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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난 그 동안 영화에게 50가지 삶의 길을 물었다.

by FraisGout 2020. 7. 19.

1, 브리지가의 명예를 보는 순간.


잭 니콜슨이 그러한 야비한 웃음을 지으면서 캐더린 터너에게 다가간 장면을 시작될 무렵이었을 것이다. 수줍한 여인이 살인청부업자라고 밝혀질 때 남자의 웃음을 걷히고 무섭고도 사랑스러운 감정이 싹튼다. 누군가 내게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떡할 것인가를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겠다. 사랑하는 사람이 두려워지면,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든다. 



2. 죽음의 알 수 없는 감정

나는 19살 이 후 쭉 혼자 살아왔다. 멋지게 말하면 “부모의 지원으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독립”이고 심하게 말하면 “뛰쳐나와 막살고” 싶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2년 점점 굳어져가는 간 때문에 얼굴전체가 노랗게 변했고 어느 밝은 봄날 고개를 바닥에 떨구시면서 세상을 뜨셨다. 주위사람들은 그것이 가족들의 무관심으로 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 때는 나 자신을 포함한 가족들은 죄책감을 느꼈고 스스로를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의 끝일지 모르겠다. 시간이 날 일깨워 주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에 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물론 가끔은 영화의 한 장면에서 슬픈 죽음을 만날 경우가 있다. 토마스 하디 원작의 영국영화 “쥬드”에서 케이트 윈슬렛의 아이가 죽는 장면 같은 경우는 그 비극적 운명 때문에 죽음에 관하여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죽음이 슬픈 이유는 잘 이해할 수 없다.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죽은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슬픈 얼굴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은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게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슬픔은 죽음 자체에서는 일어나는 것 같지 않다.   

3. 호기심의 군대적 정의
난 솔직히 군대가 좋지도 싢지도 않았다. (흔히 술자리나 간단한 티타임에 거기에 대해서 말하기는 하지만) 매력적이지도 그다지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군대기간을 그대로 잘 적응했는지 그렇지 않은 지 주위사람들은 뚜렷이 말해주지 않았다. 많은 것을 보아왔고 또 내 나름대로 정의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 것 같기도 하다. 모든 게 그 곳에서 불확실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확실한 것도 있었다. 내가 주저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나를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것이 있다. 아니 복잡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친구 말대로 쉽게 정의 내릴 수 있으면 그 뿐인 것이다. 선과 악이 분명하고 혹은 오해와 실수가 분명한 갈등은 그 나름대로 작가가 정의 내려야만 하는 이유에 해당한다. 아무도 정의 내리려 하지 않으므로 해서 우리는 누가 준비된 정의를 심플하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숀 코넬리를 준비된 정의로 그려낸다면 “더 록”은 그 것을 새삼 심플하게 그려냈다. 군사적 신의와 명예심과 불굴의 투지... 그들이 내린 심플한 정의다. 그리고 숀 코넬리는 나이를 들어갈수록 점점 더 멋있어 진다. 부러운 일이다. 



4. 여인의 음모

30살 가까이 깊게 사랑에 빠지지 않은 나같은 사람은 여인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남자들을 대해서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나쁜 버릇이 있다. 여인들의 아름다움이 결코 악이라든가 파멸로 이끌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안도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열정이 부족한 남자들의 공통적인 편견이 극의 흐름을 간섭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보디 히트”의 캐터린 터너와 윌리암 허트의 사랑에서 그 비슷한 걸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이 잘 짜여진 1급 드릴러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쉽게 선과 악에 대한 혼돈하게 된다는 데 모티브를 두고 있다. 한 남자는 남편을 죽이려는 한 여자와 불륜관계를 맺고 남편을 죽이고 여자에게 모든 유산을 넘기게 한 다음 자신은 파멸한다는 지금은 오히려 흔한 드릴러의 기본 공식에 따르고 있다. 이런 소재는 리차드 기어와 킴 베신저와 우마 서먼이 열연했던 “최종분석”같은 영화에서도 동일한 공식을 따르고 있다. 모티브는 사랑에 맹목적인 남자와 그를 이용하는 여자다. 물론 그와 반대의 공식은 마이클 더글라스와 기네스 펠트로가 주연했던 “퍼펙트 머더”같은 영화에 나타나 있다. 난 그런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맹목적이고 분별없는 사랑은 탐욕에 알맞은 이용가치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분별없는 사랑은 이런 영화처럼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으로는 선보다는 악에 가깝거나 불행을 자초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5. 영국적 환자

