곳을 수백 미터 멀리 떨어

진 곳에, 족쇄 열쇠를 가잔 관리인이 있는 곳은 다시 거기서 또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

해 놓았기 때문에 족쇄가 한번 채워지면 벌금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암스테르담 거리를 정

신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고의적으로 독일인 주차 위반자를 골탕먹이려는 저의다. 왜냐하면

네덜란드에 차를 몰고 오는 외국인은 십중팔구 독일인들이고 주차 위반하는 무리도 거의 모

두가 독일인이기 때문이다.

한편 네덜란드인들은 무거운 주차위반 벌금을 안 물 수 없기 때문에 절대 위반하지 않는

. 칼같이 주차장에 차를 대며, 자리가 없으면 몇십 분을 빙빙 도는 한이 있어도 꼭 허가된

장소에 댄다. 독일과 네덜란드 사이의 악의 없는 작은 전쟁이다.

네덜란드와 독일은 국경을 마주대고 있는 이웃이면서도 사고방식은 천양지차이다. 독일은

헌법에 명시된 기독교 국가이며 법체제나 정책이 보수적인 데 비해 (현재도 보수정권이기도

하지만)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그 유래가 없는 진보적인 정책으로 이웃 나라의 놀라움은 물

론 너무 앞서나가는 통에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동네 물 다 흐려 놓는다는 것이다.

암스테르담을 비롯, 네덜란드를 찾는 나그네가 잠시 쉬면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을

때 쉽게 눈에 띠는 것이 코피숍이다. 그러나 이곳에 함부로 들어가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

이곳은 대마초나 마리화나 등 연성 마약을 피우는 허가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는

전국을 통틀어 1500개나 되는 코피숍이 있고 무려 400개가 암스테르담에 밀집되어 있다.

곳에서 젊은이들이 24시간 환각제를 피워댔는데 최근엔 하도 국제적 비난이 들끓어 '크게

양보해서' 새벽 2시까지로 영업을 제한했다.

네덜란드는 동성결혼 허용, 안락사 허용, 태아 성별 사전식별 허용, 임신중절 허용 등 전

세계 나라들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찬반양론으로 나뉘어 사우는 문제들을 아무런 터부도

없이 사실상 개개인의 판단에다 맡겨버렸다. 사회 전체의 틀에 위험을 가하지 않는 문제이

며 개인 스스로 책임질 문제는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는 기본 철학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대 같은 선진국이라 하더라도 상당히 커다란 철학적 차이를 보이는데, 마약정책이 그 대

표적인 케이스다.

1997년 빌클린턴 대통령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150억 달러의 돈과 군대를 동원하

여 남미 마약 생산, 딜러 조직을 발본색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전쟁은 이미 전임 부시 대

통령 때 한번 벌였으나 벌무효과로 끝났는데, 클린턴은 다시 각오도 새롭게 세계 마약 생산

판매 조직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이 보도가 나오자 네덜란드 언론의 첫 반응은 '패배

예고된 전쟁. 2의 베트남'이었다. 미국식 방식으로는 결코 마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네덜란드의 생각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렇다. 현재 미국에서 코카인 1Kg의 암거래 가격은 5000달러이다.

런데 콜럼비아 등 중남미 산지의 생산가격은 200달러, 운송비, 위험부담비 다 함쳐서 미국에

도착하는 가격은 400달러이다. 그러니 4600달러가 고스란히 남는 장사다. 그런데 이 4600

러의 이익을 미국의 딜러가 몽땅 독차지하는 게 아니라는 데 이 마약 장사가 극성을 부리는

가장 큰 이유가 숨어 있다. , 이중 60%가 뇌물로 쓰인다는 것. 작게는 거리를 순찰하는

경찰관부터 세관원을 비롯, 크게는 국회의원에 정부 고위 관리까지 검은 커넥션의 망은 미

국 전국에 깔려있다. 원가 400달러를 제외한 나머지 60%3300달러를 뇌물로 뿌려 놓으면

어떠한 마약퇴치 정책이 나와도,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다고 해도 딜러들은 안전하게 마약

을 팔아 1Kg1300달러 상당의 이익을 고스란히 챙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사를 누

가 마다하겠는가! 아무리 마약 조직을 뿌리뽑아도 이런 엄청난 이익을 남기는 장사는 제2,

3, 4의 생산 조직, 판매 조직이 나타나기 때문에 공급자 차단의 방식으로는 절대 마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논리다.

네덜란드의 정책인 이와 반대로 시장의 파괴다. 400달러짜리 코카인이 5000달러에 밀매되

고 있는 현실이니 생명을 걸고 덤벼들고, 마약중독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저소득

층 중독자가 이 돈을 마련하려면 결국 범죄에 손을 댈 수밖에 없는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것

이다. 원가에 가까운 450달러나 원가 아래인 350달러에 거래된다면 누가 이렇게 남지도 않

는 위험하기만 한 장사를 하려고 하겠는가! 네덜란드는 이를 위해 정부가 마약시장에 개입

하여 마약을 국가 관리 아래 두고, 중독자는 의사 처방아래 중독에서 벗어날 때까지 실비

로 제공하여 서서히 중독 정도를 줄여나가도록 유도한다. 이 정책의 의도는 우선 마약중독

자도 고통을 최소한도로 적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며, 한번 중독자는 사회로부터 범죄자,

오자 취급을 받는 '인격적 불이익'을 막아 서서히 새로운 생활을 되찾을 수 있도록 국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웃 나라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있다. 청소년 사이에 날로 마약이 폭증하

고 있는데 그렇게 합법적으로 투약할 수 있게 개방하면 온통 마약 천지로 변하지 않겠느냐

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시행되고 있는 네덜란드의 개방적 마약정책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의 마약소비 증가율보다 낮다는 사실은 미래의 마약정책에 대해 상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엄격히 마약을 금하고 범죄시하는 이웃 독일 드으이 나라보다 네덜란드의 마약 중독자 비

율이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스위스가 공개 마약 주사소를 요소요소에 설치했

, 네덜란드의 정책을 진지하게 검토중이며, 독일도 머지않아 네덜란드 방식을 따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미국과 같이 방대한 나라, 사회질서가 비교적 어지럽고, 빈부의 차가 심한 나라에서

는 생각하기 어려운 정책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같이 부가 고르게 분배되어 있고 시민의식이

깨어 있는 나라에서는 터부를 오히려 과감히 깨버림으로써 현실적인 이득을 볼 가능성이 더

욱 커지고 있다는 것, 이런 '열린 사고'가 네덜란드인을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코드다.

유럽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간혹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때 소나

타라고 치자. 세대, 많으면 네 대의 소나타, 그것도 모두 같은 색으로 줄을 지어 달리는 모

습은 개성을 중시하는 유럽에선 자동차 선전이 아니고는 정말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이들

은 틀림없는 네덜란드인들이다. 한 마을, 한 지역에 사는 이웃들, 아니면 친구들 사이다.

이런 눈에 '튀는' 행렬을 만드는가? 그들은 어울려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세 가구,

가구가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로 휴가를 함께 떠난다. 장거리를 자동차로 달리다보면 앞서

거니 뒤서거니 하다 서로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그런데 같은 차종, 같은 색깔, 같은 모델의

차가 한꺼번에 서너 대씩 몰려가면 서로 잃어버릴 염려도 적고, 그 사이에 감히 끼여드는

자동차도 없다. 정말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아닌가.

이처럼 그들에겐 어울려 살기가 중요하다. 그들 사회의 어울려 살기는 외국인에게도 상당

히 너그러운 편이다. 과거에 식민지를 소유했던 만큼 많은 이민족들이 이 나라에 건너와 살

고 있다. 300년의 지배 기간 동안 적지 않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여기에 삶의 뿌리를 내렸고,

특히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투쟁 당시 독립에 반대해 네덜란드 편에서 싸웠던 인도네시아

인들이 인도네시아 독립과 더불어 가족과 함께 대거 망명해 왔다. 또 네덜란드령 기아나가

1975년 독립할 때 많은 수리남인들이 건너오는 등 세계 방방곡곡 예외없이 퍼져 나간 화교

들과 더불어 적지 않은 소수 이민족 사회를 이룬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서 네덜란드인들은

그다지 눈칫밥을 먹이거나 차별대우하지 않는다. 다만 그네들이 끼리끼리 모여 사는(소수민

족의 자기보호 본능이겠지만) 세계에 굳이 끼여들 필요도 없고, 끼여들지 않겠다는 사람들

억지로 끼워 줄 처지도 아니니 어차피 네덜란드 사회도 다른 유럽 나라나 마찬가지로 외국

인이 겉도는 신세임엔 틀림없다. 그네들이 네덜란드인들과 자리를 함께해도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이는 없지만, 독일인 용하고 영국인 비웃는 농담에 끼여들었다간 분위기 썰렁

해지기 일쑤다. 왜냐하면 그 농담은 백인들기리의 농담이지 유색인종까지 더불어 즐기자는

것은 아니니까.

네덜란드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이지만 한편으로는 물과의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

적으로 적어도 스무번 이상이나 전 국토가 물의 피해를 받은, 물과 대결하며 사는 나라인

것이다. 1412년의 이른바 엘리자베스 대홍수, 1953년의 젤란트(1850명 사망), 1995년의 대홍

(수십만의 이재민을 냈다)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제

방을 바다는 수시로 부자비하게 덮치곤 했다. 물을 이기고 땅을 만들어 국토를 넓혀나가는

네덜란드인들, 그들이 오늘날 이룩해 놓은 나라는 그들의 신앙심도 이웃사랑도 아닌,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 투쟁은 자연의 변화화 더불어 막대한 돈과 함께 계속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구

온난화로 인한여 수면이 상승하는 바람에 대대적인 제방 보수작업이 필수불가결한데,260Km

에 달하는 해안선 '방어'를 위하여 2010년가지 우리돈으로 6000억 원을 들여도 모자랄 지

이란다. 게다가 늘어가는 교통량, 자꾸만 넓게 살려고만 하는 국민들의 요망으로 땅은 점점

더 필요하게 되니, 그네들 방식으로 또 바닷물을 배고 얻은 땅을 말려 공장 부지, 주거지로

만드는데는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갈 판이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대역사는 길이 17Km, 너비 3Km의 인공섬을 '말려서 만드는' 계획으

, 이 땅이 생기면 4만 채의 주택을 지을 수 있다. 이 계획에는 적어도 72000억원이 필

요하고, 댐을 쌓는 데만도 모래가 18700만 세제곱미터가 드렁간다니, 이런 걸 계산해 내

는 데도 머리가 보통 아프지 않을 듯 싶다. 기상 전문가들은 향후 100년 간 수면이 0.5m

승할 것으로 보고 지금부터 대대적인 제방 증축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한 해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주먹구구로 대역사를 결정짓곤 하는 우리 현실로서는 100년 앞을 내다보는 그네들이

경탄스럽기 그지없다.

네덜란드는 끊임없이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하는 나라다. 인구당 가장 긴 고속도로를 가진

나라답게 국가경쟁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인프라스트럭처에 항구적으로 투자하는 네덜

란드는 역시 국제경쟁이 무엇인지 오랜 세계 경험을 통해 터득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싶

. 세계 최대의 항구 로테르담은 1년 항구 수입만 500억 굴덴(40조 원)에 이른다. 그런

데 이 항구의 수용능력이 이미 포화상태를 넘어 시급히 새 항구 건설이 필요한데, 소요 예

산이 5조원에서 7조원에 달한다. 암스테르담에 자리한 스키폴 공항은 유럽에서 비행기 이착

륙이 가장 잦은 비행장의 하나다(런던의 히스로, 파리의 샤를 드골,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이어). 이 공항도 과포화 상태라서 땅은 없고 물위에 말뚝을 박아 대규모 신공항 건설을 계

획 중인데 여기에 27조원을 쏟아 부을 예정이다. 이처럼 네덜란드는 사회간접자본에 국가

자산을 아끼지 않고 투자한다.

네덜란드는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 '약간의'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2020년 완성을 목표로 하고 있는 '튤립의 터널'도 그렇다. 네덜란드는

튤립의 나라다. 지평선 가득히 튤립이 들어선 리세에선 5월이면 튤립 자라는 소리가 실제

로 들릴 정도다. 네덜라드를 세계 제일의 튤립 수출국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네덜란드는 전세계 꽃시장(튤립 포함)60%를 차지하는 꽃 수출의

절대 왕국이다. 이 엄청난 양의 꽃들이 암스테르담에서 25Km떨어진 알스메어 꽃 경매장에

서 매일매일 뉴욕으로, 동경으로, 시드니로, 리우데자네이루로 비행기에 실려 팔려나가는데,

1년 거래액이 24얼 달러(36천억원 이상)에 달한다.

경매장에서 팔린 꽃들이 대형 컨테이너에 실려 매일 아침 스키폴 공항으로 향하는 장면은

일대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생화는 시간을 다투는 상품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시간을

높치면 시들어버려 상품의 가치를 잃는 법, 알스메어 경매장에서 공항까지는 불과 35Km

거리지만, 늘 교통체증으로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거리에 쏟아붓는 꼴이다. 네덜란드인들

은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경매장에서 비행장까지 대형 꽃 수송 터널을 뚫을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알스메어 경매장에서 스키폴 공항까지 지름 3.5m에서 5m 크기의

터널을 뚫어 꽃 운반만 전담하는 컴퓨터 조정 전동차를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이는 이미 '

꽃 폭격기'란 이름의 프로젝트로 개발되고 있는데, 순수 공사기간만 7, 조사 준비 기간등

까지 다 합쳐 2020년 완공 계획이다. 철저하다 못해 완벽을 꾀하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런 스위스인들 뺨치는 완벽성이 아니었더라면 네덜란드는 제방이 터져 사라졌어도 옛날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이 터널이 완성되면 세계 유일의 꽃 터널로 1년에 약 160만 톤의 꽃을 수송하는 것 외에

여러 가지 부수적 효과를 얻게 된다. 먼저 꽃 수송 행렬이 사라지니 교통체증이 크게 완화

되고, 매연과 소음이 줄어 대기오렴 방지는 물론 환경보호에도 큰 도움이 되며, 신속한 수송

으로 물류비용이 크게 절감될 뿐 아니라 전세계의 고객에게 더욱 신선한 꽃을 더욱 빠르게

배달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경쟁력이란 것 아니겠는가! 네덜란드라고 해서 다 네덜

란드는 아니다. 공식적 수도인 암스테르담, 정부소재지이자 여왕의 거소가 있는 헤이그,

계 최대의 항구 로테르담을 떠나면 지금까지 언급한 네덜란드와는 전혀 딴판의 네덜란드가

펼쳐진다. 유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전원 풍경의 시골들이다. 도시와 농촌은 사고

방식이나 생활방식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또 큰 도시들이 밀집해 있는 홀란드 주와 북쪽

프리스란트는 전혀 다른 나라로 착각할 정도로 생활의 격차가 심하다. 공통점이라면 네덜란

드 어느 곳이나 자전거가 생활화되어 있다는 것과 신선하고 풍요로운 채소와 과일이 넘쳐나

는데도 아마 유럽에서 가장 엥겔지수가 낮을 정도로 먹는 데 돈을 안쓴다는 인색함 정도

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독일인들처럼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따지고 문제삼는 번거로움

을 증오하는, '웬만한 일은 그냥 넘겨버리는' 생활방식이 그것이다.

네덜란드 술집에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개그성 경고문이 이를 잘 말해준다. "두번

째 항의하는 자에겐 발포함. 첫 번째 항의는 이미 접수했으니까." 벨기에

벨기에는 그 화려한 문화와 다양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들르는' 관광지가 아니다.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독일로 가는 도중, 또는 그 반대의 여정에서 잠시 '

쳐가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 고작이다. 유럽 대륙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일부러

한번쯤 찾아보는 나라라고는 해도 그들조차 숙박을 하지 않고 잠깐 둘러보고 떠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물론 나라가 작은 탓이다. 벨기에는 땅덩이가 고작 3만여 제곱킬로미터로 우리나라

경상남북도를 합친 정도에 지나지 않고, 해안선이라고 해봐야 고작 67Km밖에 되지 않는다.

동서로, 남북으로 아무리 길게 재려고 해봐도 한쪽 끝과 다른 한쪽 끝의 가장 긴 거리가

300Km밖에 안되는 작은 나라다. 그러니 누가 세시간이면 동에서 서로, 북에서 남으로 관통

할 수 있는 나라에 뭐 볼 것이 많다고 비싼 돈 내고 잠까지 자가면서 둘러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겠는가. 또 프랑스라는 문화대국과 독일이라는 게르만 대국 사이에 끼여 그 문

화가 만나는 접속 융화지역인 만큼 독자적인 문화조차 없으리라고 인색한 평가를 내리는 것

이 일반적이다 보니 그저 수도인 브뤼셀에 들러 두어시간 머물면서 오줌싸개 동상, 마르크

트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 찍고, 관광객 대상 식당에서 '늘 먹던' 감자튀김과 스테이크

한 조각을 서둘러 먹고는 다음 나라로 떠나는게 벨기에 관광의 정식 코스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마간산식으로 스쳐갔음에도 여행 일정에는 '한나라 추가요'가 붙는다.

런 만큼 벨기에는 단체 관광의 나라라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찾기에 안성맞춤인 나라다. 혼자

, 아니면 가족과 함께 찾아가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천천히 둘러보노라면 그때서

야 진자 얼굴이 드러나는 '독특한 나라'가 벨기에인 것이다.

벨기에는 스위스와 함께 언어지도라는 묘한 것을 가진 나라다. 프랑스 문화와 게르만 문

화라는 두 바다가 합치는 해역이라면 그 문화가 난, 온류라는 서로 다른 해류의 교합일 때,

미지근한 중간 수온을 지닌 해류일 법도 하건만, 난류와 한류가 선명한 경계선을 이루는 교

묘한 해역이다. 북부 지방이 게르만 문화라고 볼 수 있는 네덜란드 문화의 영향권이라지만,

네덜란드 문화 자체가 독일 문화와 상당한 차별성을 지니고 있고, 벨기에 북부는 또다시 네

덜란드 문화와 상당한 차별성을 갖는다. 그러니까 1830, 끝내 네덜란드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하지 않았던가.

반면에 남부 지방은 프랑스 문화권이라고 해도 또 프랑스 문화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반적으로 유럽의 특징은 서로 다른 수온의 해류가 만나는 수역이 서로 뒤섞여 중간 수온 해

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수온과 물색을 또렷이 지니고 있어서 미국과 다르게

숙명적으로 국경을 분명히 그을 수밖에 없고 또 사라질 수도 없다. 이런 민족적인 차이는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 형성에 절대적인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북부 지역은 플랑드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남부

지역은 발롱이라고 한다. 플랑드르와 발롱은 벨기에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문화의 이방지대

이자 물과 기름처럼 융화할 수 없는, 그래서 어쩌면 두 개의 나라로 갈라설지도 모르는 서

로 판이하게 다른 '나라'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다른 나라들은 보통 분쟁의 원인이 민족

, 인종적인 것인데 비해 벨기에는 발롱과 플랑드르라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주

민들 사이의 문화적 갈등과 분쟁이다.

