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이 차라는 음료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중엽이었다. 1610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
에 전파되었고, 차 마시는 유행은 네덜란드를 비롯해 스칸디나비아 제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로 퍼져
나갔다. 차는 특히 영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차가 영국에 도입된 것은 1657년이었고 그로부터 3년 후 일
기 작가 새뮤얼 핍스는 난생 처음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칼 브라간자 가 출신
의 캐더린 왕후는 1662년 영국 왕실에 처음으로 차 마시는 풍습을 도입했다. 그리고 1세기가 지난 뒤
베드포드 공작 부인이 일상의 '무기력한 기분'을 치료하기 위해 매일 5시에 차와 케이크, 과자를 내놓아
티 타임의 창시자가 되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오후의 홍차' 시간에는 '티 가운'이라고 부르는,
레이스로 화사하게 장식한 긴 드레스를 입고 아름다움을 겨루기도 했다. 허리를 잘록하게 강조하는 이
브닝 가운과 달리 티 가운은 허리를 느슨하게 하여 얼마든지 먹어도 표나지 않도록 한 것이 특색이다.
요즘에도 잉글랜드 지역의 어느 찻집에서나 오후의 홍차를 주문하면 주전자 가득 뜨거운 차를 가져다
준다. 오늘날 영국 사람들은 아침 식사 때나 별도의 티 타임에만 차를 마시며, 저녁 식사 시간에는 차를
마시지 않는다. 18세기 초엽 유럽에서는 녹차에 보통 설탕과 우유를 넣어 마셨다. 이 무렵 차는 상류 사
회에서 '생명의 피'로 불려질 만큼 매우 귀한 것이었고, 신분에 따라 마시는 종류와 방법도 달랐다. 영국
의 부유한 귀족들이 초벌로 우린 차를 마시고 나면 하인들이 찻잎에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 재탕 차를
만들었으며, 이렇게 우려 낸 찻잎은 마지막으로 뒷문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사 갔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이 되자 사람들의 입맛은 녹차보다 떫은 맛이 덜한 홍차로 급격히 쏠렸고, 이후 홍차가 서양인들
찻잔의 주인공이 되었다.
차가 인기를 끈 이유는 최음제로 잘못 알려졌던 대 있었다. 차의 유행에 놀란 당시 성직자들은 차가
'건강과 도덕과 공공 질서에 위해로운 것'이라고 맹렬히 비난했지만, 그 비난은 오히려 차에 대한 관심
을 증폭시켰다. 차가 유행한 또 다른 이유로는 야채가 부족했던 당시의 식문화를 들 수 있다. 야채 부족
으로 인한 영양 결핍을 차를 통해 보충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끓여 마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버
터 바른 빵에 찻잎을 얹어 먹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차를 마시는 습관은 19세기 중엽 영국의 서민 사이
에 널리 퍼졌다. 홍차가 영국인들에게 절대 불가결한 음료가 된 것은 18세기부터이다. 그러던 것이 19세
기 중엽으로 접어들면서 서민 사이에 향기 높은 햇차 마시기 유행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차의 본
고장인 중국으로부터 햇차를 실어 나르는 배들 사이에 경쟁이 붙었는데 홍차 수입과 관련하여 '커티 사
크' 이야기가 유명하다. 1869년 11월 수에즈 운하 개통 무렵 '커티 사크' 호가 건조되었다. '커티 사크'는
엄청난 중개 무역 이익을 보장해 주는 차의 운송을 위해 만들어진 선박으로 당시로서는 위용을 자랑할
만한 크기였다. 그 이름 또한 로버트 번즈의 시 <샌터의 탬>에 나오는 마녀 내니가 입었던 옷에서 유
래한 것으로, 빠른 속도를 기대하며 작명한 것이다. 그런데 이 '커티 사크'는 무역풍을 받아야 항해가 가
능한 범선이었던 관계로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고 부득이 희망봉을 우회하는 항로를 취해야만 했다. 그
결과 커티 사크가 상해-런던 간을 운항하는 데 120일이 소요됐다. 수에즈 운하를 경유해서 42일 만에
운항하는 증기선들과는 도저히 경쟁이 되지 않았고, 그리하여 '커티 사크'는 영국 최후의 범선으로 슬픈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미국에서 차는 영국에서처럼 널리 보급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미국 역사에 뚜렷한 자국을 남겼다. 19
세기 초엽 미국 중상류층 사회에서는 영국의 티 타임을 흉내낸 티 파티가 유행하였다. 처음에 티 파티
는 여성들의 친목을 위한 모임으로 출발했으나 점차 젊은 남녀들의 대화 모임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티
파티의 형식도 여성들끼리 서서 대화를 나누는 형태에서, 여성들이 둥글게 벽을 등진 채 의자에 앉고
남성들이 그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거리며 마음 맞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모양으로 변했다. 이런 티
파티 외에도 상류층 가정에서는 티 타임을 즐기는 게 보통이었다. 차는 수입품이었기에 가격이 비쌌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차는 매우 귀한 선물로 여겨졌다. 하지만 가난한 서민들 중에는 차가 무엇인지 모
르는 사람도 있었다. 19세기 중엽 발행된 미국의 월간 잡지 <하퍼스 매거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
려 있다. '한 시골 부인이 도시에 사는 상류층 친구로부터 500g의 차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데 그 부인
은 그것이 새로 나온 야채인 줄 알고 몽탕 삶아서 저녁 식탁에 내놓았다. 물론 건더기만 건지고 물은
죄다 버렸다.' 차는 미국 독립 전쟁을 촉발시킨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
턴 시민들은 차에 대한 무거운 세금에 항의하여 항구에 정박중이던 영국 상선들을 습격, 차 상자 342개
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이 사건은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런데다 차는 미국적인 제도 중
의 하나인 슈퍼마켙의 발달에도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슈퍼마켓의 원조인 대서양·태평양차회사(The
Great & Pacific Tea Company)는 차, 커피, 향료 등의 주요 품목을 대량으로 구입함으로써 거기서 얻
어지는 이익의 일부를 소비자에게 돌려 줄 수 있으리라는 전제 아래 1869년에 설립되었다. 이 A&P 슈
퍼마켓들은 정면 입구 앞 인도 위쪽에 차(Tea)를 뜻하는 T자 모양의 거대한 간판을 걸어 놓아 사람들
의 눈길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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