내가 처음 영국 혹은 영국인에 관하여 (영어에서는 English가 거의 동일적 의미로 쓰인다.) 특별한 감정을 갖게된 것은 대학 1학년 때 엘리엇 강의를 들었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시들 속에 들어있는 영국에 대한 호감과 영국인들의 합리성 (물론 지나친 정도 정돈된 삶의 지루함조차) 내게는 또 하나의 모국을 선사한 것같은 느낌을 주었다. 누군가 가장 살고 싶은 나라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영국이라고 말하겠다. 그러한 호감은 영국출신 배우에게도 연유한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앤소니 홉킨스와  휴 그랜트 최근의 에마 톰슨에 이르기까지.....
특히 에마 톰슨에게는 팬 이상의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데 지극히 평범한( 어쩌면 촌스럽다는 말이 어울릴) 얼굴과 어투에도 불구하고 “하워드 엔즈”와 “센스 & 센서빌러티”에서 연기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절제와 품격 남들에 대한 신중함과 예의 있는 동정심 그리고 이성적이고 솔직한 판단 (영국에서는 부정직이 가장 추악한 죄악이었음을 동감하며)과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놀라운 열정을 표현하는 그녀를 보면 나의 여성관은 알게 모르게 확립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다. 

6.액션이라는 이름의 웃음 
  
다이 하드의 뜻을 영어사전에 찾아보면 영화에 알맞게 끈질긴 놈, 혹은 지겹도록 목숨이 질긴 인간들을 말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액션을 잘 보지 않는데 그 이유중의 하나가  아마도 영화가 끝난 후에 여운이 단시간에 식어버리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물론 자주 가는 비디오숍의 아주머니는 내 취향이 극히 여성적이라서 그렇다고 간단한 코멘트를 하기도 하지만....,
더구나 홍콩의 한 시대를 풍미하는 브루스 리나 재키 찬이나 최근의 이 연걸 조차도 개인적으로는 너무도 좋아하지만 그 들의 영화는 텔레비전에서 더빙으로 방영할 때는 제외하고는 솔직히 잘 보지 않는다.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남들에게는 그걸 그냥 개인적 취향이라고 말하면 대부분은 인정해준다. 브루스 윌리스는 훌륭한 배우는 아닐지라도 훌륭한 액션배우이기는 하다. 그가 나오는 영화는 대부분은 본 경험이 있다. 내가 왜 액션 영화장르를 좋아하지 않으면서 그가 나오는 모든 영화를 보았는가 한참이나 그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최근의 “아마겟돈”에서 그 이유를 되씹어 볼 수 있었다. 내가 액션 배우 중 그를 선호하는 이유는 내 나름대로 정의하기로는 그의 행동양식은 조금은 원시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제 5 원소”같은 하이테크 영화에서조차 조금은 원시적인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하자면 아주 노동자적인) 투쟁방법과 갈등해소 방법을 택한다. 그는 아마도 온 몸에 땀을 적신 채 공장노동자나 건설노무자같이 기름을 흠뻑 적신 채 셔츠차림에 간단하고 투박한 기계( 중장비)를 직접 움직이면서 액션을 보여준다. 하이테크 레이저 총이나 첨단 컴퓨터보다는 차라리 털이 북실북실한 왼손 주먹이나 팔뚝으로 적을 강타하는 것이 어울린다. 또 중국무술 영화에서처럼 특별한 무도기술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가 폭력을 사용할 때는 언제나 어설프고 그보다 기술적이나 육체적으로 뛰어난 적과 맞붙어 (순전히 죽지 않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한다.  거기에 내가 부루스 윌리스를 찾는 이유가 있다.(하긴 그가 이지적인 역을 맡은 “허영의 불꽃”이나 농염한 정사 신이 엉망인 “컬러오브 나이트”같은 영화의 참패는 오직 나만 그러한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적인 액션은 액션보다 휴머니즘이 강하다는 인상으로 여운을 오래 남긴다. 그는 매번 기계와 투쟁하는, 또 기계나 하이테크가 압박하는 순간에 진정 단순한 인간적인 힘만으로 해결한다. 