두 지역이 분명히 갈라지는 시점은 멀리 고대 로마제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

마가 지배하던 현 독일의 라인 강변 퀼른에서 바베까지 북유럽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경계로

뒷날 북쪽에는 플랑드르계가, 남쪽에는 발롱족이 자리를 잡음으로써 현재의 언어 경계가 이

미 그어졌던 것이다. 지금 3521제곱킬로미터의 국토에서 플랑드르는 15500제곱킬로미

, 발롱은 13500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독일어 사용지역이 100

곱킬로미터 추가되고, 브뤼셀 지역이 200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발롱 지역은 프랑스어, 플랑드르지역은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데, 수도 브뤼셀 지역은 아

주 독특해서 지리적으로는 플랑드르에 속하면서도 두 언어를 모두 사용하는 언어 공용 지역

이다. 이는 브뤼셀이 플랑드르 지역에 속해있지만 전체 벨기에의 주도 세력이 프랑스어를

쓰는 발롱계였기 때문이다.

벨기에에서 쓰는 언어, 특히 발롱에서 쓰는 표준어는 분명히 프랑스어다. 그러나 외국인들

이 자주 착각하는 것은 프랑스어를 발롱인의 언어로 오해하는 것이다. 프랑스어는 프랑스의

국어이지 발롱어가 아니다. 발롱어는 '벨기에식 프랑스어'로 프랑스 사투리의 일종이며 라틴

어와 게르만어, 그리고 켈트어가 뒤섞인 벨기에족(벨기에의 고유 민족)의 고유 언어다. 다만

너무 복잡한 언어체계를 정리하기 위하여 프랑스어를 표준어로 채택하였을 뿐이다.

또 플랑드르 지방에서 쓰는 네덜란드어는 네덜란드에서 쓰는 표준 네덜란드어와 다르다.

16세기 스페인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어켰다가 현 네덜란드 지방은 끝내 전쟁을 계속해 독

립을 쟁취한데 비해, 현 벨기에, 그중에서도 플랑드르 지역은 스페인 군대의 무력에 굴복,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신교가 허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현 벨기에 국민

90%이상이 카톨릭 교도인 데서도 나타난다. 플랑드르의 독립투쟁을 진압한 스페인군의

사령관이자 총독이었던 알바 대공은 플랑드르판 분서갱유를 자행, 네덜란드어로 된 모든 서

적을 불살라 버리고, 문필가를 탄압하는 등 반도들과의 끈을 잘라버리려 했다. 그 이후 벨기

에 플랑드르의 언어체계, 문법체계는 네덜란드어와 상당히 다르게 독자적으로 변모했던 것

이다.

이러한 언어적 차이(프랑스와 발롱, 플랑드르와 네덜란드)는 이 나라를 이웃 프랑스, 네덜

란드와 분할 합병할 수 없게 하는 독립국 유지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끊임없이 내부의 언어

갈등이 확대 재생산되어 도저히 하나의 나라로 공존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농경사회의 특징은 대개 남부북빈으로 나타났다. 땅과 그 땡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곧

개인의 부요, 국가의 부로 연결되던 시대였던 만큼 따뜻한 태양과 온화한 기후, 그리고 기름

진 토양의 남부 지방이 훨씬 풍요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재정적 풍요를 배경으로 자연

남부의 세력은 강대해졌고, 문화 또한 대영주와 이들이 신료로 참여하는 수도권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그러나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점차 북부남빈으로 그 양상이 뒤바뀐다. 경제구조의 개편없

이 자연의 섭리가 제공하는 열매를 경제의 기초로 삼는 남부에 비해, 척박한 토양, 음산한

기후를 지닌 북부는 공업화와 혁신을 통해 끊임없이 경제구조를 개편하여 공업화를 통한 부

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바로 이런 산업화에 의한 경제구조 개편으로 야

기된 남북갈등의 결과였다. 벨기에도 이와 마찬가지다. 비록 대부분의 공업시설이 플랑드르

지역에 편중되었지만, 문화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발롱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프랑스가

대혁명 전 상공인 출신의 부르주아 계급이 문화적 주도 계급이었던 소수 귀족, 성직자 계급

의 발 아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벨기에도 나름대로의 사농공상(우리의 개념과는 다른)

즉 귀족과 평민계급의 차별화에 의한 문화적으로 우세했던 발롱계가 지배하는 세계였던 것

이다.

네덜란드어는 천박한 말로 취급되어 모든 대학과 궁정은 물론 상류사회에서는 금지된 언어

였다. 프랑스어는 발롱의 공용어이자, 벨기에의 공용어였다. 이처럼 발롱계가 벨기에의 주도

권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1830, 끝내 네덜란드로부터 이탈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야 말

았다.

그러나 산업화가 가속되면서 발롱계의 절대 우위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플랑

드르계가 계속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반면, 발롱계는 농업 중심의 경제로 정체되어 있었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경제적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어 드디어 북부 플랑드르의 경제

력이 남부를 완전히 압도하게 되었다. 자연 플랑드르계의 문화, 정치, 사회적인 욕구가 화산

처럼 폭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는 네덜란드 문화권에 대한 탄압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플랑드르계의 신분상승,

롱계와의 동등권 요구는 폭동 형식으로 분출되더니 1930년 겐트 대학이 금지를 무릅쓰고 첫

네덜란드어 강의를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언어전쟁의 막을 열고야 말았다. 플랑드르 지방

대학들이 뒤따라 네덜란드어 강의를 시작하였고, 결국 1932년에 이르러 플랑드르계는 발롱

계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동등권 선언을 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플랑

드르계는 발롱계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며, 어떠한 차별대우도 용납할 수 없다는 선언이었다.

언어전쟁은 이 나라의 가장 심각한 정치문제로 부상하여 갖은 협박, 탄압, 회유, 설득에도

플랑드르계의 동등권 주장은 시위, 파업, 심지어는 폭동으로 번져 자칫하면 내전으로까지 번

질 위기로 치달았다.

이 문화전쟁은 결국 플랑드르계의 승리라고 할 수 있는, 1971년의 전면적인 헌법개정으로

이어졌다. 이 새 헌법은, 첫째 플랑드르, 발롱 지역의 경계를 정밀하게 지정하여 역사에서

처음보는 프랑스어, 네덜란드어의 언어지도를 탄생시켜 이것이 곧 행정구역이 되었으며,

째 각 지역은 나름대로의 문화적 주도권을 지닐 수 있도록 허용하고, 셋째 플랑드르계의 가

장 큰 불만이었던 정치와 행정에서의 불이익을 철폐하기 위해 정치적 자립을 보장하는 지방

자치를 강화하고, 정부와 내각에 발롱계, 플랑드르계를 각각 임명키로 했다. 이로써 벨기에

는 하나의 장관 자리에 발롱계 장관, 플랑드르계 장관 두 사람이 임명되는 기묘한 형태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전쟁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았다. 두 문화권 사이에 파인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 어떠한 형태로둔 공존을 서로 거부하다 보니 벨기에란 나라는 자칫하면 두

개의 미니 국가로 공중분해될 위기로 치달았다. 이에 19808, 또다시 절충안에 의해 헌

법을 개정하여 두 언어의 공용지역인 브뤼셀 지역을 제외한 두 지역, 즉 발롱과 플랑드르의

주들은 각 주들의 독립성을 더욱 강화한, 이른바 연방왕국 형식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언어전쟁, 문화전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정부나 민족주의 세력은 어떻게든 나라가 공

중분해되는 것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발롱계, 플랑드르계는 언젠가는 갈라서고

야 말겠다는 결의가 대단하다. 특히 경제적으로 우위인 플랑드르계는 과거에 겪었던 수모와

발롱계의 권력독점, 그들의 오만함과 무능력을 더 이상 보아줄 수 없다는 확고한 결의를 갖

고 있어 앞으로 벨기에의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떠내려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스위스

가 미니 국가들의 집합체이면서도 강력한 스위스 프랑이라는 경제력을 끈으로 하여 분리주

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서로 뒤섞이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 남남과의 공존방식 때문이었

. 그러나 벨기에는 단 두 문화권의 공존이면서도, 그리고 스위스에 못지않은 강력한 경제

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리주의가 사라지기는커녕 날로 그 목청이 높아지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스위스와는 달리 서로 지리적으로는 뒤섞이지 않았으나 문화적으로 뒤얽혀 사는

동안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며 간섭해오는 사이에 파인 공동체 의식(아예 가질 수도 없

었지만)의 골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문화의 힘이란 이렇게 무서운 파괴력을 지닌다. 더욱이

언어의 힘은!

전 유럽을 하나의 나라처럼 묶겠다는 유럽 공동체 건설이 박차를 가하는 시대에 이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벨기에의 앞날을 점쳐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프랑스와도 다른 문

, 네덜란드와도 다른 문화를 지닌 벨기에인들. 그드르이 기본 정신은 그 누구에게도 지배

당하지 않는 자유정신인 것이다.

부루게는 벨기에 북부에 자리한 도시다. 이곳에는 성모 마리아 교회가 있는데 미켈란젤로

가 제작한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대리석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이 교회가

정작 더 유명한 이유는 이 교회 벽에 붙어 있는 공중 화장실 때문이다. 점잖은 처지에 이런

내용을 취급하기 곤란하겠기에 어떠한 여행안내 책자에도 언급되지 않은 이 화장실의 특징

은 무엇인가? 겉보기엔 그저 그런 평범한 공중화장실이지만, 이 남성용 화장실의 변기란 다

름 아닌 성모 마리아 교회의 벽이다. 이런 사실은 외지에서 온 사람이라면 알 수가 없다.

기에 사람들이 벽을 세우고 소변기를 달 돈이 없어서 신성한 교회의 '알벽'을 남자들이 '

물건'을 꺼내 소변을 갈겨대는 곳으로 사용하는 것일까. 이 교회의 담에 붙여 지은 화장실

이야말로 벨기에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상징한다. 국가권력이여, 교회권력이여, 이거나 먹어

!

브뤼셀의 상징, 나아가 벨기에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것 중 하나가 '오줌싸개 소년의 상'

이다. 벨기에를 찾는 외국 관광객이라면 그 앞에서 반드시 사진을 찍어야 하는 필수 코스처

럼 되어 있는 이 동상이 세워진 유래에 대해서는 설이 구구하다. 중세기 브뤼셀의 부유한

상인이 아들을 잃어버렸는데 사진이 없던 시대라 현상수배를 목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목에 아들의 모습을 조각해서 세워놨다는 설, 나폴레옹이 브뤼셀에 진입하였을 때

철없는 어린 소년이 멋모르고 그 무서운 프랑스 군대 행렬을 향해 오줌을 누었는데, 이것이

곧 압제자, 침략자를 향한 벨기에인들의 저항정신을 상징한다 하여 그 조각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는 설 등이 대체적으로 가이드들이 설명하는 유래다. 그러나 벨기에 사람들은 입 밖

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알고 있다. "이거나 먹어라!"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그들에겐

권력이란 야유와 조롱의 대상일 뿐이다.

벨기에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다. 이 점에서는 네덜란드인들과 공통의 역사를 지니

고 있기 때문인지 대단히 유사하다. 그들은 어떠한 권력, 권위도 우습게 알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고 주저없이 야유를 보낸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며 무엇에 종속되거나 강요받기를 거부한다. 헌법 자체가 또 이를 최대한 보장한다.

기에 헌법은 둘로 갈라진 벨기에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존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플랑드르인이나 발롱인이나 자신들의 헌법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만큼 벨기에 헌법

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국가라는 형태가 유지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최대한 보장한다.

그래서 새로 생겨나는 제3세계 독립국들은 벨기에 헌법을 즐겨 그 모델로 삼기도 한다.

기에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조국은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

는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은 언어의 자유, 그리고 그들의 습관과 문화를 사랑한다. 그런 만큼 국가권력에 비판

적이고 지도자 위치에 있는 정치인을 불신한다. 사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언어 자

체가 프랑스어이기도 한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벨기에 정치도 프랑스 못지않게 꽤 지저분

하고 부정, 부패에 연루되어 있어서 심심치 않게 정치인 스캔들이 터져 나온다. 정경유착도

상당한 수준이다. 개인과 개성이 존중되는 벨기에 사회에서 국민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

고 테이블 밑으로 검은 돈이 오가는 정치판에 대해 국민들이 과연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그래서 벨기에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자유헌법 외에 또 하나 벨기에인들을 다시 하나로 뭉

쳐주는 것은 바로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투쟁이다.

 

자유를 위한 투쟁 속의 세계화

네덜란드에서 가장 높은 산은 고작 400미터 높이다. 그러니 전국이 평지나 다름없다는 뜻

이고, 라인강과 북해가 만나는 지역이니 물이 풍부하고 항구의 조건이 좋아 상공업이 발달

하기에 이상적인 지리적 조건을 갖췄다. 더욱이 대륙과 브리타니아(영국) 섬을 연결하는 위

치이다 보니 국제무역에도 걸맞는 조건을 갖췄다. 자연 네덜란드 지방은 북유럽에서 가장

먼저 공업이 발달하고 상업, 무역이 발달하여 알프스 이북 경제의 노른자위가 되었으며,

강한 경제력과 앞서 깨어난 시민정신은 조그만 나라 네덜란드가 강대국 틈바귀 속에서도 당

당히 자유와 독립을 유지해 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5세기까지 지속된 로마의 지배시대는 서유럽의 공통된 역사이며, 로마 멸망 이후 게르만

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의 역사 또한 독일, 프랑스가 모두 공통으로 갖는 역사이기도 하다.

네덜란드가 역사에 정식으로 등장하는 것은 1100년 홀란드공국에 세워지면서부터이다.

지방에는 공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부유한 도시들이 밀집하여 있었고, 이들은 봉

건영주로부터 자치권과 자유를 사들인 자유도시들이었는데, 이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도시들끼리 한자동맹을 맺어 군대까지 보유한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그 의미가 부상했

.

13에서 14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지방은 알프스 이북 지방의 상권과 경제권을 장악하고 크

게 번창했다. 그러나 왕가들기리의 결혼에서 네덜란드는 그 대부분이 부르고뉴 왕가의 소유

로 넘어갔고 부르고뉴 왕녀가 합스부르크 왕가에 시집을 가면서 네덜란드는 1516년 합스부

르크 왕가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5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사벨 여왕의 뒤를 이어 스페인 왕으로 즉위함에 따라 머나먼 나라인

스페인의 소유가 되어버린데서 시작된다. 엉뚱하게도 머나먼 스페인에서 부임해 온 총독의

지배를 받게 된 네덜란드인들의 불만이 치솟고 있을 때, 때마침 네덜란드 말로 번역되어 나

온 마르틴 루터의 성경은 카톨릭을 버리고 신교로 개종하는 물결을 이루었고, 이에 대한 스

페인의 탄압도 점차 심해지기 시작했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1566년과 1567년사이, 이른바 우상 파괴운동이 벌어져 신교들이

카톨릭 교회를 대대적으로 습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스페인 정부는 공포의 대명사로 불리

던 알바 대공을 파견, 신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살육, 탄압하였고 이에 맞서 네덜란드는 오렌

지 공 빌헬름을 지도자로 하여 독립을 선언, 80년에 걸친 독립전쟁의 막이 올랐다. 이 독립

전쟁 과정에서 네덜란드의 남부 지방은 스페인 군대에 굴복하여 카톨릭교도로 그대로 남았

으며, 홀란드 주를 비롯한 북부지방은 끝까지 전쟁을 계속, 15887개 주가 동맹하여 신교

국가 통일 네덜란드 왕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는데, 이 남부 지방이 오늘날의 벨기에, 북부 지

방이 네덜란드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는 당시 유럽 최강국이었던 스페인을 상대로 영국, 프랑스가 연합하여 싸우고 있던

상황으로, 영국, 네덜란드 연합함대는 칼레 해역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궤멸하여 네덜란

드는 사양길에 접어든 스페인의 영향에서 사실상 벗어날 수 있었다. 1596, 영국과 프랑스

가 통일 네덜란드 왕국을 인정함으로써 네덜란드는 사실상 독립한 셈이었으나 명목상으로는

아직도 분명히 스페인의 속국이었다.

,구교 국가들 간의 전쟁인 30년 전쟁이 터지자 네덜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연합군을 결

성하여 스페인과 싸웠고 1648, 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네덜란드는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80년 독립전쟁 끝에 쟁취한 자유와 자주였다. 전쟁을 하는 한편, 네덜란드는 세계로 눈을 돌

렸다. 1602년에 이미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는 등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네덜란드는 해상권

을 영국에게 배앗기고 난 뒤 식민지 공략보다는 교역에 중점을 두었는데, 전세계로 눈을 돌

린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 착취에 열 올일 때 네덜란드는 무역 중심의

해외 진출을 했다는 점에서 최초로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중국과도 활

발한 교역을 했고,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만들어 300년간 지배하기도 했다.

17,18세기는 네덜란드의 전성기였다. 해외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부는 나라를 부강

케 했고, 렘브란트, 할스, 베르메르 등 기라성 같은 화가를 배출하는 등 예술을 꽃도 활짝

피웠다. 원래 자유시민들이 중심이 된 자유도시가 주축이 되어 건설한 나라답게 네덜란드는

자유로운 나라였다. 이웃 프랑스, 독일에 강력한 왕권정치가 펼쳐질 때도 네덜란드에는 자유

로운 시민문화가 꽃을 피웠고, 이러한 자유시민정신은 오늘에까지 네덜란드 국민에게 이어

져 내려오고 있다.

네덜란드의 자유와 독립은 나폴레옹이 침공하여 프랑스와 합병됨으로써 박탈당하고 말았

으며, 네덜란드는 또다시 천하를 호령하는 나폴레옹에 맞서 치열한 독립투쟁을 시작하였다.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네덜란드는 다시 자유를 되찾게 된다. 이와 동시에 빌헬름 1

가 전체 네덜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하는데, 북부와는 종교, 문화가 크게 다른 남부 지방이 불

만을 품고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자, 네덜란드 내부에서는 남부 독립을 둘러싼 격렬한 소요

가 계속되었다. 1830825, 브뤼셀의 국립극장에선 '포르티치의 침묵'이란 오페라가

연되고 있었는데, 절정에 이른 4막에서 주연 가수는 피를 토하듯 열정적인 아리라를 부르고

있었다. 이 오페라가 끝날 무렵,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혁명이 시작된 것

이다.