7. 슬픈 현실의 우화

혹 이름만 가지고 야한 영화를 골라잡을 때 스티브 소더버그의 “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당황한 적이 있었을 지 모르겠다, 라고 나는 이제 막 성인영화를 보게될 나이에 이른 후배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무명의 소더버그를 일약 스타덤으로 올려놓은(물론 공연한 앤디 맥도웰이나 제임스 스페이더도 시체말로 `떴다') 이 영화를 그렇게라도 끝까지 본 사람은 축복이 있어라. 그리고 로버트 알트만 감독 레이먼드 카버원작의 “ 숏컷 ”을 주의 깊게 보게 된다면 바닐라에 초코를 얹은 아이스크림에 반짝거리고 먹음직한 체리 한 개를 올려놓은 멋진 모양이 된다. 얼마 전 미국에서 꽤 오랫동안 여행하고 온 친구에 말에 의하면 미국인의 일상의 위선은 프라이버시에 의해 보존되고 또 파괴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소더버그의 이 영화는 마치 우리 영화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나 “강원도의 힘”을 만든 홍 상수를 연상시킨다. 프라이버시 속에서 일상은 숨은 위험을 드러내고 심각한 갈등이 아닌 아주 사소하고 미약한 갈등이 우리 전체를 솔 벨로우말대로 우리를 “희생자들”로 만든다. 또 실제로 세상에는 “원자폭탄보다도 사랑의 상실이나 상심 때문에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같다. 그리고 그 모든 이미지가 제임스 스페이더의 표정과 언어와 스타일에 잠재되어있는 것 같다. 

8. 난 춤추는 게 싫다. 

서양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춤을 잘 추지 못해도 그다지 흉이 되지 않은 경우를 많이 보았다. 그래도 가끔은 춤을 추게 되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다른 것은 그런 대로 다 내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춤추고 있는 내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 “비벌리헐즈 50992”에서 브렌든이 이렇게 말했을 때 난 박수를 칠 정도로 동감했다. 
“(같이 춤추는 것을 거절할 때) 네가 날 싫어하게 되는 게 싫지만 내게 춤만 추자고 하지 말아 줘”
패트릭 스웨이즈의 “더티댄싱”은 지금도 AFKN에서 자주 재방영하는데 그럴 때마다 춤추는 것은 아름답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퀀텐 쿠엔티노의 “펄프 픽션”에서의 우마서먼과 존 트라볼타의 춤도 멋있고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의 맘보도 멋지고 한 때 모든 소년들의 잠을 설치게 했던 “플래쉬 댄스”의 제니퍼 빌즈의 솔로 댄싱도 멋지지만  무엇보다도 리차드 기어와 다이앤 레인이 주연한 “코튼 클럽”에서 브로드 웨이 옆 코튼 클럽에서 추는 탭댄스가 압권이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개성과 하드 보일드한 폭력세계( 흑인과 이탈리안, 아이리쉬, 우태인들이 벌이는 지하세계의 파워게임)와 맞물려 흑인들의 그 멋진 춤은 인간의 슬픔과 고통이 어쩌면 육체의 리듬으로 승화된다는 말에 동감하게 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춤이 과연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하더라도 슬픔이나 고난을 구원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왜 춤을 잘 추는 그 흑인들에게서 질투심이 생길까. 화난다. 