남부 지방은 이해 104일 독립을 선언했고, 이는 곧 남북 간의 충돌로 이어졌으며, 결국

북부는 남부의 독립을 인정, 1831년 레오폴드가 국왕으로 즉위하니, 이것이 곧 벨기에 왕국

의 성립이다. 거쳐온 방법은 달랐지만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대부분의 역사를 공유한다. 그래

서 비록 서로 다른 나라로 갈라서긴 했지만 한 형제, 한 가족이란 정서가 뿌리깊게 자리하

고 있고 그러기에 벨기에,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세 나라는 베네룩스 동맹을 맺어 사실상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1849년부터 네덜란드는 대대적인 물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바닷물을 빼내고 얻은 땅을 말

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드는 자연에의 도전이었다. 그 결과 세계에서 가장 큰 인공섬

을 만들어냈고 인간의 힘으로 국토를 넓히기 시작한 민족이 된 것이다. 한편, 1873년부터 대

규모 운하작업을 시작하여 전국 어느 곳이나 배로 물자를 운송할 수 있는 완벽한 수로 시스

템을 완성했다. 그리고 벨기에는 국토의 100배가 넘는 콩고를 식민지로 경영하는 등 착실한

산업화에 성공하여 경제저 기초를 쌓았고, 드러나지 않는 유럽 경제의 중심이 되어 있다.

든 유럽을 하나로 묶어 가고 있는 유럽 연합본부, 북대서양조약기구의 본부가 왜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 자리잡고 있는가? 유럽 통합의 기틀을 마련한 그 중요한 조약이 왜 네덜란드

의 마스트리히트에서 맺어졌는가?

 

스페인

슬픔과 열정을 못이겨 수다스러운 이기주의자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피레네 산맥 남쪽은 아프리카"라고 말했다. 이에는 스페인, 포르

투갈 등 이베리아 반도를 아프리카나 다름없는 야만적인 지방이라고 업신여기는 의미도 있

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조건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유럽과 크게 다르다는 의미도 포

함되어 있다. 그의 말대로 이케리아의 풍광은 피레네 이북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바위투성이

산과 잡목으로 뒤업힌 황량한 불모지투성이에 달이라도 휘영청 밝은 밤이면 로드리고의 기

타 협주곡 2악장이 너무나 잘 어울릴 듯하고, 어쩐지 슬픔이 배어 있는 풍경 같다고 하면

나그네의 감상일까? 그러나 스페인은 서유럽의 가장 서쪽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유럽적이지

않고 지극히 동양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스페인의 역사를 들춰보면 대번에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711,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아랍인들은 1492년 그라나다 왕국

이 항복할 때까지 무려 700년이나 스페인에 머물렀다. 비록 아랍인들의 점령기동안 기독교

를 믿는 이베리아인들과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 서로 격리되어 핏줄로나 문화적으로나

물과 기름처럼 융화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동양에서 온 아랍인과 아랍의 문화는 스페인 곳

곳에 스며들어, 피레네 산맥을 경계로 한 북쪽의 유럽과는 판이한 문화가 창조되었던 것이

.

우선 언어에 끼친 영향이 상당히 지대한데, 관사 엘(el)은 아랍어의 관사 알(al)에서 비롯

된 것을 비롯, 수많은 스페인어의 어휘나 지명 등이 아랍 언어에서 유래한다. 예컨대 알-

칸테, -헤시라스, -메리아 등의 스페인 도시 이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피레네 이북에서는 보기 어려운 스페인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인 이른바 무데하르 양식은 아

랍 양식과 스페인 양식이 결합된, 동양적 풍취가 물씬 풍기는 양식으로 같은 유럽인들의 눈

에도 대단히 이국적인 것으로 비치고 있다.

여기에 스페인의 태양은 어떤가. 오로지 이 태양 하나만 보고 외국에서 몰려드는 관광,

양객이 매년 6000만명에 이른다. 그 덕분에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스페인이 그렇

게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바다와 뜨거운 태양은 또한 파블로

피카소, 후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같은 20세기 거장 화가들의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

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어쨌든 스페인은 같은 유럽에서도 '머나먼 남쪽 나라'이며, 차가운 비바람이 몰아치는 곳

에서 살고 있는 북쪽 유럽인들에게는 동경과 환상을 나라로, 많은 예술작품의 무대로 등장

하기도 한다. 이탈리아인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랴의 이발사", 오스프리아인 모차르트의 오

페라 "피가로의 결혼", 프랑스인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등 수없는 음악, 문학 작품의 부대

가 스페인 중에서도 아랍의 지배를 가장 오래 받았던 안달루시아 지방, 그리고 가장 아랍적

체취가 물씬한 세비야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페인이 오늘날과 같은 통일국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지금부터 500여 년 전인 1492

의 일이다. 1492년이란 해는 스페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1469, 카스티야 왕

국의 이사벨라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의 결혼으로 에스파냐 왕국의 기틀이 마

련된 이래, 이들의 연합 기독교 군대는 본격적인 아랍 세력 축출에 나서 1492, 드디어 마

지막으로 남은 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킴으로써 이슬람교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스페인

왕국의 통일을 이룩한다. 이로써 1492년은 스페인의 정치적 통일, 기독교 국가로서의 종교적

통일을 이룩한 역사적인 해가 되었으며, 같은 해 이탈리아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

카 신대륙 발견으로 스페인이 황금의 16세기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된 해이기도 했다. 그래

서 이 역사적인 대 사건이 일어난 500주년을 기념하고 스페인의 새로운 비약을 도모하는 뜻

에서 1992년 바르셀로나는 올림픽을, 세비야는 엑스포를 경쟁적으로 개최하기도 했다.

이처럼 500여 년 전에야 하나의 스페인이 형성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 이전까지만 하

더라도 각 지방마다 독자적인 문화와 전통을 지니고 살아왔으며 그만큼 각 지역 사이의 유

대감도 취약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지방색은 아직가지도 강하게 남아 있어서 스페인 사람

들은 국가에 대해 애틋한 사랑을 갖고 있는 편은 아니다. 17개에 이르는 주마다 어김없이

주기가 국기보다 조금씩 높게 걸려있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에

대한 드거운 애정과 긍지에 비태 국가에 대한 감정은 시큰둥한 편이다. 따라서 스페인인들

의 민족주의란 카탈로니아인, 발렌시아인, 안달루시아인, 카스티야인이라는 지역민족주의이

지 스페인이라는 국가 단위의 민족주의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기질은 그들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축구경기 응원때 여지없이 드러난다. 국제대회에

서 스페인 국가팀이 외국팀과 맞붙었을 경우, 예선에서 탈락하면 결승전에서 졌을 때보다

더 흥분한다. 예선탈락이란 스페인인이 지닌 최소한의 국가적 자존심이 크레 손상된 것이기

에 불같이 격노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승전 때는 지고 이기고보다는 자기 지역 출전한 선수

가 어떻게 싸우느냐가 더 큰 관심사이고, 진다 하더라도 어깨를 한 번 들석일 뿐 내 일이

아니라는 식이다.

반면에 국내에서 라이벌인 주와 경기라도 벌어지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온 도시의 상

가가 철시를 하다시피 하고, 길거리에 나 다니는 사람은 구경하기도 어려우며, 텔레비전 중

계를 어울려 지켜보기위해 술집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어 지든 이기든 밤새 함성과 맥주가 흘

러넘친다. 그들은 스페인인이기 이전에 카탈로니아인, 바스크인, 안달루시아인, 발렌시아인이

. 그래서 그들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스페인어도 할 수 있다우!"

스페인 전국 17개 주가 모두 이 묘양이다.

물론 표준 스페인어는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카스티야어이다. 하지만 1978년 헌

법에서 표준어인 카스티야어와 갈리시아어(포루투갈 북서부), 바스크어(수도 바르셀로나),

스크어(수도 빌바오) 등 네가지 언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여, 카스티야 지방을 제외한 지방에

서는 표준 스페인어를 제1외국어 또는 제2외국어로 교육하고 있으니, 가히 스페인어를 스페

인 국어라고 지칭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르지 않겠는가. 프랑코가 36년 간 철권통치로 스페

인을 장악하고 있을 때, 이러한 언어에 의한 지역적 갈등을 없애고자 카스티야어 만을 쓰도

록 하고 다른 언어는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36년 동안 카스티야 지방을 제외한 지역의

정서는 말 그대로 일제 36년간 일본어 사용르 강요받은 우리 민족의 심경과 같았다고 보

면 정확할 것이다.

프랑코도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사후 스페인은 다시 언어의 지역분권 시대로

돌입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스위스'라고 자부하는 카탈로니아 지방 언어의 위력은 대단하여

이 지방의 말은 물론 옆 발렌시아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마요르카 섬의 언어인 '

요르킨'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갈리시아의 언어는 갈레호라 하여 포르투갈어와 상당히 유사한 점을 갖고 잇으며, 바스크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의 언어와 전혀 관계가 없는 고유한 언어인 에우스케라를 쓴다. 갈리

시아 지방이나 카탈로니아 지방은 물론 특히 바스크 지방에서 동에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로

말을 거는 것은 그들에겐 모욕이나 다름없다. 언어 자체가 스페인어와 전혀 다른 언어이기

도 하지만, 이 지방의 도로 표지판부터가 고유한 바스크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조그맣게라

도 스페인어가 병기되어 있지 않으면 지도만 믿고 온 외국인들은 속절없이 길을 이잃고 방

황할 판이다. 이런 정도의 쇠고집을 갖고 있으니 그 유명한 바스크족 독립테러단체인 ETA

가 그렇게 여전히 활동하고 잇는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스크란 말도 바스크 말이 아니

. 그들은 자신을 에우스카디아라 부르는데, ETA는 번역을 하면 '바스크족과 자유'라는 뜻

이 된다. 바스크 지방에서 바스크 말을 쓰지 않는 사람은 절대 공직이나 회사의 중요한 자

리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고, 바스크어로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는

절대 예산이 할당되지 않는다.

스페인은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몰려드는 나

라다. 물론 그중에는 유럽인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기는 하지만, 옛 종주국을 둘러보려

는 라틴 아메리카인, 그리고 관광명소를 중심으로 떼거리로 몰려드는 일본인 등 외국인은

이제 스페인 사람만큼이나 보기흔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외국인을 바라보는 스페인 사

람들의 시각엔 감동 따위가 섞여 있을리 없다. 그들한테 외국인이란 영국인이건, 독일인이

, 중국인이건, 미국인이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다.

다만 영국이나 독일 등 북쪽 이웃 나라들에 대해서는 "늘 비가 오고 사람이 살 곳이 못

되는 땅이며, 인간들이란 일밖에 모르는 한심하고 가엾은 존재"라는 정도의 선입견은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스페인어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은 같은 기질을 지닌 "형제"

로 대접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인들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시에스타(낮잠)

그들도 즐기기 때문이다. 점심을 먹은 뒤 한숨의 단잠을 마다하고 이시간에 나돌아다니거나

일을 하는 인간은 도무지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고 보아줄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 '성스

러운' 시에스타 시간에 전화질을 하는 야만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도 신의 은총이 모든

인류에게 고르게 내리지 않았다는 증거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런 외국인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든 스페인 사람들에겐 관심 밖의 일이다. 외국인

들이 보기에 스페인인들은 너무 말이 많고 시끄러우며 예절이 엉망인데다가 조심성이 없는

민족이며, 새벽 3시 전에 잠자리에 드는 사람을 복 수가 없고, 파티라도 열리는 날이면 아예

밤을 꼬박 새운다. 노는데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브라질 사람들까지도 그들의 이런 초

인적인 체력과 기질에는 경탄과 존경의 눈을 거두지 못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열정적이라고들 얘기하지만, 그들은 대단히 이기적이다. 자신의 허물엔

무한히 관대한 반면,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하기야 그렇지

않은 민족이 또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들의 경우는 봄 도가 지나쳐, 아무리 자신이 잘못했더

라도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웃이 모두 그러니 그러한 태도가 오히려 자연스러워

졌을지도 모른다. 길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밟아도 그 흔한 '

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이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 마구 뛰고 소리를 질러대도 부모가 제재

를 하지 않으면 눈살을 찌푸리고 국민들의 문화수준이 낮은 증거라고 매스컴이 흥분하고들

하는데, 이탈리아나 남부 프랑스, 특히 스페인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인 일이다. 비싼

돈을 주고 베이비 시터를 고용하고서라도 아이들을 집에 두고 어른들만 외출하는 북유럽에

비해, 이탈리아에서는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외출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 빨라

10시나 돼야 시작되는 저녁식사, 길게는 새벽 2,3시까지 계속되는 식사, 식사보다는 수다

가 끝날 때까지 아이들이 그 주변에서 더들며 뛰어 다니는 모습은 아주 자연스러운 풍경이

.

그들의 '나 몰라라', '난 책임없어' 식 사고 방식은 '마냐나'라는 말에도 잘 나타난다.

슨 질문이든 대답은 마냐나다. 돈 언제 갚을 거냐 물어도 마냐나, 언제 다시 만날 거냐고

물어도 마냐나, 주문한 물건 언제 갖다 줄거냐고 물어도 마냐나, 물이 넘쳐흘러 물바다가 된

변기를 언제 고쳐줄 거냐고 물어도 마냐나다. 마냐나란 직역하면 '내일'이지만, 이 말을 곧

이곧대로 믿었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그들이 만하는 마냐나란 내일일수도, 모레일 수도,

일주일 뒤일수도, 한 달 뒤일 수도, 일년 뒤일 수도, 10년 뒷일수도 어쩌면 영원히 안될 수

도 있다는 뜻이므로.

시간약속도 마찬가지다. 옛날에는 '코리안 타임'이라하여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약속 장소에 나가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대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경제 발전과 더불어

이런 버릇도 많이 고쳐졌지만 대도시에선 교통제증 대문에 또다시 약속시간을 정확하게 지

키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과 약속하면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기

다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오랜 습성이기도 하지만, 본의 아니게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사정이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는 사람이 커피 한잔

하자고 제안했을 때, 이를 거절하는 것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큰 실례가 된다. 특히

상대방과의 대화가 끝나기도 전에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뜨는 것은 더더욱 큰 실례다. 그래

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대화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법이 없다.

서로 먼저 자리 뜨는 것을 실례로 여기다보니 이야기는 끝없이 계속된다. 그러니 한두 시간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보통이며, 시실 상대방도 비슷한 이유로 늦게 도착하기는 매한가지다.

스페인 사람들을 식사에 초대하려면 적어도 식사 시간 두시간 전으로 약속시간을 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님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음식을 다시 데워야 할 테니 여

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어느 학자는 그래서 스페인의 국민음식이라는 '파에야'

크게 사랑받고 있다고 말했다. 파에야란 음식은 넓은 철판에 쌀과 각종 해물, 닭고기, 소시

, 돼지고기, 양고기 등 온갖 육류와 토마토, 붉은 파프리카, 푸른 파프리카, 양파, 마늘 등

온갖 야채를 넣고 사프란 향료와 함께 볓 시간이고 계속 끓이는 요리인데, 우리나라 식으로

치자면 잡탕밥에 해당한다. 이 요리는 두시간이건 세시간이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두고두

고 꿇이고 데워먹는 음식이기 때문에 손님이 일찍 오건 늦게 오건 주인은 별다른 수고를 하

지 않고도 더운 음식을 대접할 수 있다. 그래서 파에야를 그들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는 걸

?

이처럼 시간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스페인에서는 바람을 피울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

마저 있다. 어느 회사 사장님이 여비서와 눈이 맞아 토요일 오후에 호텔에서 밀회를 약속했

. 이날 아침 아내가 친정에 가 저녁 늦게야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이 기회를 이용하기

로 했다. 그런데 사장님은 호텔로 가는 도중 우연히 고교 동창생을 만났다(어차피 누구라도

만나게 되어 있지만). 동창생의 제안으로 카페에 들어가 두 시간, 대화 도중 약속이 있다고

자리를 뜰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비서는 퇴근 후 미장원에 들렀다가 만난 친구와 어울려

수다 덜기 세시간, 그 동안 그녀는 호텔에서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장 부인 역시

역으로 가는 길에 이모를 만나 카페에서 끝없이 수다를 떨다 친정집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

...

스페인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뻬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들의 이름이다. 이를 이해하면

스페인의 영향을 크게 받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스페인

이 모계 중심사회라는 사실은 오랜 전통을 통해서도 알 수 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그 독특한 이름체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외국인에게는 워낙 까다롭게 보이지만 다음 세가

지 원칙만 알면 쉽게 스페인식 이름을 지을 수 있다. 스페인식 작명의 원칙이란 다음과 같

.

첫째, 여성은 결혼해도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처녀때 이름과 성을 그대로 갖는다. 둘째,

이름은 본 이름과 아버지의 성 그리고 어머니의 성, 세 단위가 기본으로 되어 있다. 셋째,

성은 아버지의 성, 그 다음에 어머니의 성 순서로 쓴다. 우리나라는 여성이 결혼을 해도 처

녀적 성을 그대로 지니며 남편 성을 따르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스페인과 아주 흡사한 데

반해, 결혼한 여성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일본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가령, 우리나라는 김영

숙이란 여성이 민현우란 남성과 결혼해도 죽을때까지 김영숙으로 남지만, 일본의 나카무라

게이코란 여성은 와타나베 집안에 시집을 가면 와타나베 게이코가 된다. 서양의 경우 여성

이 결혼하면 일본처럼 남편의 성을 따른다고 하지만 스페인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스페

인식 작명의 한 예를 들어보자.

마리아 로드리게스 고메스라는 처녀의 경우, 로드리게스의 아버지의 성, 고메스는 어머니

의 성이다. 마리아는 결혼을 해도 죽을 때까지 마리아 로드리게스 고메스로 남는다. 마리아

가 후안 디아스 페르난데스란 남자와 결혼을 한다고 치자, 물론 디아스는 후안의 아버지의

, 페르난데스는 어머니의 성이다. 마리아와 후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이사벨라의 이름은

어떻게 될까? 아버지 후안의 성인 디아스를 먼저 쓰고 어머니의 성인 로드리게스를 합쳐 이

사벨라 디아스 로드리게스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버지의 성이건 어머니의 성이건 역시 남성의 가문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리아는 비록 고메스라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는 있지만, 아버지 성인

로드리게스 뒤에 오고 마리아의 딸 대에 가서는 할아버지의 성인 로드리게스란 성은 물려받

아도 외할아버지의 성인 고메스란 성은 물려받지 않게 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단체에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며 어머니의 성도 같이 써서, 예를

들면 김박영수, 이최미숙 식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정말 남녀평등 원칙에

서 아버지, 어머니 성의 비중을 동등하게 부여한다면 김박영수와 이최미숙 부부가 낳은 아

이는 김박이최민호, 그 손자는 김박이최성방조윤영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사태를

피하려면 모계든 부계든 어느 한쪽에 혈연의 정통성을 줄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스페인식

이 되든가, 아니면 스페인식이되 정반대로 모계 쪽에 정통성을 주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고보면 아이의 성을 가지고 남녀평등을 논하는 데에는 한계가 따른다

고 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이해했다면 복습문제를 훌어보라. 흘라시도 헤수스 도밍고란 남자와 카르멘 가르

시아 코르테스란 여자가 부부가 되어 낳은 아들 마누엘의 이름은?( : 마누엘 헤수스 가

르시아)

스페인 하면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이 투우와 플라멩코 춤이다. 이 둘은 스페인 사람들을

정열적이라고 말하는 상징적인 '문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스페인의 신문들은 투우 기사를

스포츠면에서 다루지 않고 문화면에서 다룬다. 투우는 스페인 사람들에겐 '놀이'가 아니라

그들의 인생철학이 응축된 의식인 것이다. 그러나 투우의 철학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 투우란 잔인하기 짝이 없는 피투성이의 동물학대요, 끔찍한 살육의 현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유명한 투우를 보려고 잔뜩 벼르다 비싼 돈 내고 투우장에 들어

온 외국인들 중에는 끝까지 보지도 못하고 중간에 자리를 뜨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세계의 동물 애호가들은 이러한 동물학대를 당장 중지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물론 스페인 국내에도 투우를 금지시켜야 한다는 견

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아무 죄 없는 멀쩡한 소를 오로지 '게임'을 위해

죽이는 짓은 야만적이라는 외국인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이렇게 항변한다. "투우장에 나서는

소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드넓은 풀밭에서 일도 하지 않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긴

. 투우장에 들어와 죽을 때 그들의 고통은 단 15분만에 끝나며, 명예로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투우를 비난하는 사람들 나라의 소들은 어떤가? 평생 노동에 시달리다 결국 도살되

어 고깃덩이로 시장에 팔려나간다. 우리가 동물을 학대한다고 비난하는 나라의 사람들은 개

떼를 풀어 죄없는 토끼나 여우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과연 누가 더 동물을 학대하는 것인

?"

오늘날 투우는 과거와 같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다. 이제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열광하는 것은 축구다. 토요일 오후 8, 텔레비젼에서 축구 중계가 있는 시간이면 거리는

한산하다. 오죽하면 주말마다 축구에 남편들을 빼앗긴 '축구과부' 여성들이 '축구로 피해

를 보는 여성들의 모임'을 결성하여 축구중계를 못하도록 요구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한창

바빠야 할 시간에 파리를 날리게된 식당, 술집 등의 업소 주인들까지 동참하여 의회에 강

력한 로비를 벌이겠는가.

그러나 축구가 이처럼 뜨거운 열풍으로 휘몰아치기 전까지만해도 투우는 온 스페인 국민

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었다. 유명한 투우사가 출연하는 날이면 도시 전

체의 상가가 문을 닫고, 문을 열었다해도 고객은 주인의 서비스를 기대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인기였다. 요즘은 투우가 관광객 대상 쇼로 전락했다는 개탄이 일고 있고, 사실 관광

지마다 외국인을 상대로 한 어설픈 투우가 자주 열린다. 그래도 투우에 대한 스페인 사람들

의 애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도시마다 마을마다 관광객 대상이 아닌 정통 투우가 계속

열린다. 아직가지 투우는 스테인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민족

적 문화유산이자 의식이며, 스페인인들의 인생철학이 극명하게 드라나는 한 면모이기도 하

.

인생, 위기, 죽음, 그리고 피하지 않고 이와 맞서 싸우는 인간의 자존심, 남성적 자존심...,

인간과 소가 맞서 일 대 일로 겨루는 투우장, 드넓고 텅 분 투우장 아레나는 곧 궁극적으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인생 그 자체이다. 모든 동물들 가운데 가장 남

성적인 검은 수소와 가장 남성적인 남성이 대결한다. 맹수로 치자면 사자나 호랑이, 표범도

있고 덩치로 치자면 코끼리 같은 거대한 동물도 있지만 위풍당당한 외모와 앞으로 쭉 뻗은

위협적인 뿔을 가잔 검은 수소보다 더 남성적인 풍모를 지닌 동물을 찾아볼 수 있을까.

세상에 그 많은 멋진 남자, 잘생긴 남자, 체격 좋은 남자가 있지만 장검을 뽑아들고 수소를

노려보는 화려한 의상의 투우사보다 더 남성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까.

의상만하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투우사의 의상만큼 화려하고 남성 몸매의 곡선을 에로틱하

게 드러낸 의상은 찾아볼 수 없다. 몸에 완전히 들러붙는 하의는 성기의 모습을 그대로 드

러내며(대개는 바지의 오른쪽으로, 왼쪽인 경우에는 그 투우사가 호모임을 의미한다.), 한 벌

에 보통 수백만 원씩 하는 이 투우사 복장은 에로티시즘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두 상징적인 남성성의 대결을 보며 관중들은 자신의 삶을 대입시켜 보고, 달쳐오는 위

기와 죽음에 맞서 결연히 싸우는 인간의 모습을 보며 환호하는 것이다. 투우사는 소가 자신

을 향해 돌진해 올 때 두발을 땅에 고정시키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소를 피해야 한다. 마지

막 순간에 공포 때문에 두 발 중 하나가 땅에서 떨어진다든지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모습은

비겁한 비난과 야유를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단칼에 급소를 찔러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소를 거꾸려뜨려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고 여러 번에 걸쳐 칼로 쑤셔대는 투우사는 정

육점 직원으로 전락되어 온 관중의 조롬을 받으며 비참한 모습으로 아레나를 떠나야만 한

.

적을 최소한의 고통 속에서 생알 마감케하라! 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훌륭한 투

우사가 될 자격이 있다! 이것이 스페인 투우의 철학이다. 투우는 스포츠가 아니라 의식인

것이다. 투우는 대개 부활절에 시작하여 10월까지 주로 일요일과 축제일에 열리고, 북부 스

페인과 카탈로니아 지방에서는 축제일과 축제기간에 열린다. 보통 오후 5시경 어느 정도 뜨

거운 태양의 위력이 떨어져 더위가 한 풀 꺾일 즈음에 막을 연다. 시간을 여간해서 잘 지키

지 않는 것이 스페인 사람들의 습성이지만 투우만큼은 거의 정확히 예고된 시간에 열린다.

스페인 전국에 300개가 넘는 투우장이 있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투우장은 좌석이 3

석이나 되어 스페인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입장권 종류는 세가지가 있다. 그늘이 지는 곳, 햇볕이 드는 곳, 해가 비추다 그늘이 지는

, 그늘이 지는 곳은 햇볕이 드는 곳보다 곱절 이상이나 되고, 시작할 때는 햇볕이 들지만

나중엔 그늘이 지는 중간은 가격 또한 중간쯤 된다. 당연히 상석인 그늘이 지는 곳엔 본부

석이 있고 대개 시장이나 경찰서장 등 그 자방의 유지가 호스트가 되어 개막을 선포하고 투

우사의 연기에 대한 평가를 심사하는 명예위원장의 역할을 맡는다.

객석 한부분에는 4,5인조 악단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은 마치 옛날 서커스에서 듣던 구

성진 가락 같으면서도 경쾌한 리듬의 파소도블레를 연주하여 경기의 시작과 장면 전환을 알

린다. 한번 투우가 열리면 여섯 마기의 소가 죽어나간다. 경우에 따라 투우사가 죽어나가기

도 하고, 쇠뿔에 받혀 중상을 입고 들것에 실려나가기도 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투우사를 굴

복시킨 소가 관중들의 우레와 같은 갈채 속에 피투성이인 채이지만 살아서 아레나를 벗어나

기도 한다. 적어도 투우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절박한 대결의 장이지, 보고 즐기는 놀이터

가 아니다, 여섯 마리의 소가 인간과 생명을 건 대결을 벌이는 것이다. 투우는 소 한 마리가

아레나에 등장하여 죽어서 나가기까지 15분을 넘길 수 없다.

평생 일도 않고 푸른 초원을 유유자적하며 즐기던 소가 투우장에 끌려오면 투우가 시작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캄캄한 독방에 갇힌다. 갑자기 변한 주변환경에 정서적으로 크게 불안

해하다가 햇볕이 작열하는 아체나의 모래밭에 나서는 순간, 소는 또다시 변한 환경과 사람

들의 함서을 듣고 자기도 모르는사이에 흥분을 하게 된다. 소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있지

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인간이 적대행동을 하는 걸 못보았기 때문에 공격할 엄두를 내지 않는

. 다만 흥분상태에서 눈앞에 어른거리는 붉은 천이 몹시 신경에 거슬리고 어쩐지 위험할

것 같아 위협을 주기 위하여 뿔로 들이받으려 할 뿐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믿었던 인간들이 3미터가 넘는 창으로 목을 찌르고 쑤시며 작살을 등

에 꽂는 등 잔인하기 짝이 없는 짓을 계속해 댄다. 그래서 투우사가 15분 안에 장검으로 우

표 크기만한 급소를 명중시켜 죽이지 않으면 소는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소는 드디어

그의 적이 붉은 보자기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터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말한다. 이 짧은 15분이란 시간 속에서 소는 인간이 60평생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터득하게 된다고...

스페인 사람들의 투우에 대한 열정에 못지않게 비판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동물

학대의 차원이 아니라 스페인이 처한 현실에서 비롯되는 사회적인 문제점과 상업주의에 편

승해서 투우가 값싼 쇼로 전락한 때문이다. 투우용으로 사육되는 소는 보통 고기나 젖을 얻

기 위한 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환경을 요구한다. 사실 단 15분의 스펙타클을 위하여 태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사역은커녕 몇 년씩 드넓은 초원을 독차지하고 '무위도식'하는

소가 전국적으로 수십만마리에 달한다. 이 소들은 튼튼한 근육을 기르기 위하여 일반 소보

다 평균 4배 이상의 사육 면적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경작 면적이 부족한

스페인의 농업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대단한 국토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스페인의

투우 산업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력가, 지주 등의 이해가 얽혀 국가경제적 차원보다는 개

인의 이익이 앞서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그다지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또 날이 갈수록 투우사들이 과거의 긍지나 명예보다는 오히려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이익을

중요하게 여겨 위험부담은 줄이고 쇼적 효과는 올리려는 얄팍한 상흔이 판치다보니 투우의

본질이 흐려지고 싸구려 쇼로 전락하고 있다. 심지어는 받히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지

않도록 소의 뿔을 가는 등 사전에 조작하는 '비겁한' 행동이 날로 심해져 스페인 정부

19964, 이를 금지하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저항하여 스페인 투우사 연합의 주도

하에 투우사 파업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에 굴복, 19974, 슬그머

니 파업을 취소한 적도 있다.

스페인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는 음악으로 가극 "카르멘"을 든다. 세비야 담배 공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카르멘과 돈 호세, 그리고 투우사의 삼각관계를 줄거리로 한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집시 카르멘의 아리아 "하바네라", 호방하기 그지없는 "투우사의 노래" 등 가

극 카르멘의 음악은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빠짐없이 배경음악으로 깔린다. 그러나

이 음악은 어디까지나 비제라는 프랑스 작곡가가 만든, 지극히 프랑스적인 정서일 뿐 결코

스페인적인 정서라고 하기 어렵다. '메이드 인 프랑스'의 스페인 정서라고나 할까. 비제의

섬세하고 화려하며 달콤하기 그지없는 음악은 실제 스페인의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스페인을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음악이라면 달빛이 고즈넉한 알함브라 궁전에서 듣는

타레가의 '알함브라의 추억', 로드리고의 기타 협주곡 2악장이 제격이다. 아랍인들 최후의

보루였던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달빛에 물든 천년의 아리비아풍 고성에서 듣는 잔잔

한 기타곡은 차라리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로드리고의 '아란훼즈 협주곡'은 우리에게도 기타

협주곡의 대명사처럼 잘 알려진 곡이지만, 아란훼즈가 스페인왕의 여름 별궁이란 사실을 아

는 이는 드물다. 궁정 작곡가였던 로드리고가 만년에 장님이 되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아란

훼즈의 풍경을 음악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알함브라의 추억'이나 로드리고의 '아란훼즈 협주곡'이 비록 소름이 돋도록 황

량한, 비애에 잠긴 스페인 고성과 자연의 풍광을 잘 묘사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순화된 감정 표출이다. 이에 비해 플라벵코는 스페인 서민들의 설움

과 삶의 고뇌가 여과되지 않고 터져 나오는, 그래서 그 무엇보다 가장 스페인적인 정서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멩코란 단어는 1928년에 출판된 스페인 최대의 백과사전에도 올라있지 않다. 그 정도

로 스페인 상류사회에서는 철저히 천시당하던 하층민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플라멩코

는 원래 스페인의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에 속했던 안달루시아 지방의 히타노(집시)들의

춤과 노래였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스페인 하층민들의 그것과 접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스페인은 한때 무적함대를 거느리고 16세기 유럽의 최강자로 군립했고, 브라질을 제외한

전체 남아메리카 대륙을 자신의 문화권으로 장악했던 나라지만, 하층 민중의 삶은 더할 나

위없이 비참했다. 카톨릭 교회와 몇몇 봉건 토후들의 전횡으로 민중들은 근대까지 농노나

다름이 없어썩, 1930년대의 내란으로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으며, 36년간 프랑코의 철권통치

아래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왔다. 스페인 민중의 삶은 그래서 바로 한맺힌 삶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슴속에 응어리진 슬픔과 분노를 울부짖는 듯한 노래와 격렬한

춤으로 분출해 왔던 것이다.

플라멩코는 스페인에서도 가장 가난했던 안달루시아 지방 히타노들의 정서와 천대받던 하

층민들의 정서가 융합되어 창조된 '삶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그 속에는 학대받고 착취

당한 스페인 서민들의 분노와 고통이 피처럼 진하게 녹아 있다. 초기 플라멩코 곡들 중 가

장 흔하게 불리던 '한 죄수의 노래' 가사를 들춰보자.

"캄캄하기만 한 지하감옥에서 내게 날라져 온 음식 내가 더욱 많이 삼켜야 했던 건 음식이

아닌 눈물이었네."

플라멩코 노래에는 그러면서도 암울한 세상에 대해 저항하고 투쟁하기보다는 체념하고 절

망하면서 흐르는 눈물을 되삼켜 버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절규하듯, 피를 토하듯

뿜어내는 고성과 미친 듯 두들겨대는 손뼉 소리는 마치 화산처럼 그들의 가슴속에 앙금진

세월의 고뇌와 분노의 용암을 쏟아내는 것이다.

플라멩코 노래는 남성의 영역, 춤은 주로 여성의 영역이다. 물론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

는 유명한 남성 플라멩코 댄서도 있지만 절대적으로 여성 댄서가 많다. 수없이 많은 플라멩

코 춤 학원에서 무용수가 되기 위해 땀 흘리는 수강생들은 대부분 여성이다. 노래와는 달리

플라멩코 춤은 20세기 들어와 외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지역의 민속춤과도 융화되어 크게

변화를 겪었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민속춤으로 발전한 플라멩코는 화려한 의상, 박진감 있는 맺고 끊음,

빠르고 힘찬 바닥 구르기, 유연하고 에로틱한 손동작, 몸동작, 이세상 모든 것을 내려 굽어

보는 듯한 오만한 시선...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전세계적으로 가장 매력 있는 춤의 하나로

알려졌고, 스페인을 대표하는 춤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러나 플라멩코 춤은 다른 민속무용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민속춤은 전래

되어 오는 규격에 따라 민족적 정서를 표출하는 데 비하여 플라멩코는 춤추는 이 자신의 감

정표현이며 내면세계의 표출이다. 그런 만큼 일정한 형식을 따르되 그대그때의 감흥에 따라

즉흥적인 안무가 이루어진다. 상반신을 곧추세우고 철저히 제어하며 손과 손목의 동작으로

자신의 감정을 분출해 나간다. 더구나 남녀가 함께 추는 플라멩코는 다른 민속춤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민속춤이란 한 민족의 공동체 의식의 승화된 표현방식이자 남녀가 함께 어우

러져 조화를 이루어내는 것으로 예외없이 신체의 접촉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플라멩코

춤에서 남녀 사이에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듯 신체적 접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열정적인 몸동작과 절묘한 조화 속에서도 남녀는 분명히 독자적인 개체로 자신의 번뇌와 생

에대한 한과 집착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 역사에 드리운 영광과 비애

스페인의 역사는 격동의 역사이자 영광의 역사이며 또 비극의 역사이다. 아마도 이 나라

만큼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고 오랜 전쟁과 독재에 신음한 나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땅의 원주민은 이곳을 흐르는 강 에브로의 이름을 딴 이베리아인과, BC2000년 경 동쪽에서

이주해 왔다고 전해지는 바스크 족으로 이들은 모두 뒷날 침공해 온 켈트 족과 피가 섞인

. 이베리아 반도는 BC 131, 로마에 정복되어 400년 간 지배당하고, 로마가 물러간 뒤

게르만족의 일족인 서고트족이 내려와 AD 409년에 왕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AD 711,

브롤터 해협을 건너온 이슬람교도 아랍인(무어인)들이 5년 만에 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

고 프랑스에까지 진출하였으나 푸아티에에서 패전, 피레네 산맥 이남으로 물러남으로써 피

레네 산맥은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자연 경계가 되었다.

711년에 침략해 온 아랍인들이 1492, 완전히 물러갈 때까지, 스페인에는 무려 700여 년

동안 이슬람 문화가 뿌리내림으로써, 스페인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하면서도 가

장 동양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색지대가 되었다. 아랍인들의 지배 아래 숨조차 제대로 못 쉬

던 기독교도들은 925년부터 국토회복을 위한 대장정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이 전쟁은 1469

년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가 결혼하여 두 왕국이 통일되

면서 결정적 계기를 맞았고, 1492년 아랍인 최후의 보루였던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시킴으로

써 아랍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다.

1492! 이 해는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해로 기록된다. 스페인의 비약적 발전의

틀을 마련한 것이 바로 1492년이었고, 그래서 1992년에 스페인은 대대적인 500주년 행사를

벌였던 것이다. 스페인 통일을 이룩한 이사벨라 여왕이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자 계승 순위에 의해 독일 황제 카를 5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게 되어, 스페인은 합스부

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에 이르러 스페인은 신대륙에

서 무진장 쏟아져 들어오는 황금을 바탕으로 유럽의 최대 강국으로 부상하였고, '황금의

 

세기'를 누린다.