9. 훼밍웨이 영화를 못 본 아쉬움

문학의 좋은 명작들은 대부분 영화를 만들어진다. 그 중 헤밍웨이의 영화는 유독 별로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위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인간이 헤밍웨이의 작품을 변변히 읽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첫째 헤밍웨이의 명작들의 원문을 읽지 못했던 이유는 변명하자면 내 자신의 책임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헤밍웨이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헤밍웨이의 어떤 작품보다 헤밍웨이의 삶 자체가 훨씬 극적이고 영화적이며 더 내 흥미를 독차지했다. 그의 깜짝 놀랄만한 삶과 일화들을 접하게 되면 그가 쓴 작품이 얼마나 덜 재미있는 가를 깨닫게 된다. 다른 모든 작가들보다도 그의 전기 영화는 작품 영화보다 더 재미있다. 수줍고 전형적인 미국청년 크리스 오도넬과 평범하기 때문에 더 매력적인 산드라 블록이 주연한 “전쟁과 사랑”은 훼밍웨이의 첫 사랑을 그린 작품인데 헤밍웨이의 당돌하면서도 카리스마적인 매력을 크리스가 연기하는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런 대로 산드라의 능청스런 연기 때문에 볼 만한 작품이다. 일생동안 어머니를 미워하고 여자를 믿지 않았던 헤밍웨이는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불행해졌을 지도 모르지만 후세의 젊은이들과 영화제작자들에게 끊임없는 영화를 만들고 기대하도록 동기유발하고 있다.  둘째 훼밍웨이의 명작을 토대로 한 모든 영화는 원문에서 느껴지는 하드보일드한 문체에서 나타나는 긴박감을 잘 전해주지 못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헤밍웨이의 정수는 군더더기 없는 심플한 문체와 사건의 힘과 강한 열정이다. 거기에는 시간적 흐름보다는 집중되는 열정이 필요하다. 정말 헤밍웨이는 그 자신이 영화 속의 어떤 주인공보다 더 “쿨”하다. 

10. 정치적 망각치유

상업적으로 정치문제를 다루는 것은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할 지 솔직히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다. 정치문제를 상업적으로 다루는데 필요한 이야깃거리가 과연 신빙성이 있는 지 밝히기가 어렵고 설사 상업적으로 정치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이 타당한 것인지 재론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정치문제를 비교적 상업적으로 잘 다루는 감독 중에는 올리버 스톤만큼 독보적인 위치에 서있는 사람은 없다. 그의 방식은 아주 교묘해서 마치 그것이 정치적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그가 현재 필요한 이유는 어떠한 정치적 사실이나 이슈들을 망각 속으로 내 던지지 않고 다시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월남전을 전후한 시기의 정치적 문제들을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편집 광적인 집착을 지니고 있다. 톰 크루즈에게 오스카상을 안긴 “7월 4일 생”이나 소대원 전원을 무더기로 출세시킨( 찰리 쉰이나 톰 베린저를 위시한) “플래툰” 이나 “ J. F. K" 나 ”닉슨“같은 영화가 그렇다. 나는 케빈 코스트너보다는 안소니 홉킨스 경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닉슨“을 더 주의 깊게 보았는데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정치적 야합과 대중적 속임수 및 정치권력에 대한 야망과 선악이 믹스된 정치 판을 두루두루 보여주고 있었다. 앤소니 홉킨스 경의 명연기가 더불어 미국세계의 정치적 행위들이 실제로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형태라는 점에서 우리 나라 정치현실을 꼬집기에 한 은유가 되어주고 정치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여러 장치들이 왜 아직도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이어야만 한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아이처럼 무지한 인간이 한 나라를 온통 어지럽혀 놓고도 자기에게 필요한 젖만 달라고 울기만 한다. 
“ 닉슨 ”은 좋은 영화이고 어떤 면에서는 스파이크 리가 만든 “말콤 엑스”보다도 더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스파이크 리의 영화도 멋지고 덴젤 워싱턴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리고 우리가 정치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면, 아무도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되돌아보지 않을 것이고, 바보들이 우리의 삶을 쥐고 흔들 때 비로소 후회할 것이다)
하나 더, 미국의 정치적 술수와 책략은 너무도 화려하고 조직적이고 치밀해서 마치 물리학의 실험식처럼 오류을 끄집어 낼 수 없는 과학처럼 느껴진다. 