그러나 새롭게 부상하는 해양강국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에 의해 무적의 함대라는 아르

마다가 궤멸되어 제해권을 빼앗기면서 스페인의 전성기는 끝나고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

들게 되었다. 1700,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세상을 떠나자 흐랑스 루이 14세는 자신

의 조카를 후계자로 내세웠다. 이에 크게 반발한 합스부르크 왕가와 이른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터지게 된다. 13년 전쟁 끝에 루이 14세의 조카 앙주공 필리프가 펠리페 3

세로 즉위함으로써 프랑스의 스페인에 대한 간섭이 본격화되었다.

1808,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이 동생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책봉하

자 유혈폭동으로 시작된 독립 투장은 나폴레옹 몰락 때까지 계속되어 1814년 드디어 페르난

7세가 복위함으로써 스페인은 프랑스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기울어져 가는 스페인의

국력은 국제부대에서도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1898년 최후의 식민지였던 쿠바, 푸에

르토리코, 필리핀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새로운 세기 20세기는 새로운 이념을 스페인에 몰고

왔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이 그것이다.

군대, 성직자, 대지주가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국민은 가난과 핍박에 신음하던 스페

...,국민해방을 부르짖는 좌익사상일 불길처럼 전국을 휩쓴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시대의

흐름이었고, 스페인 전국은 좌, 우익으로 갈라져 나라 전체가 혼돈과 무질서에 휩싸이고 말

았다. 1936, 선거에서 좌익정당인 민족전선이 승리, 놔익정권이 성립되자, 보수우익 세력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 장군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피비린내나는 민족

상잔, 이른바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이 전쟁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프랑코를 지원하고, 소련이 공화파를 지원함

으로써 국제 대리전쟁의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전쟁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이웃 프랑

, 영국 등이 뜨뜻미지근한 중립 태세를 보임으로써 대세는 프랑코에게 유리하게 기울어,

1939년 바르셀로나 함락을 최후로, 프랑코는 스페인 내란을 승리로 마감하고 공포의 암흑통

치를 펴기 시작했다.

이 전쟁으로 무려 60만명의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중 40만명은 프랑코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정치 희생자들이었다. 1975, 세상을 떠날때까지 프랑코의 통치는 그야말로 공포에

가득 찬 철권독재로 일관했다. 36년 간 비밀 경찰과 군대에 의해 수많은 국민이 반정부라는

이름 아래 가차없이 고문당하고 살육되었으며, 모든 권력과 부는 군대, 성직자, 대지주가 독

,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했고, 이웃나라들은 등을 돌렸다.

19751120일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했다. 스페인은 해방된 것이다. 프랑코가 사라진

직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국왕으로 즉위했고, 스페인은 놀라운 속도로 자유, 민주주의 국

가로 변신해 가기 시작했다. 공포의 독재정치에 넌더리를 낸 스페인 국민들은 자유와 민주

주의를 그토록 목마르게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왕 후안 카를로스는 현명한 군왕이었다.

그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아니하고, 서민적인 생활을 하며 스페인의 민주화에 앞장섰는데,

민주주의정권이 들어서면서 스페인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프랑코의 암픅정치

에 거부감을 가지고 스페인을 멀리했던 외국 관광객들이 물밀 듯 몰려오기 시작, 막대한 외

화를 몰아왔다.

불과 20여년 사이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변신, 이제 높

은 국민소득과 발달된 산업을 자랑하는 일등국가의 대열에 설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스페

인은 EEC에 가입함으로써, 진정한 유럽으로 복귀했던 것이다. 수천년 역사에 끊임없이 이

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겪었고, 또 한때는 세계를 호령했던 최강대국이기도 했던 스페인,

제 스페인은 지난날의 눈물자국을 깨끗이 지우고 21세기에 다시 한번 1492년의 영광을 재현

하기 위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 04

이원복 교수의 진짜 유럽이야기 4

 

아일랜드

초록빛 전원 속의 꿈과 절망

아일랜드처럼 많은 시인과 작가를 배출해 낸 나라는 아마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인

구에 비례해 볼 때 말이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세계문학의 거봉들만 보아도 새뮤얼 배케

., 브렌던 비언, 제임스 조이스, 숀 오케이시, 조너선 스위프트, 오스카 와일드, W.B. 예이

, 버나드 쇼 등이 모두 아일랜드 출신이다.

1856년에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예이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일랜드인

들이 이루어놓은 일은 그다지 대단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고대 그리스인 다음으로 대단한

얘기꾼임에는 틀림없노라고... 어째서 가난하고 찌든 역사로 인해 지금까지 후유증을 앓고

있는 나라에서 이렇게 기라성 강은 대문호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훌륭한 인재들이 한 나

라에서 특별히 많이 나오는 것도 우연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경우 미술, 음악 등

인간의 오감으로 향유하는 예술보다는 상상의 세계 환상과 공상의 세계에서 열락을 누리는

문학분야에서 유달리 탁월한 대가들을 많이 키워냈다는 사실은 분명히 연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자연과 역사! 부드럽고 신선한 공기와 끝없이 펼쳐진 푸르고 완만한 구릉, 그리고 망망대

해인 대서양의 수평선... 그들에게 주어진 이 자연조건만 하더라도 머나먼 공상의 세계로 떠

날 준비는 완벽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에 비해 현실은 너무 혹독했다.

없이 반복되는 가난, 그리고 800년에 걸친 이민족의 지배, 이에 맞서 끈질기게 계속된 독립

투쟁, 반복되는 살육과 파괴, 그리고 공포...

그러잖아도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푸른 잔디 언덕 위에 누워 아일랜드인들은 저

먼 수평선을 바라보며 고통이 없는 이승의 세계, 아니면 이 고통이 극복된 세계, 또는 이 고

통이 시작되기 전의 세계를 꿈꾸었기에 하고 싶은 얘기, 쓰고 싶은 얘기들이 그렇게 많았는

지 모른다. 아니, 지금 겪고 있는 이 암울함, 고통, 절망을 수평선 위의 구름에 그대로 실어

보내기엔 너무도 가슴이 저려서 이를 시로, 소설로, 수필로, 그 무엇으로든 폭발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엄청난 고통과 갈등을 안고 있으면서도 아일랜드의 풍경은 말 그대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전원 그자체이다. 그저 고요하고 한적하기만 한 아일랜드의 풍경을 예이츠는 이렇게 노래했

. "연못에 오리 네 마리, 그 뒤의 잔디밭, 봄의 푸른 하늘, 거기에 떠 있는 흰구름. 두고두

고 그리워하기에는 얼마나 사소한 것들인가." 아일랜드인들이 해외에 이주해서도 언제나 그

리워하는 고향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아일랜드는 푸르다.(우리말로 푸르다는 말은 '파랗다'보다는 초록색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

), 아니 푸른 정도가 아니다. 아일랜드에는 초록색을 표현하는 형용사가 40개에 이른다.

강렬한 초록이 아닌 부드러운 아일랜드의 초록빛은 지독한 추위도 지독한 더위도 없는 온화

한 기후와 잦은 비가 빚어낸 '미술품'이다 아일랜드엔 정말 자주 비(소나기)가 온다. 아일

랜드인들은 이렇게 얘기한다. 신이 시간을 창조할 때는 아일랜드인에게 넉넉히 할당을 했는

데 날씨를 창조할 때는 시간을 넉넉히 준 대신 약간의 심술을 부렸다고.

소나기가 태양을 따라 다니는 하루의 날씨는 드라마틱하다. 빛나는 태양과 함께 시작한

하루는 곧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곧 소나기가 퍼붓는가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태양이

빛난다. 아일랜드처럼 아름다운 무지개를 자주 볼 수 있는 나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문학

의 나라 아일랜드, 아일랜드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두 명이나 냈다는 사실은 350만 인구

를 가진 그 어떤 나라도 꿈꾸지 못할 엄청난 사건이다. 그런데도 아일랜드인들은 불만이 대

단하다. 그들이 최고의 문호로 꼽는 제임스 조이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결

코 있을 수 없는 스캔들이며, 스웨덴 노벨상 심사위원회다른 나라의 로비와 농간에 놀아

났다는 것이다. 조이스야말로 20세기 최고의 문호라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는 그

들은 문학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대번에 혈압이 오른다.

넉넉한 습기와 태양, 그리고 부드러운 기후는 아일랜드 섬 전체를 푸른 잔디밭으로 만들

었다. 서남쪽에 자리잡은 이 섬의 최고봉은 1038미터, 그나마 산악지대라고 말하긴 어렵고,

전국이 밋밋한 잔디동산과 남산 정도 높이의 산들뿐이다. 자연 이런 조건에서는 골프가 발

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아일랜드 전국에는 무려 300개가 넘는 골프장이 있으며, 미니

골프장도 부지기수다. 잔디 위에서 벌이는 경마와 개경주도 아일랜드인들에겐 더할 나위 없

는 즐거움이다. 평화로운 자연 속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는 가난이나 고통에

찌든 음산한 표정은 보이지 낳는다. 모두 다 밝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의 모습이란 '라이언의 처녀'같은 영화에서 본 것이 전부이다.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 거기에 IRA(아일랜드 공화국군) 무장테러라는 이율배반적인 현

, 특히 미국영화들은 IRA문제를 즐겨 다룬다. 그들은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기보다는 그저

액션영화 소재로 삼을 뿐이어서, 영화로만 아일랜드를 접해 온 우리에겐 공포와 긴장이 넘

치는 나라로 인식되어 있다.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문제뿐 아니라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특히 경제의 낙후성이 그렇다. 20%에 달하는 실업률은 많은 젊은이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아일랜드는 바약적인 경제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적극적인 해외

기업 유치, 시장경제로의 대변신 등을 통한 국제경쟁력 강화로 최근 몇 년 동안은 전체 유

럽에서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자랑하고 있다. 이웃 나라들이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정도다. IRA 문제도 과거보다는 훨씬 그 강도가 약해졌고, 블레어 정부가 들어서면서 적

극적인 해결책을 찾고 있어 희미하나마 희망을 걸어볼 만도 하다. 더구나 IRA 문제는 어디

까지나 북아일랜드, 즉 영국의 내부문제인 것이다. 아일랜드 공화국 사람들에게 IRA 문제는

이제 술집에서의 토론 주제이거나 TV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아일랜드는 기구하기 짝이 없는 착취와 억압의 역사를 갖고 있다. 800년에 이르는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들의 국민성도 상당히 왜곡되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증오, 좌절, 절망 등 우리 민족이 일제 36년 동안 지녔던 감정을 연상하면 아일랜드인들의

정서는 쉽사리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살고 봐야 되는 것인가. 그토록 오랜

기간 억눌린 상황 속에서 살다보니 아일랜드인들 스스로 살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던 듯,

그들은 험난한 역사와 가난 속에서도 풍요롭게 살아가는 삶의 기술을 터들한 듯하다.

아일랜드인들은 살림은 가난해도 풍요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즐기면서 살아간다. ,

출세, 명예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남의 간섭 안 받고 맘 편히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

게 여긴다. 그래서 아일랜드인들은 무슨 일에나 여유가 있다. 오히려 그 여유가 지나쳐 문제

가 될 정도다. 아일랜드인들은 조급해하거나 서두르는 것을 끔찍히 싫어한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간섭받는 것이다. 자기 주장이 강해서 무슨 일이든 제 고집대로

해야지, 남이 이래라저래라 하면 될 일도 안된다. 그 끈질긴 아일랜드의 독립투쟁과 지금도

계속되는 IRA의 독립투쟁도 알고보면 바로 이런 아일랜드인들의 타협할 줄 모르는 지독한

고집 탓이다.

다행히도 느슨하고 여유로운 생활방식 탓에 고집끼리 부딪칠 일이 없기에망정이지 토론이

나 회의라도 하게 되면 정말 구제불능일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세 명의 아일랜드인이 모이

면 절대 합의점에 이를 수 없다는 우스겟소리가 다 있을까. 영국인들도 아일랜드 고집이라

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야만적'이라고까지 했지만, 아일랜드 사태란 영국인에게 역사로

묶인 발이어서 뺄 수도 박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입장이 아닌가.

아일랜드의 시골 우체국이 대낮에 잠겨 있어도 이상해할 필요가 없다. 직원이 집안 잔치

에 간 것이니까. 이것은 그 직원이 결정할 문제이지 누가 가라 가지 마라 할 수도 없고,

서도 안된다. 가게에 주문한 물건이 약속한 날짜에 도착하지 않아도 조용히 입다물고 돌아

서는 방법밖에 없다. 스페인 같으면 마냐나(내일이란 뜻이지만 모레일지 일주일뒤일지는 모

르지만)라는 말이나마 있지만, 아일랜드인에게 언제 도착할까 짐작을 해보는 것도, 약속을

다시 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에 속한다. 오늘날 오겠지...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대흉작이 있었던 1840년에 대거 조국을 떠나 미국 등지로 집단 이민

을 했다. 우리 민족이 그렇듯 아일랜드인들의 귀소본능도 대단하여 어딜 가나 아일랜드인끼

리 모이고, 아일랜드 음식 해먹고, 아일랜드 명절을 즐긴다. 죽을 때까지도 고향을 그리워한

. 이런 아일랜드계의 후손들 가운데 미국 대통령도 많이 나왔다. 케네디, 포드, 레이건,

린턴이 다 아일랜드 핏줄이다.

그러니 아일랜드 문제는 그냥 아일랜드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다. 더구나 미국에 이민 온

아일랜드인들은 북부 출신이 아닌 카톨릭을 신봉하는 남부 출신들이고, 아일랜드에 문제가

생기면 핏줄이 당기는 미국 대통령이 적지 않게 개입하게 되는데, 지금도 미궁에 빠져 있는

F.케네디의 암살에 아일랜드 몬제가 개입되어 있다는 설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그러

니 미국은 아일랜드에겐 희망의 땅이고, 또 그곳에 사는 아저씨가 보내준 수표로 빵을 사야

했던 때를 기억하게 하는 풍요의 나라다. 그래서 아일랜드의 젊은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미

국으로 건너가려 한다.

영국인들을 보는 아일랜드인들의 시선은 참으로 착잡하다. 관광객으로 오는 영국인을 미

워할 수야 없지만 "영국인으로서의 영국인"은 곱게 보아주려고 해도 보아줄 수 없는 응어리

가 가슴속에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럼에도 영국인을 대놓고 비난하거나 과거의 잘못

을 따져 묻는 '촌스러운'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역사가 되돌려지는 것도 아니고, 800

년 쌓인 분노가 가시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표정한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짓는데, 손님을 맞는 따뜻함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차가움이 흐른다면 지나친

선입견일지 모르겠다.

윈스턴 처칠도 아일랜드에 가한 영국의 역사저 과오를 "지워버리고 싶은 장"이라고 말했

다지않은가. 어쨌든 영국인은 한마디로 애증의 대상이다. 밉기는 하지만 그들과 너무 오랫동

안 얽혀 살아왔기 때문이다. 영어를 배웠고 교육제도도 영국서 들여왔으며, 왼쪽 통행도,

히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 요리까지도 아일랜드 부엌에 영향을 끼쳤다. 곁으로 보아 아일랜

드의 모습은 영국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아일랜드인은 결코 영국인이 되지 않는다.

아일랜드인 20명이 점잖게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인과 다름없이 버스는

물론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때까지 버스 기다리는 줄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러나 버스가 멈추는 순간, 순식간에 그 줄은 허물어지고, 모두들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한꺼버넹 승강구로 덤벼든다. 그들은 아일랜드인들이니까.

아일랜드는 시칠리아하고만 비교가 가능할 정도로 철저한 가톨릭(93%) 국가다. 카톨릭은

국교는 아니지만 아일랜드인의 모든 생활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어 법률 이상의 구속력을 발

휘한다. 낙태를 자행(?)한 경우 종신형까지 각오해야 하고, 콘돔 사용 같은 인공적인 피임

도 좌악시된다. 공공장소에서의 성()에 대한 대화는 물론 외국의 낙태에 대한 정책을 전

달하는 보도조차 금기시된다. 19961124, 국민투표 결과 이혼이 시민법상으로 가능

해지긴 했지만, 이것이 곧 교회에서도 허락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남들이 모여 사는 동네(대륙)에서 멀리 떨어져 살수록 과거의 전통과 인습은 더 질기게

이어지는 법이다. 자연 아일랜드 여성들의 위상도 대륙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다르다.

것은 열악하다는 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해석의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영국의 경우,

집에 여성 혼자 나타나면 모두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이것은 독일도 마찬가지로, 술집

이란 남성의 전용공간 내지는 남녀동반, 적어도 둘 이상의 여성이 자리하는 곳이지 여성 혼

자서 갈 곳이 아니라는 인식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경우는 대충 '막 나가는

여자' 정도로 해석된다. 그러나 아일랜드에서는 오히려 '독립정신이 강한' 여성으로 인정되

고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인들의 여성관은 천년저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37년에 제정된 헌법에도 여성의 역할을 주부요 어미니이자 가정의 기둥으로 못박아 놓고

있다. 최초의 여성해방 운동가로 일컬어지는 마르키에비치 백작부인조차 여성으로서 독립운

동을 주도하던 신페인당의 의원 후보로 나서면서도 이러한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겠다는 의

사는 밝히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주부로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겠다는 정도였다. 아일랜드는

성모 아리아를 숭배하는데(가톨릭교의 특징이지만), 바로 이 성모 마리아 상이 아일랜드 이

상적인 여성상이다.

여성은 산업분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인력이다. 최근 일손이 달릴 정도로 외국 기업이

몰려들어 여성 취업이 현저하게 증가했지만 대부분 임금이 가장 낮은 직종(전체 산업중

20%)에 종사할 뿐이다. 쉽게 말해 아일랜드 여성은 3D 산업의 주역인 셈이다.

19701980년대 IRA 투쟁이 절정에 달했을 때, 주로 정치범을 수용하는 북아일랜드 감옥

에 수감된 여성 IRA 요원 또는 협조자들은 영국인에 대한 투쟁과 동시에 아일랜드 남성들

과도 투쟁해야 했다. 철저한 여성차별 때문이었다. '노 워시 캠페인

'(NO-Wash-Campaigen,목욕, 세면 등을 거부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남성들이 여성 죄

수들의 동참을 거부한 것이다.

엄격한 종교는 여성들에게 많은 경우 고통과 직결되기도 한다. 절대적인 낙태 금지로 인

해 성폭행을 당하거나 원하지 않은 아기를 잉태하더라도 반드시 출산하지 않으면 안된다.

1992, 아일랜드에서는 강간으로 임신한 14세의 소녀가 낙태 허용을 청구하는 소송을 법원

에 제출하여 전세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아일랜드 종교, 법제도에 이정표가 될 수도 있

는 중대사태였기 때문이다. 낙태를 완강히 거부하던 법원은 세계적인 여론에 떠밀려 최후의

순간에 영국으로의 출국을 허용됐다. 이는 결코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한 것이 아니라 영국

여행을 허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엄격한 금지에도 불구하고 비밀리에 영국으로 건

너가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여성은 매년 최소 5,000명은 될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아일랜드 국민은 뜻밖에, 너무나도 뜻밖에 여성 대통령 당선이라는 대통령 선거

투표 결과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메리 로빈스(Mary Robins) ! 아일랜드 국민 모두는

물론, 아일랜드인들의 여성관을 알고 있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경악했다. 여성 대통령의 출

현은 아일랜드 역사 최대의 이변이자 센세이션이었다. 아일랜드 국민 중 90%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니, 뭔간 변화를 원했던 유권자들이 설마 당선이야 되겠느냐 하늠 반신반의

의 심정으로 여성후보를 찍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임기말, 로빈스 대통령에 대한 국민 지지도는 놀랍게도 90%나 되었다.

이 사실에 세계는 또다시 경악했다. 설마 하고 장난삼아(?) 던진 한표 한표가 모여 당선된

여성 대통령이 임기 7년 동안 과감하고 혁신적인 정책을 밀어붙여 그 보수적이고 고집 세며

고지식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아일랜드 국민과 나라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우선 이혼을 법적으로 허용하여 가톨릭이 지배하던 세계를 근복적으로 뒤흔들어 놓았는데

(1996), 이는 여성의 위상을 크게 뒤바꾼 엄청난 사건이었다. 또한 과감한 개방정책을 도

입하여 해외기업을 적극 유치, 실업자를 구제하고 국낸 산업을 활성화시켰다. 그 겨로가 전

유럽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던 아일랜드는 96, 97년 무려 10%에 육박하는 신화적인 경

제성장률로 전체 유럽의 선두를 달려 이웃 나라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다. 우리나라

에서도 새한미디어가 일찌감치 진출하여, 아일랜드인들은 이 기업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

으며 아울러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상당히 긍정적이다.

모든 국민들이 97년 대통령 선거에 메리 로빈스 대통령이 재출마할 것으로 믿었고, 당선

확률은 100%니 아예 투표하지 말고 한번 더 대통령을 맡기는 것이 선거 비용을 절약하는

길이라는 주장까지 강하게 대두되기도 하였다. 임기말 국민 지지도가 90%인 대통령, 이는

전국민이 지도자를 얼마나 믿고 따르며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업적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지수이다.

그러나 로빈스 대통령은 홀연히 떠났다. 재선 후부에 불출마하겠다고 선어한 것이다. 그녀

는 자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며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유럽 의회로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

이다. 그녀는 자신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며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유럽 의회로 진출하겠다고

밝혔다. 인기 절정일 때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 떠날 때를 알고 떠나는 사람의 둣모습이 얼

마나 아름다운가를 심감케 하는 용단이었다. 그 뒤를 잇겠다고 나선 다섯 명의 후보 가운데

네 명이 여성이라는 사림은 7년 전의 아일랜드로서는 상상도 못할 상황이다. 이중에는 아일

랜드 독립투쟁의 전설적 인물이자 IRA 창시자 중 하나로 알려진 인물 마이클 콜린스(영화

로도 윌에게 잘 알려져 있음)의 손녀딸인 메리 배노티도 끼여 있는데 그녀는 1970년 대통령

후보 경선에 로빈스와 경합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1970년 유럽 가요 콘테스트에서 대상

을 수상, 다나라는 예명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가수 로즈메리 스캘런, 교수 출신 메리 매캘리

(영국 시민권을 가지게 된 북아일랜드 출신으로 벨파스트의 퀴즈 대학 부총장), 반핵운동

가이자 체르노빌 희생아동 돕기운동을 벌이는 애대 로슈가 여성 대통령 후보들이다. 아일랜

드의 여성상은 90년대의 개막과 함께 코페르니쿠스적 대변혁을 겪고 있는 중이다.

성 패트릭(St. Patrick, 약칭 Paddy)은 아일랜드 최대의 성자다. 로마 관리의 아들이던 파

트리시우스가 로마 몰락 당시 아일랜드 해적에게 노예로 끌려가 목동 패드레익(Padraig)

된다. 그는 프라승로 도주하여 기독교에 입문하고, 이후 아일랜드로 돌아와 너무나 잘 알려

진 켈트어와 문화를 이용, 아일랜드를 로마 다음으로, 그러니까 로마 바깥에서는 처음으로

기독교화시킨다. 그의 업적은 아일랜드인에게 더욱 깊이 신앙심과 긍지를 심어주는데, 그 성

자가 바로 패트릭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317(AD 461)'성 패트릭의 날'로 아일랜드 전국은 물론 전세

계 어디건 세 명 이상의 아일랜드인이 모인 곳에서는 1년 중 가장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더블린 중심가는 물론 아일랜드 전국 방방곡곡에서 밤새 축제를 열고, 세계에서 가장 번화

가인 뉴욕 맨해튼 5번가에서 여봐란 듯이 '녹색의 대행진'을 벌인다.

패트릭 축제의 특징은 녹색이다. 녹색은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민족의 색이고, 클로버는 아

일랜드의 녹색 상징이다. 이날이 되면 누구나 가슴에 클로버를 단다. 또 누구나 녹색 옷을

입고 녹색 옷이 없으면 하다못해 녹색 머플러나 녹색 손수건, 그것도 없으면 녹색 헝겊이라

도 걸치고 거리거리로 나선다. 청소년들은 머리칼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클로버다발을 흔들

며 거리를 누빈다. 초록색은 이날 전국을 뒤덮으며, 심지어 초록색을 씌운 피자를 먹기도 한

. 밤이 되면 그야말로 카니발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다. 술집마다 미어터지는 것은 물론,

술집 문밖에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자리가 없으면 맨바닥에 주저않거나 벽에 기대어 맥주

를 마신다.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떠들다 보면 어느새 새벽.

성자 패트릭은 거리 이름, 광장 이름, 건물 이름, 학교 이름, 어디든 없는 곳이 없다. 실제

로 아일랜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이 이름이 패트릭, 패트리셔일 정도로 1500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살아 있다.

아일랜드의 위스키는 순하고 부드럽다. 요즘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톡 쏘는 스카치보다 더

부드러운 맛 때문에 위스키를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일랜드 위스키를 대표

하는 것은 역시 성자 패트릭의 이름을 딴 패디스와 제임슨이다. 아일랜드는 워낙 주세가 높

아서 술집에서 위스키를 마신다는 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아일랜드 위스키는

스캋와 스펠링이 다르다는 점을 주의해야 하는데, 스카치는 Whisky이고, 아일랜드 위스키는

Whiskey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아일랜드인들의 사람을 받는 진짜 '국민의 술'은 맥주, 그것도 기네

스란 맥주다. 독일에는 맥주 공장만 해도 수천개가 있고 독일인 모두가 제각각 다른 맥주를

마시는 데 비해, 아일랜드인들이 그 분분한 개성과 자기 주장에도 불구하고 두말없이 공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네스 맥주다. 전세계적으로 140개 국가에 수출되고 있으며 가나,

레이시아, 자메이카에 현지 공장가지 설립할 정도로 세계화된 지네스 맥주는 우리에겐 별로

익숙하지 않은 흑맥주로 미지근하게 해서 마신다. 그토록 앙숙인 북아일랜드의 신교도와 구

교도는 물론 아일랜드 섬 남쪽 맨 끝의 마을, 그리고 아일랜드인이 사는 곳이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예외없이 기네스를 만든다. 이런 전국민 절대 다수의 고객화에 힘입어 기네스 맥

주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회사가 되었다. 기네스, 이는 단지 상표가 아니라 바로 아

일랜드 그 자체이기도 하다.

1770, 아서 기네스가 새로 개발된 흑맥주 포터 비어(porter beer)의 양조방식을 훔쳐가

더블린에서 '불법복제' 생산을 시작한 것이 이 맥주의 효시이다. 그때만 해도 그는 이것이

뒷날 세계 최대의 매출과 규모를 자랑하는 맥주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기네

스 맥주는 현재 매일 전세계에서 900(!) 자이 팔려나가고 있으며, 세계경제가 불경기다 뭐

다 몸살을 앓고 있는데도 매출은 꾸준히 성장세를 지속해 왔다.

1982년에 12,000만 아일랜드 파운드(2,400억 원)를 들여 생산시설을 첨단시설로 바

꾸었지만, 양조방식만큼은 1770년 그대로 자연원료만을 사용한다. 바로 이 변하지 않는 맛,

태어나서 처음으로 혀를 대어본 순간의 맛과 임종의 자리에서 대하는 그 맛이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이요, 고향이요, 청춘인 맛, 기네스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이런 것

이 아닐까.

기네스 회사가 막대한 이윤을 사회에 아낌없이 환원한 '이미지'도 국민적 사랑을 받는

한 이유이다. 기네스 가문에서 더블린 시장도 나왔고, 스티븐 공원을 통째로 기증했으며,

아일랜드인에게 소중하기 그지없는 성 패트릭 성당 보수공사 비용이 나온 것도 기네스 가

문의 호주머니였다. 또한 이 회사는 세계의 신기록, 신기록을 담아 발표하는 기네스북 편찬

의 스폰서로도 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

기네스 맥주의 열렬한 팬이자 무료 광고인(?)은 아일랜드인이 대문호로 존경하는 제임스

조이스, 그는 조금도 주저없이 기네스를 '국민의 술'로 지칭했고, 조이스 스스로도 더블린

중심가의 단골 술집에 나와 기네스를 마시며 명상에 잠기곤 했다. 이 술집은 지금도 '

임스 조이스의 술집'이란 별명으로 세계 문학 애호가들이 더블린에 오면 꼭 찾는 명소 중

하나다.

영국의 저명한 수상 벤저민 디즈레일리를 비롯하여,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스티븐슨 등

기네스의 팬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남극 탐험가 더글러스 모슨은 기네스의 맛을 잊지 못하

여 남극의 얼음 밑에 묻어 얼려 두었다가 조금씩 녹여 마셨을 정도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우스갯소리 하나. 한 사나이 앞에 스무 명의 아리따움 아가씨가 매혹적인 미

소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가자기 이 사나이가 아가씨들을 향해 돌진, 모두들 한옆으로 밀

쳐내 버리는 게 아닌가! 아가씨들 등뒤에는 한잔의 기네스가 있었던 것이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이미의 역사는 세계 각지, 특히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퍼져 사는

아일랜드계 후손들에게 한 가지 혼란을 안겨주었다. 허겁지겁 떠났던 이민길, 오늘날처럼 통

신과 기록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였는지라 고향에 대한 얘기가 점차 가물가물해져 버린 것

이다. 대충 어디 근처라는 것만 짐작할 뿐 정확히 어디인지 아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조상의 후예라

는 것만 알고 있었지 고향이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전자 분석이

라는 과학의 힘을 빌려 고향을 찾는 작업을 벌였고, 마침내 자신의 고향을 확인할 수 있었

. 1984, 그의 아일랜드 고향 방문은 전세계 아일랜드계 사람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

. 레이건은 고향이라고 확인한 고장(아일랜드 남부에 있는 티퍼레리의 밸리포린)을 찾아

그의 선조(라고 추정되는)들의 유적과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그후 해외의 아일랜드인들에게

고향 연고지 찾기 붐이 몰아닥쳤다. 매년 고향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푼 꿈을 안

은 실향 이민의 후예들이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서 떼거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붐은 아일랜드에 '조상 찾기 전문 에이전시'라는 새로운 직업을 탄생시켰고, 한 사람당

대략 100아일랜드 파운드(20만원)를 건지는 신판 봉이 김선달 사업으로 번창하고 있다.

이와는 조금 거리가 멀지만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넘나드는 아일랜드인들의 특성

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매년 616일에 펼쳐지는 블룸스데이 축제를 들 수 있

. 블룸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에 등장하는 청년.

1922년 조이스가 파리에서 발표한 이 소설 속에서 청년 블룸은 1904616일에 디델러

스와 함께 음산한 더블린 거리를 방황하는데, 조이스는 이들이 거닐던 더블린의 거리를 문

학적으로 잘 묘사해 놓았다. 이 소설이 발표된 뒤(조이스는 1912년부터 스스로 망명하여 파

리에 살고 있었다) 더블린의 청년들은 매년 616일이면 블룸이 걸었던 코스 그대로 더블

린의 거리를 떼를 지어 행진했다. 이 행사가 점차 세계적인 문학잔치가 되어 블룸스데이로

이름붙여지고, 세계에서 모여든 조이스의 팬들과 결코 적지 않은 관광객이 뒤엉켜 대대적인

축제 분위기를 연출해 내게 된 것이다. 블룸이라는 소설 속의 인물을 현실 속에 다시 되살

려내는 이 행사야말로 아일랜드인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아일랜드에도 집시가 있다? 믿을 수 없는 얘기지만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 대륙의 집시족

과 인종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고, 수백년 전부터 아일랜드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떠돌이 집단이다. 이들은 약 300가족으로 이루어져 전체 인원이 2만여 명에 달해 아일랜드

인구의 0.5%를 차지하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이들은 보통은 '방랑자들'로 불리며,

과거 이들의 생계수단을 빗대어 '땜장이들'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좀 속된 표현이다.

이들은 셸타어라고 하는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고, 한 곳에 정착해서 살지 않으며, 여기저

기 수십명 도는 많으면 100명까지 가족 단위로 떠돌아다니는데 1990년대 들어서는 이들 중

반 정도는 도시 빈민촌에 정착했다. 1960년대만 해도 이들은 마차로 떠돌아다녔으나 지금은

이중 적지 않은 수가 모터화된 밴을 이용하는데, 그건 아내와 아이들을 거리로 내보내 동냥

질을 시켜 번 돈으로 구입한 것이다.

이들의 유래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어렴풋이 짐작하기로는, 16세기에 영국이 신교도를

북아일랸드에 집단 이주시키면서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집과 재산을 잃고 쫓겨나 떠돌

리 신세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마차로 된 이들의 거처는 취사시설까지 갖추어져 있어서,

차가 다닐 수 없는 호젓한 산길을 찾거나 인적 없는 곳에서 즐기려는 관광객들의 숙소로 임

대되기도 하지만, 점차 쾌적한 시설을 찾는 유행에 따라 사라져 가고 있는 추세다. 아일랜드

정부는 이들을 정착시키고 문맹을 퇴치하려고 갖가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가지는 별

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채 '실패작'으로 끝난 상태다.

800년 압제의 굴레속에서

알프스 남족에서 라틴족이 로마를 세우고 있을 즈음, 알프스 북쪽은 켈트족의 세계였다.

그들은 중앙 유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지방으로, 일부는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로 건너가 원주민을 구성했다. 이들의 언어를 갈리아어(프랑스 지방에 살던

골족의 말)의 영어 표기인 갤릭이라 하여 현 프랑스의 브르통 지방,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서 쓰고 있다.

아일랜드의 역사는 다른 유럽 나라들의 역사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지리적 위치만 보아

도 금방 이해가 갈 것이다. 물론 선사시대의 유적도 발견되어 인간이 오래 전부터 살았음은

분명하지만, 이 섬에 최초의 문명을 이룩한 것은 대륙에서 건너온 켈트족으로, 서유럽 모든

나라들의 땅을 지배했던 로마인도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아서,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외세

의 침입을 겪지 않고 평화로운 켈트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놀라웁게' 이 외진

섬나라가 유럽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화했다는 사실은 아는이가 별로 없다. 로마제국이 국교

화한 이후 수천 Km나 떨어진 에이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파트리시우스라는 한

소년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소년은 브리타니아의 로마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누렸으나, 로마가 멸망하면서 침공해 온 아일랜드 켈트인의 노예로 끌려가게 돼, 목동의 일

을 해야 했다. 말하자면 강제노동인 셈이었다. 아일랜드의 노예생활에서 그는 켈트족의 언어

와 습성을 저연히 습득하게 되었고, 갈리아로 도망쳐 선교사 성 제르마누스로부터 기독교

교리를 베우게 된다.

AD 432, 이일랜드에 돌아온 그는 적국적으로 기독교를 선교하는 데 성공한다. 켈트인

의 언어와 습성을 속속들이 알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317일은 그래

서 아일랜드 최대의 기념일로 성 파트리시우스 즉 성 패트릭의 날이 되었다. 아일랜드 최대

의 성자이자 수호신인 성 패트릭, 애칭으로 패디는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름이기도 하며, 이 이름을 딴 위스키까지 있다. 이처럼 기독교의 역사가 다른 나라보타 깊

은 아일랜드인인 만큼 아일랜드인들의 카톨릭에 대한 믿음 또한 유별난 것이다.

이 평화로운 섬나라에 1169, 잉글랜드의 노르만 왕 헨리 2세가 침공해왔다. 헨리 2세는

1066, 영국을 정복한 노르만 왕 윌리엄의 후손으로 앵글로색슨족을 토벌하고 뒤이어 아일

랜드로 손을 뻗은 것이다. 이는 800년에 걸친 영국의 압제시대가 열리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영국 역사에 가장 많은 화제를 남긴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을 거부하는 로마 교황과 단절

하고 스스로 영국교회를 설립하였는데, 이 사건은 이를 부정하는 카톨릭 세력과 두고두고

피비린내나는 살육전을 벌이게 되는 도화선이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정벌한 헨리 8세는 카

톨릭을 절대 옹호하는 아일랜드에 성공회 세력을 심기 위하여, 스코틀랜드 신교도들을 대거

아일랜드 북부에 이주시켰는데, 이 지방이 바로 '영원히 풀리지 않는' 갈등의 현장 얼스터

, 즉 북아일랜드이며, 3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유혈충돌이 거듭되는 비극의 현

장이자 '증오의 바다'이기도 하다.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는 1650년부터인데올리버 크롬월에 의해 '영국의 영토'

로 합병되었다. 이로부터 290년에 걸친 길고도 고뇌에 찬 속국의 비참한 운명 속에서도 끈

질긴 독립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카톨릭 교도에 대한 탄압은 날로 가혹해져1691

년부터 1703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카톨릭교도를 공직에서 추방하는 등 혹독한 탄압을 하여

아일랜드인들의 가슴속에 영국인과 신교도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원한과 증오를 뿌리깊게 심

어놓았다. 카톨릭교도에 대한 탄압은 19세기에 이르러서 중단되었지만 아일랜드인의 증오

를 삭이기에는 너무 때가 늦어 있었다. 나라 잃은 비매, 이민족의 박해 등 아일랜드인들의

삶은 암흑과 비애뿐이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845년에서 1851녀에 걸쳐 아일랜드를

휩쓴 감자 대 흉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사자를 발생시켰고, 굶주림과 절망에 싸인 아

일랜드인들은 대대적으로 희망을 찾아 아메리카 이민길에 나서게 된다.