11. 청소년들을 그려내는 영화의 어려움

내가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냈는가를 생각해보면 별 다른 특징이 없는 듯처럼 느껴진다. 그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짜증나는 수업을 들었고 수업을 듣기 싫을 때는 몰래 팝이나 록큰롤음악을 듣거나 자투리 시간은 전부 소설을 보며 지냈다. 입시에 찌든 학생들의 오기와 일류대학 입학이 최고 목적인 학교측의 요구가 맞물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시기를 자진해서 헌납했다. 그게 우리 삶의 불행의 시작이라고 모두들 말하지만 그들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 시절에 읽은 최 인호 소설 중 “우리들의 시대”라는 제법 긴 소설은 20년 전 학창 시절의 한 장면을 공감하게 했다. 매력적이고 감수성이 많은 소년들과 소녀들이 엮어내는 이 이야기들은 시대와 청소년들의 생활을 서로 동일한 공간에서 위트있고 건전하게  그렸다. 더 좋은 소설이나 고전들이 있지만 그 때 읽었던 그 소설은 유독 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체험이나 감성을 건드리는 소설이 한 편쯤은  있는 셈이다. 누구 무어라든지 간에 그러한 소설은 개인의 삶에 뚜렷한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문학에서 교양소설이라고 불리우는 한 장르도 영화에서는 좋은 소재가 되어왔다. 이제는 기억 조차 희미해진 김 정훈, 이 승현 주연의  얄개시리즈라든가 혹은 임 예진의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압권인  “정말 정말 ~”시리즈. 그리고 연예인과 팬과의 이야기를 그려낸 일련의 청소년 영화들.... 최근의 청소년 영화들의 주류는 두 가지로, 하나는  방황하지만 목표없이 부유하는 젊음들을 그려낸다. 또 한 편으로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텔레비젼 드라마 “비버리 힐즈 95012”처럼 제법 살만하고 특별한 고통이 없는 세대와 시기의 젊은이들의 사사로운 에피소드로 일관된 영화도 만들어진다. 한 쪽은 선정주의와 섹스와 타락이 한 쪽은 수다와 연애와 개인적인 고민이(멋진 남자친구, 연예인, 새 옷) 적절한 소재가 된다. 나는 심정적으로 두 영화 소재모두 끌리는 편이 아니지만  진지한 프랑스 소설만큼이나 훌륭한 청소년 영화들이 나왔으면 한다. 교육 방송에서 방영했던 레오 캬락스의 “소녀를 만나다”는 영화 속에서 지루하지만 매혹적인 언어로서 프랑스 특유의 실존적 질문들이 청소년기의 생의 해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 영화다. 흑백 화면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들을 수도 대답할 수 도 없는 대화, 눈으로 보는 영화가 아니라 머리와 경험으로 다시 보아야하는 영화, 경솔함과 천박함이 새로운 시기의 한 징후라면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작업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루함은 인간정신에 대한 병균인 동시에 은총이기도 하다. 김 성수 감독의 `비트'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물론 흥미있게 보았고 연출이나 연기도 만족할 만한 수준이지만 허 영만의 원작에 너무나 깊게 감동한 나머지 (원작을 보지 못하거나 원작 자체에 감동하지 않은 사람들보단) 영화에 기립박수를 치기 어려웠다. 그리고 스매슁 펌킨스의 음악이 자주 들리는, 김 하늘이라는 묘한 여배우를 만난 “바이 쥰”은 하루키 소설의 전형적인 대사와 구성모방에도 불구하고 소수에게만 만족할 만한 영화라고 느껴진다. 그리고 그 외의 아류작들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  
내 개인적으로 모호한 기준이긴 하지만 “트레인 스포팅”은 청소년 영화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을 위해 잘 만들어진 일탈영화로 생각되어진다. “ 가지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그려낸 멋진 영국식 “나쁜 영화”다.    
그러한 면에서 작은 영화감독 장 선우의 “나쁜 영화”는 잘 만들지 못한 영화다. 시도 자체의 의미 외에는 개인적인 장 감독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지 않다. 장 선우 감독의 영화  중 5편 정도를 보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영화가 “나쁜 영화”는 아니더라도 잘 만든 영화들은 아니었다. 그의 노력과 수고에 비해 그 열매는 너무 부실하다. 모든 작가가 명작을 쓸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12. 낙원으로의 탈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너무 일찍 읽은 나는 그 책에 사로잡혔다. 스피디한 현실 속에 당황한 남자처럼 월든 호수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육체적 노동과 신선한 공기, 새벽안개, 호수가의 오두막, 최소한의 욕망들은 젊은 내게 어필되어 냉정한 현실세계에서 한 발 물러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 나를 외롭게 했고 고독의 외로움을 달게 맛보게 했다. 책을 읽고 명상하는 은자의 삶을 얼마나 원하게 했던가... 수도원의 수도사처럼 침묵과 명상에 잠겨 지혜의 숲 속을 거닐기를 얼마나 원했던가. 성적 욕망과 권력탐욕과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그 것을 조롱하며 여행하면서 사는 삶을 얼마나 갈구했던가. 그러나 현실은 속물주의와 책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거기에서 갈등은 시작된다. 슬픈 꿈이 좌절되는 순간 죽음과 연관된다. “칼리토”에서 알 파치노는 범죄세계에서 벗어나 바하마에 가서 평범한 사람으로 낙원에 있기를 갈구한다. 범죄는 아슬아슬하게 그를 옭죄고 결국 “낙원으로의 탈출”의 꿈은 사라진다. 현실의 벽은 그처럼 두껍고 욕망과 죄악의 사슬은 인간의 이상을 놓아주지 않는다. 낙원을 얻기 위해 칼리토는 너무나 많은 걸 희생해야한다는 걸 잊고 있는 듯하다. 낙원은 고통의 대가를 요구한다. 그 길은 너무 멀고 험해서 “이르는 자가 심히 적다”  꿈을 찾기 위해 건너야할 사막이 너무도 넓고 그 길은 고난의 길이다. 꿈을 상실한 자들이 그 사막의 중간에서 시체로 널려 있다. 