1900, 아일랜드에 결성된 신페인당은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지휘부가 되었고, 여기에 속

한 비밀조직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무자비한 테러, 암살을 독립운동의 방침으로 정하고 전

영국군 및 정부와 대결하였다. 끝없는 테러와 암살, 지루한 협상, 그칠 줄 모르는 아일랜드

민중의 봉기, 또다시 탄압의 악순환은 거듭되었고, 영국에 의해 불법단체로 류정된 신페인

당이 1918년 선거에서 승리, 아일랜드 의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더블린에 영국인에

의해 조정되지 않는 자치적 아일랜드 의회를 구성했고, 영국이 이를 당연히 불법으로 규정

하자,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전쟁으로 확산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아일랜드 독립전쟁이다.

협상 결과 얼스터 주를 제외한 아일랜드 전역의 자치권을 인정함으로써 전쟁은 막을 내렸

지만, 아일랜드가 최종적으로 완전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한 것은 1949년이었으니, 노르만

정벌 이후 무려 780년만에 영국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독립 즉시 아일랜드는 영연방을

탈퇴함으로써 영국에 대한 그들의 정서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문

제는 아직가지도 해결되지 않은 숙제로 남아있다. 불아일랜드 카톨릭교도들은 반드시 아일

랜드 공화국과 통합해야 하며, 신교도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짱을 절대 굽히지 않고 있고,

교도들은 통일될 경우 북아일랜드의 다수를 차지하던 자신들이 소수 이단자로 몰리게 되어

결국은 쫓겨날 운명이기에 한치도 양보하지 않는다. 영국은 영국대로 '뜨거운 감자'처럼 모

챡을 찾지 못해 고민이다. 영국군을 철수하면 소수인 카톨릭교도가 몰살당할 것이고, 그대로

머물러 있자니 IRA의 테러 암살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1994, 북아일랜드의 카톨릭교도들은 IRA가 테러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평화가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런던이 IRA와 협상할 수 없으므로 형제인 더블린

정부와 우회적으로 북아일랜드 평화안 협상을 벌이면, 북아일랜드 개신교들의 반대와 항의

로 번번히 무산되어 버리고 만다. 어쨌거나 결자해지의 원칙으로 역사에 '죄를 지은' 영국이

북아일랜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 그러나 해답이 없다. 북아일랜드 문제에

대한 영국의 기본정책은 두가지지만, 어느 한 가지도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뚜렷한 것은 없

. 북아일랜드 문제는 이처럼 복잡하게 뒤얽힌 것이다.

그러나 북아일랜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 너무도 깊이 뿌리박

힌 신,구교도간의 증오심이다. 이는 곧 이러한 비극의 역사가 있게 한 원인 제공자 영국에

대한 증오이기도 하며, 다른 민족에게 저지른 착취와 탄압의 죄악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는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역사 과정에서 심어진 좌절, 비애, 분노, 증오... 이러한 정서가

바로 오늘의 아일랜드인들의 사고방식을 형성하는 요소가 되어 수많은 시와 노래로 표출되

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 아일랜드는 1990년대 들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거

듭하고 있다. 비애와 증오에 찬 시선을 영국에서 돌려 좀더 넓고 트인 가슴으로 세계를 바

라보게 된 까닭일까?

 

포르투갈

망망한 수평선에 띄우던 희망과 슬픔

포르투갈은 유럽 대륙의 맨 서쪽에 자리잡은 나라다. 모든 해안선이 대서양을 접하고 있

, 단 한 뼘도 지중해를 끼고 있지 않아 지중해권 문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커다란 이베

리아 반도의 서쪽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스페인과 상당히 흡사하리라 생각하겠지만 기

질적으로 스페인과는 아주 다르다. 스페인은 흔히 정열의 나라로 불리는 만큼 국민들의 성

격이 격정적인데 비해, 포르투갈 사람들은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마냥 차다고 할

정도로 희로애락을 잘 드러내지 않는 내성적인 성격이다. 스페인과는 12세기부터 완전히 결

별했으니 역사도 문화도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다. 다른 유럽의 나라들과 다르게 포르투갈은

오직 스페인 한 나라하고만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즉 이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다는 얘기

. 이 점은 우리와 입지조건이 비슷하다.

그러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관계는 기원 후 1천여년의 역사가 서로 겹쳐 있는 이웃한 나

라인데도 상당히 분쟁이 적었던 편이다. 서로 따로 갈라선 뒤에도 해외 식민지를 둘러싼 갈

등을 제외하곤(그것도 타협을 통해 일찌감치 마무리되었지만) 두어 차례 전쟁을 치렀을 뿐

이니까. 어찌보면 포르투갈은 일찍부터 먼 바다를 향해 서쪽으로만 시선을 돌린 셈이다.

차피 대륙에 낄 처지도 못 되는데다가 대륙 국가들도 스페인을 건너뛰어서가지 포르투갈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으니, 대륙의 치고받는 싸움판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독자적인 발전

을 할 수 있었다.

한편 스페인의 시선은 계속 동쪽 대륙의 세력판도 동향에 쏠려있었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포르투갈과는 싸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가장 가까운 이웃이면서

도 그저 그렇고 그런 덤덤한 옆나라일 뿐이다. 비록 경제 면에서는 두나라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면서도 말이다.

포르투갈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으로 보녀 '풍요로운 남쪽 나가' 가운

데 가장 가까운 나라가 포르투갈이었고, 이 나라에서 생산되는 포트 와인은 영국인들에겐

소중한 기호품이었다. 그래서 중세 대부터 포르투갈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는 영국이었고,

포르투갈의 국력이 약화되고 영국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호츠투갈은 영국이 지중해로 진출하

는데 중요한 중간기지가 되었다. 이런 영국과의 밀접한 교역관계 때문에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도 포르투갈에겐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즉 나폴레옹이 세 번이나 군대를 보내 포르

투갈을 점령했지만 영국의 도움을 받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15세기 초부터 아프리카 북안을 비롯, 점차 희망봄을 돌아 인도, 중국, 일본까지 헤집고

다니던 포르투갈에게 스페인과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나라들은 그야말로 머나먼 저편의 존

재들이었다. 사실상 독일이나 스위스 같은 나라도 1970년대 들어 관광객이 부쩍 늘어나면서

처음 접하게 된 것이다. 비록 1950년대에 가난을 견데지 못해 대거 이 지역으로 일자리를

찾아 떠난 형제들로부터 얘기를 전해 듣기는 했어도 말이다.

포르투갈은 1500년에 브라질을 발견한 이래 이 거대한 땅덩어리를 320여년 간이나 식민지

로 소유하고 있었다. 브라질뿐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 방대한 식민지를 가

지고 있었고, 이 식민지는 수백 년 동안 포르투갈을 먹여 살려온 '젖소'였다. 그럼에도 식

민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부는 어느나라나 마찬가지지만 결코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했

, 왕실과 일부 특권층의 금고만 두둑하게 했을 뿐이어서 포르투갈인들은 항상 가난했다.

그 가난은 1950년대에 절정에 달하여 수십만의 포르투갈인들은 살길을 찾아 남의 나라 하

인으로 떠나야 했다. 다른 나라에선 이들을 해외노동자라 불렀지만 포르투갈에서는 이들을

이주민이라고 했다.

지금은 거의 귀국했지만 독일만 해도 한때 10만 명에 달하는 3D업종 종사자가 있었고,

금도 파리에는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인 포르투 시 인구보다 많은 포르투갈인들이 살고 있다.

화려한 식민지 경영 역사의 그늘 뒤엔 괴롭고 한숨 어린 포르투갈인들의 고된 삶이 있다.

이런 고난의 역사가, 40여 년에 걸친 혹독한 독재, 암흑정치의 역사가 오늘날 포르투갈인들

의 애수에 찬 정서로 녹아든 게 아닐까...

식민지 개척시대부터 해외이주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1900년에서 1954년 사이에 140

만 명이 해외로 떠났으며, 현재 외국에 나가 살고 있는 포르투갈인들은 포르투갈 전체 인구

30%에 해당하는 300만명이나 된다. 이들이 해외에서 송금해 오는 돈은 식민지를 상실한

포르투갈의 가장 주요한 외화 획득의 원천으로, 1987년에는 수입대금의 26%를 이 돈으로

결제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해외 역이민, 즉 되돌아오는 포르투갈인의 수도 만만치 않다.

포르투갈은 1974425일의 이른바 '카네이션 혁명'이 터지자 그나마 남아 있던 해

외 식민지를 모조리 상실하게 되었다. 일시에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가 독립한 뒤

그곳에 정착했던 포르투갈인들이 대거 '모국'으로 귀환했는데 이들을 수용할 공간이 없어

천막촌, 바라크촌 등 그야말로 난민수용소를 방불케 했던 것이 당시 포르투갈의 형편이었다.

아랍인들로부터 국토를 재탈환하기 위해 애쓰는 레콘키스타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도들에

게 고도 톨레도의 탈환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톨레도는 마드리드 이전의 수도였던 만

큼 상징적인 면에서도 중요했다. 이 전쟁은 십자군 전쟁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어서 기독

교 세계의 여러 왕국들, 즉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에서 지원군과 기사들을 파견했다.

톨레도 탈환에는 부르고뉴 가문 출신 기사 레이몽과 앙리의 활약이 두드러져, 레온 왕국

의 국왕은 감사의 뜻으로 두 기사에게 자신의 후궁 소생 딸 우라카와 테레사의 혼인을 맺게

하고 레이몽-우라카 부부에겐 갈리시아 땅을, 엔리케-테레사 부부에겐 포르투갈레 지방을

떼어주어 다스리게 했다.

'고요한 항구'라는 뜻에서 비롯된 포르투갈레는 뒷날 포르투갈이란 나라 이름이 된다.

1114, 엔리케는 세 살 난 아들 알폰소 엔리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고, 아내 테레사는 남

편의 뒤를 이어 아랍인과 용맹스러운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알폰소가 열일곱이 되던 해,

레사는 이웃 갈리시아 출신 페레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대로 두었다간 자칫 포르투갈이 갈

리시아의 수중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 알폰소는 어머니에게 정권을 자신에게 넘겨주고 정

치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걸이었던 테레사가 순순히 이에 응할 리가 없

었고, 결국 모자간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아들 알폰소가 이겨 어머니를 잡아가두고 코임브라

에서 포르투갈의 왕위에 올랐다.

그 뒤 아주 어려운 협상 과정을 거쳐 알폰소는 교황으로부터 국왕임을 인정받음으로써

(1179), 포르투갈은 공국에서 정식 주권 왕국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고, 알폰소는 포르투

갈 역사의 첫 국왕이 되었다. 왕조를 연 알폰소는 57년 간의 통치기간 동안 아랍인 퇴치에

혁혁한 무공을 세워 17개의 도시를 탈환하고 곳곳에 교회를 세우는 등 역사에 빛나는 전설

적인 군왕이다.

비련을 다룬 이야기 가운데 "로미오와 줄리엣"만큼 유명한 것은 드물다. 그러나 이것은

픽션이다. 그럼에도 세상 젊은이들의 심금을 그토록 울리는 것은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 때문일까. 포르투갈판 "로미오와 줄리엣""페드로와 이네스"는 지금도 포르투갈인

이면 누구나 애달파하는 러브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다.

알폰소 4세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페드로는 스페인 나바라 왕국의 공주 콘스탄체와 혼인했

. 그런데 그녀가 친정에서 데려온 시녀 가운데 '불행하게도' 너무도 아름다운 이네스가 있

었다. 이네스에게 반한 페드로는 아내를 멀리했고, 결국 그녀는 아들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

는데, 그가 뒷날 페르낭 1세가 된다. 이것은 대단한 궁중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교황은

포르투갈 왕가에 스페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페드로와 이네스의 결혼을 허

락하지 않았고, 왕 알폰소는 궁중의 불행을 몰고 온 장본인이라 하여 부하들을 시켜 코임브

라에서 이네스를 죽여버린다. 사랑 때문에 이네스는 애처롭게 죽어간 것이다.

2년 뒤 왕위에 오른 페드로1세는 부왕의 명령을 받고 이네스를 죽이는 데 참여한 신하들

을 모조리 도륙해 버린다. 그리고 부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녀와 비밀리에 혼인

식을 올렸으므로 비록 죽었지만 당당한 왕비의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공포한다. 그리고는

알코바사에 포르투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묘역을 지어 비운의 이네스를 안치했

. 그 후 페드로는 세상을 떠날 때 이네스와 눈길이 마주치는 곳에 자신의 관을 안치해 달

라고 했다.

페드로와 이네스의 러브스토리는 두고두고 심금을 울리는 화제가 되었고, 끊임없이 소설

과 시의 소재가 되었으며, 연극으로 공연될 정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르지 않는 예술

의 샘이 되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만 이탈리아에서 이를 노래한 시와 가곡이 127개나 된다

니 사랑이야기는 언제나 베스트셀러 주제인가보다.

1932년부터 1968년까지 36년간 철권 독재정치를 펼쳤던 살라자르의 기본 정책은 우민정책

이었다. 인텔리 수를 줄이기 위해 교육분양 투자를 하지 않는 한편, 국민의 고나심을 정치로

부터 돌리기 위해 3F 정책을 폈다. 이는 football, fado(유흥), fatima(파티마)였다. 파티마란

무엇인가?

무어(아랍)인들과의 전쟁이 한창일 때 '무어인 킬러'라는 별명을 가진 용감한 기사 곤살

로 헤르밍게스는 아름다운 아랍 왕녀 파티마를 약탈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도튀된 그는

사랑에 빠졌고, 파티마도 용감한 그를 사랑하게 되어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파티마는 사

랑을 위하여 이슬람교를 버리고 오우레아나란 영세명으로 기독교인이 된다. 헤르밍게스는

파티마가 죽은 뒤 아내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그녀의 장례를 지낸 곳을 파티마라 명명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일화는 그다지 희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파티마가 갑자기 세계적인

이복을 끌게 된 것은 이곳에 살던 세 목동이 '태양보다 빛나는 모습의 성스러운 여인'

목격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부터이다. 성모 마리아가 파티마의 모습으로 현신했는 것이

.

이 파티마의 현신은 다섯 달마다 매번 13일에 반복되었다는데 그해 10, 그러니까 세 번째

현신이 있던 날에는 전국에서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다섯 달마다 파티마는 '기적'을 기다리는 신도들의 발길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드디어는

1928, 순례자를 위한 파티마 순례교회가 완성되었다.

매년 5에서 10월 사이에 리스본에서 포르투에 이르는 주요 도로는 파티마를 찾는 순례객

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지금까지 모두 여섯 번에 걸친 성모 마리아의 파티마 현신이 확인되

었다고 하는데, 최초로 이를 목격했다는 세 소년은 현재 이 파티마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

그로부터 파티마는 곧 포르투갈 카톨릭 신앙의 중심이자 상징이 되었으며, 현재는 세계 3

카톨릭 순례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루르드, 스페인 북서부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

포스텔라와 더불어 파티마는 포르투갈의 최대 순례지일 뿐아니라 전세계 카톨릭 신자들이

생애에 꼭 한번은 찾아봐야 하는 순례지가 된 것이다. 살라자르가 펼쳤던 3F 정책 가운데

하나인 파티마란 국민을 종교에 열중케 함을 뜻한다.

바다를 바라보면 슬퍼지는 것일까. 그것도 저 건너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망망한 대해

... 지중해는 수평선 너머에 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기에 그 수평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사람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는 바다였다. 그러나 세상의 끝이라고 믿어돈 대서양을

바라보던 포르투갈인들에게 바다는 한번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세계요, 영원의 세

계였기 때문에 그들의 가슴에 더할 수 없는 허망함과 슬픔을 안겨주었는지 모른다.

그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온 포르투갈인들의 기본 정서는 바로 사우다데(슬픔)이다. 이 표

현은 이미 대서양 너머 신대륙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거의 200년 전인 14세기에 두아르

테 왕의 기술에도 나타난다. 슬픔, 그리고 한없는 그리움..., 우울, 동경, 이룰 수 없는 사랑...

이런 정서는 세계 어느 민족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지만, 특히 포르투갈인들에게는 두드러지

게 나타난다. 다른 민족들이 한데 어울려 난리를 치르는 동안 고즈넉한 눈길로 망망한 바다

를 바라보던 민족이어서인가... 사회적 정치적 격변기인 19세기들어 일군의 시인들이 포르투

를 중심으로 사우다데에 대해 본격적인 시화작업에 들어가 슬픔을 주제로 하는 일종의 신종

시의 장르인 사우두시스무가 탄생하게 된다.

포르투갈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네 개의 도시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리스본, 코임브라,

브라가, 포르투. 리스본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포르투갈의 수도이며, 코임브라는 포르투갈

제일의 대학도시다. 최초의 대학은 1290, 리스본에 설립되었으나, 1308년에 코임브라로 이

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거의 700년 가까운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푸르투는

말 그대로 항구라는 말에서 유래한 항구도시로, 이 지방의 그 유명한 포트 와인의 집산지이

자 포르투갈 최대의 항구도시, 산업도시이다. 브라가는 북쪽에 자리잡은 종교도시로 포르투

갈 카톨릭의 본산이다. 그래서 포르투갈 사람들은 말한다. "포르투갈인의 꿈, 그것은 코임브

라에서 공부하고, 브라가에서 기도하며, 포르투에서 돈 벌어, 리스본에서 사는 것이다."

사우다데가 리스본과 코임브라에서 음악적으로 발달한 것이 바로 포르투갈의 문화적 대명

사처럼 된 파두이다. 파두의 기원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사람에 따라서 그 설이 다

제각각이다. 아랍인의 유산이라고도 하고 멀리 떠난 선원들이 고향을 그리며 부르던 노래

라고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포르투갈인들의 사우다데

정서에 민속적이든 인위적이든 멜로디가 붙어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파두는 19세기에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코임브

라의 대학생들이 사우두시스무에 느리고 슬픈 멜로디를 붙여 사우다데를 노래한 것이고,

하나는 리스본에서 뱃사람들을 중심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사우다데에 곡을 붙여 노래

한 것이다. 그러니까 코임브라 파두는 지적이고 저항적인데 비하여, 리스본의 파두는 서민적

이고 민속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쨋든 두 가지 모두 독재정권, 사회혼란, 특권계층의 부와

권력독점 등의 억눌린 서민들이 어떻게든 감정 표출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것이 바로 파두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보면 정확하다.

19세기 초부터 서서히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했으면서도 주변 문화로 맴돌던 파두가 포르

투갈 국민문화로 자리잡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자면 위대한 국민가수 두 사람을 반드

시 언급해야 한다. 아말리아 루드리게스와 주제 아폰수.

아말리아 루드리게스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열두 줄 포르투갈 기타에 맞춰 40년 간 파

두를 불렀다. 그녀는 전 포르투갈의 우상이 되었으며, 그녀의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뉴욕

링컨 센터에, 파리의 올림피아 극장에 울려퍼질 때 그녀는 이미 포르투갈의 살아 있는 상징

이자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녀가 부르는 슬픔과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항거는 독재 정권

을 휘두르던 살라자르에겐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국민들을 정치불감증으로 몰기 위해 3F

정책의 하나로 파두를 국민들에게 권장했던 그였으니 이 얼마나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주제 아폰수는 파두의 고급화, 정형화에 반대하여 민중 속으로 뛰어든 혁명적 성향이 강

한 파두 가수다. 코임브라 대학의 학생이었던 그는 학생들이 주로 모이는 바에서부터 파두

를 노래했다. 그는 자신의 파두를 발라드로 불렀고, 느리고 슬픈 멜로디에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 압제자에 대한 비판과 민중의 고통을 실어 노래했다. 살라자르 독재시대에 그의 노래

는 판매 금지되었으며, 몰래 복사해서 돌려 듣는 일종의 혁명선동의 노래처럼 되었고, 그 자

신도 수차례 감옥에 드나들었다.

아말리아 루드리게스가 파두를 예술화, 클레식화하여 그 격을 한단계 높였다면, 주제 아폰

수는 파두를 민속화 대중화하여 민중의 의식을 계몽하는 역할을 했다 할 수 있다. 리스본의

가장 유명한 파두 공연장 이름이 아말리아 루드리게스인 것도, 1974425, 혁명봉기의

신호탄으로 주제 아폰수의 파두를 라디오에서 방송했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하기 훨씬 이전부터 포르투갈은 이미 활발하게 해외에

진출, 아프리카 대륙에 무궁무진한 영토를 차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상태였다. 이런

지리적 발견에 스페인이 군침을 흘리지 않을 리가 없었고, 포르투갈이 개척해 놓은 땅에 심

심하면 나타나 집적거리기 일쑤였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포르투갈이 그냥 있을 리 만무했

, 곧장 교황을 찾아가 스페인의 부당함을 고발하고 제재를 요청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우스 5세는 중재안을 내서 1455, 이미 포르투갈이 발견한 땅과

앞으로 발견될 땅에 대해 카나리아 군도 이남의 부분을 포르투갈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결정

을 내렸다. 사실상 아프리카 대륙에 대한 포르투갈의 기득권을 인정한 셈이다. 그러던 차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니, 신대륙에 대한 분쟁은 피할 길이 없었다.

당시의 스페인으로서는 새로 발견한 신대륙을 자신의 소유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고,

르투갈로서는 아프리카에 대한 기득권이 중요한 상황이었던 만큼 교황 알렉산더 6세는 양측

의 입장을 감안하여 1494년 스페인 토르데시야스에서 협상안을 제시한다. , 경도 46도를

경계로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한다는 안이다. 이 경계손은 지금의 아조레

스 제도의 100마일 서쪽인데, 양쪽이 이 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스페인은 아케리카를 포르투

갈은 전체 아프리카 대륙은 물론 인도, 중국, 일본까지도 그들의 영토권에 넣게 되었다.

러니 우리나라도 모르는 사이에 포르투갈령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런데 선견지명이 있었던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포르투갈은 교황에게 끈질긴

로비를 거듭하여 아조레스 제도 서쪽 100마일 경계선을 350마을 서쪽으로 옮기는 데 성공했

,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에 금긋는 데 몇백 마일쯤 물러선다고 크게 손해날 것이 없을 것

으로 생각했던 스페인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기 1500, 페드로 카브

랄은 브라질을 발견한다. 아조레스 제도 서방 350마일 경계선은 브라질을 지나고 있지 않은

! 이래서 브라질은 동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으로 인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일한

포르투갈의 영토가 되었던 것이다.

포르투갈을 여행하다 보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러나 포르투갈에서만 볼 수 있는

희고 푸른색의 타일 그림이 눈에 띤다. 마치 퍼즐처럼, 모자이크처럼 커다란 벽면의 그림이

되 조각조각의 타일에 각 부분을 손으로 그려 구워낸 독특한 미술품이다. 아줄레조스라고

불리는 이 양식은 무어인들이 물려준 유산이다. 아줄레조스는 원래 아랍어인 아즈-줄라이에

서 유래된 말로 '작은 돌', 즉 작은 타일을 일컫는다. 네모난 흙 위에 흰색을 칠하고 그 위

에 그림을 그린 다음 유약을 칠해 구워내는 타일 문화는 아랍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크게

발달해 신전이나 궁전을 장식하는데 사용했다.

이슬람 교리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잇으므로 아랍인들은 주로 기하학적 문양이나 새와

화초 등 '비우상적' 대상만을 디자인 요소로 사용해 왔다. 그리고 하나의 문양을 여러 개 타

일로 복제하여 벽을 계속적 반복적 문양으로 장식했다. 이 기술은 지금까지 스페인에 그대

로 남아 스페인의 독특한 문화의 하나로 건축 장식에 널리 이용되고 있으며, 상당히 응용된

형태로 건축의 귀재라는 안토니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타일은 색채가 다양한 형태로 발달된 데 비하여 포르투갈의 아줄레조스

는 거의 대부분이 흰색 바탕에 청색 그림을 그린 청백 그림 타일이다. 16세기부터 이 장식

이 유행하기 시작하여 포르투갈 어느 곳에서나 청백의 타일로 된 아줄레조스를 만나볼 수

있다. 성당의 외벽을 비롯, 개인 건물의 벽과 공공장소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는

아줄레조스는 포르투갈 양식임을 대번에 알 수 있는 징표이기도 하다.

우리가 마시는 포도주 병마개를 딸 때, 그 코르크가 약간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부 포츠

투갈산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코르크 마개는 코르크 나무의 껍질을 통째로 잘라 만드

는 것이다. 포츠투갈 전역에 걸쳐 자라는 코르크 나무들은 전세계 코르크 수요의 38%를 충

당하고 있다. 코르크 나무 줄기를 약 1m 간격으로 몇 줄로 나누어 벗겨냈는데 한 번 벗긴

5년이 지나야 다시 벗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포르투갈을 여행하노라면 마치 갈색 줄

기에 흰색 띠를 두른 듯한 코르크 나무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띠를 두른게 아니라 껍

질을 벗겨낸 자국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식당에서 술을 주문할 때는 맥주냐 소주냐 하는 식이었다.

러나 요즘엔 어느 식당엘 가도 맥주를 주문하면 반드시 서너 종류를 열거하며 고르라고 한

. 소주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우리의 음주문화도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럽의 커피 문화가 그렇다. 16세기에 커피가 터키를 통하여 유럽에 유입된 이래 나라마다 다

양한 커피 문화가 발달하였지만, 커피의 나라 브라질을 식민지로 경영했던 탓인지, 포르투갈

은 특히 커피 문화가 다양하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게르만권의 커피 문화는 이에

비하면 비교적 단순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북유럽에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두말없이 원하는 커피를 가져다 주지

,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선택의 폭이 다양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커피'를 주문하면 우리

로서는 커피 원액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에스프레소가 간장종지만한 잔에 3분의 1쯤 담겨

나온다. 물론 각설탕과 함께. 카푸치노는 이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것으로, 커피에 우유

를 섞고 뜨거운 증기로 거품을 낸 것이며, 필터 커피에 우유를 탄 '보통 커피'는 카페 콘라

테라고 한다. 프랑스의 카페오레, 스페인의 카페 콘 레체가 그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것은 마치 요즘 우리나라 식당에서 종류를 안 밝히고 소주 주세요, 맥주

주세요 하는 식이어서 카페나 바 주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포르투갈에서는 에스프레소를 비카라고 부른다. 사람마다 마시는 커피의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에 그 커피 종류는 그 사람의 기호와 성격을 나타낸다. 좀 멋을 부리려 드는 사람은 이

탈리아노를 주문한다. 한 모금에 홀짝 마실 수 있는 작은 잔에 담긴 이 검은 액체는 멋지게

보일 수는 있어도 익숙지 않은 사람이 마셨다가는 밤새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릴 각오를 해

야 될 정도로 독한 것이니 주의해야 한다. 물론 설탕을 듬뿍 쳐 마시지만, 포르투갈에선 어

떤 커피든 블랙으로 마시는 경우가 극히 드물어 설탕을 치지 않고 마시는 이는 다시 한번

쳐다보기 일쑤다. 이보다 연하게 마시려는 사람은 카리오카 데 카페를 주문한다. 비카에 적

당히 물을 타 희석시키는 것으로, 멋부리려고 그냥 '카리오카'라고 주문하면 레몬차에 물 탄

게 나오니 반드시 카리오카란 말 뒤에 '데카페'를 덧붙여야 한다.

조금 다른 맛과 뉘앙스를 지닌 케이오는 비카보다는 덜 독하지만 색깔은 카리오카보다 더

진하다. 가장 안전하게 마셔오던 필터 커피를 주문하려면 그냥 '필터카페', 즉 카페 데 필

트로를 주문하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국제적 수준의 호텔이나 레스토랑이 아

니면 얻어 마실 수가 없다.

우유란 존재는 커피를 부드럽게 마시려는 이들에겐 고맙기 그지없는 존재다. 에스프레소

커피, 즉 비카에 우유를 친 것을 주문하려면 가로토를 알아야 하고, 가장 연한 커피를 마시

려면 갈라우를 주문해야 한다. 갈라우는 우유 80%, 비카 20%의 비율로 되어 있으니 말이

. 이것이 우유 맛 때문에 커피 맛이 거의 안 난다 싶으면 카페 콩 레이테를 주문한다.

40%, 우유 60%로 커다란 커피잔에 나오니, 이게 바로 포르투갈식 카페오레인 셈이다.

한밤중에 커피를 즐기려는 이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를 주문하면 된다. 그저 코페이나도

또는 상품 이름인 네스카페를 주문하면 즉시 어느 슈퍼에서나 살 수 있는 인스턴트 캔커피

를 숟가락으로 퍼 잔에 떨어내고는 우유를 섞어서 마구 저어 거품이 일게 한 뒤 물을 부어

당신 앞에 놓아준다. 물론 슈퍼보단 몇 배의 비싼 가격으로.

머나먼 수평선 너머로 첫 돛을 올리다

포르투갈이라는 나라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097년이다. 그 이전의 역사는 스페인과 겹치

므로 지도를 이렇게 보아야한다. 포르투갈을 흐르는 두 개의 민족 젖줄! 리스본을 끼고 흐

르는 테주 강, 그리고 포르투에서 대서양과 만나는 도루오 강. 포르투갈의 역사는 도루오 강

에서 시작된다. 또 우럽의 서쪽 긑에 자리한 위치조건으로 중앙무대였던 지중해에 뛰어들지

못한 대신 멀고 아득한 미지의 세계로 눈을 돌렸다는 것이 포르투갈 역사의 특징이다.

BC 218년에 건너온 로마인이 물러간 뒤, 북방에서는 게르만족이, 동방에서는 반달족이 내

려와 나라를 세우고 기독교화되어 갔다. 그러나 711,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이슬람교도인

무어인들은 순식간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였는데, 더운 지방에서 살던 습관으로 도루오

강 이북은 '쓸모없는' 땅으로 손을 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북부 지방은 기독교문화권이 유

지될 수 있었고, 바로 이 지방에서부터 아랍인을 축출하고 기독교 문화를 되찾기 위한 400

여 년에 걸친 국토수복 전쟁이 일어난다. 이 전쟁은 718년에 시작되어 포르투갈 지방은

1250년에 아랍인을 완전 축출함으로써 스페인보다 240년이나 앞선다.

아랍인과의 전쟁 당시 프랑스 브루고뉴 가문의 용감한 기사 엔리케가 큰 무공을 세우자,

이에 감동한 왕은 국토 일부와 딸을 주어 공국을 건설토록 했는데 그 지명이 도루오 강 어

귀의 포르투칼레였고, 이로써 역사상에 포르투칼레란 나라가 1097년에 최초로 등장한다.

르투칼레 공국을 세운 엔리케 대공이 죽자 왕비 테레사와 아들 알폰소 사이에 권력쟁탈 전

쟁이 벌어지는데, 모자간의 전쟁 끝에 아들이 어머니를 꺾고 1139년 알폰소 1세로 왕위에

오르니, 포르투갈은 왕국이 되었고, 1179년 교황도 공인함으로써 포르투갈은 스페인과는 독

자적인 새 역사를 시작한다.

포르투갈은 위치로 보아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풍요로운 지중해, 남유럽과 가장 가까운

나라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무역이 활발했고, 이는 포르투갈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포르투갈은 건국 이래 지금 까지도 영국과 무역 등 여러 면에서 가장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

고 있다.

포르투갈이 머나먼 저 수평선 너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항해왕'이란 별명을 가

진 엔리케왕자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지중해가 이탈리아 여러 나라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부가 넘치는 동방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를 위해

선 훌륭한 배와 항해술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닫고 대규모 조선소를 짓고 세계 최초의 본

격 항해학교를 설립하여 포르투갈이 스페인보다 거의 반세기나 앞서 해외로 진출할 수 있도

록 하였고, 나아가 방대한 식민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세계로 향한 진출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포르투갈은 방대

한 브라질을 식민지로 얻었고,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였다. 식민지 경영, 동방무역으로

부터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부로 마누엘 1세 치하의 포르투갈은 역대 최고의 황금시대를 구

가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우는 법! 마누엘 시대 이후의 포르투갈은 계속해서 사양길을

걷는다. 이웃 스페인의 강성함 때문인가?

1580, 마누엘 1세의 뒤를 이은 엔리케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는 마누엘 1세의

처가 쪽 후손 가운데 한 명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중 둘은 포르투갈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전 유럽을 호령하던 스페인의 국왕 펠리페 2세였는데, 해외 식민지 보호 등 강력한 스

페인의 도움이 필요했던 포르투갈은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 왕 펠리페 1세로 추대, 이때부

터 포르투갈은 스페인의 60년 간 '신탁통치' 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아르마다의 궤멸과 스페

인 세력의 몰락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왕위분쟁을 야기했고, 1640, 후앙 6세가 스스

로 포르투갈 왕임을 선엄함으로써 18년에 걸친 포,스 왕위탈환 전쟁이 벌어진다.

스페인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포르투갈은 절대왕정이 자리를 잡아갔는데, 화려한

왕정의 그늘에서 영국과의 무역적자, 웅장한 성당과 왕궁 건축으로 국가재정은 파탄이 나고

국민들은 도탄에 빠지는 경제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18세기 주제 국왕 때 재정을 맡은 폼발

백작은 대대적인 경제 개혁을 단행한다. 그는 수입을 억제하고 국내 산업을 진흥시키는 한

편 전매제도를 도입하여 주요 수출품을 국가가 관리함으로써 국가경제를 크게 개선했고,

1755년 대지진으로 완전 파괴된 수도 리스본을 재건설, 오늘의 모습으로 이루어낸 포르투갈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거세 암살 기도,

동이 잇따랐고 이에 대한 탄압이 반복되었으나 1777년 왕위에 오른 마리아 1세는 그를 정부

에서 축출, 개혁정치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포르투갈에도 태풍을 몰아왔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대

륙봉쇄령을 내렸으나, 대영무역에 의존하는 포르투갈이 이를 따를 수는 없는 일, 결국 프랑

스군은 세 번에 걸쳐 포르투갈을 점령했고 왕실은 황급히 브라질로 도피했다. 웰링턴 장군

에 의해 프랑스군이 쫓겨난 뒤의 프랑스는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내정에 사

사건건 간섭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국왕인 후앙 6세는 1821, 브라질에서 돌아왔으나

황태자 페드로는 그대로 남아 182297, 브라질 독립을 선언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

.

최대 식민지였던 브라질의 상실은 포르투갈 경제에 치명타였다. 여기에 프랑스 혁명이 몰

고 온 자유주의 물경은 포르투갈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었고, 1820년에서 1910년에 이르

는 약 100년 가까운 세월은 온통 혼돈과 무질서의 연속이었으며, 국력은 하루가 다르게 쇠

락해져 가기만 했다. 1910,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왕조의 폐지를 선언하고 공화국을 선포한

. 프랑스, 스위스에 이어 세 번째 공화국이 유럽에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제1공화국 시대는 말 그대로 어둠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16년 동안 정권이 45

번 바뀌고 15번의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1926년 공산당 탄압을 병분으로 내세운 고메스

장군이 일으킨 군사쿠데타는 48년에 걸친 철권 독재시대의 서막이었다. 1928년 코임브라 대

학 교수인 살라자르가 경제 장관으로 발탁된다. 그는 프랑코와 더불어 20세기 최장 독재권

력을 누린 인물이다. 초창기의 장관시대, 그는 약간의 경제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아주

간단한 정책으로, 1932, 수상에 취임한 그는 '조국근대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이듬해에

헌법을 개정, 그의 영구 집권과 독재의 길을 열었다.

살리자르는 이웃나라의 프랑코가 그렇듯 포르투갈 국민에게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외교에서 그는 교묘한 줄타기 정책으로 나치든 연합국이든 모두와 친교를 맺는 방식으로,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중립에 머물러 전쟁의 피해에서 피해 갔다. 그러나 국민을 어리석게

만드는 우민정책을 펴 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국내 산업 육성 대신 농업에 전념했으며, 곡가

경제를 아프리카 등 식민지에서의 수입에 의존하다보니,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들어 살 길을 찾아 포르투갈인들은 해외로 일자리를 얻으러 대량 이주했고,

들이 고향에 부치는 돈이 포르투갈의 주요 외화획득 원천일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

고 식민지시대도 종말이 다가와 1960년에만 17개 나라가 아프리카에서 독립하고 세계 곳곳

의 식민지가 떨어져 나갔으며, 독립운동을 막아보려고 식민지 전쟁에 쏟아붓는 막대한 돈도

국가경제에 더욱 부담이 되었다. 1968, 살리자르는 36년 간의 철권독재자 답지 않은 병들

고 초라한 모습으로 권좌를 떠났다. 그러나 독재정권이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1974425030, 라디오에서는 정부가 금지시킨 반정부 가요가 계속 울려퍼지

고 있었다. 이를 신호로 혁명군들이 일제히 수도 리스본으로 진입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익쿠데타가 48년 극우정권을 무너뜨리는 순간이었다. 시민들이 손에 손에 카네이션을 들고

나와 군인들에게 꽂아주며 환영했다. 그래서 '카네이션 혁명'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오직 하나 남은 식민지 마카오마저 1999년에 반환하게 된다. 포르투갈은 600년 가까

운 식민지 경영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역사의 막을 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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