13. 사랑의 여러 법칙들

누군가 내게 가장 아름다운 사랑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조금은 심각한 척 주저거리다가 끝내 이탈리아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을 슬그머니 밀어줄 것이다. 내가 아직 사랑에 대해서 무어라고 정의할 만한 나이가 아니고 변변한 사랑경험도 없지만 그 영화는 내 마음 속을 은근히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부끄러워진다. 어릴 적 동네 여 이발사를 사랑하던 주인공이 아주 늙은 나이에 여 이발사를 사랑해서 결혼하고 이별한다는 단순 구성의 이 에피소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간과 그 공간사이의 여백이 많은 영화다. 운명적 이유가 아니라면  나이가 어느 정도 먹은 후에 사랑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성급한 욕망이 조금은 수그러들고 지혜와 인생에 대한 눈이 조금은 떠 있을 무렵 사각거리는 가위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느끼는 이 중년의 남 ,녀에게서 흔들리는 불륜의 그늘도 정사 후의 허탈함도 느껴지지 않는 여운이 많이 담겨있음을 발견한다. 내가 일하는 어딘 가에 사랑하는 사람이 조용히 신문을 보거나 십자 퍼즐을 풀고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긋이 미소를 지으면서 머리깎기 싫어하는 소년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매만지고 있다면......
가끔은 어설픈 춤으로 그 소년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사랑이 끝나면 조용히 사랑하는 사람 곁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사라질 용기가 있다면.... (물론 그것이 수많은 비난을 불러 일으킬지라도) 
사랑은 여백이 많은 영화와 같다. 누구나 한 번 쯤은 그러한 사랑을 꿈꾸지 않을까 !

14.작가들의 시련 -천재처럼 위대한 이는 정말 모두 법률위에 있는가

영화 속의 작가들은 실제로 영화를 만든 작가들의 모습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나리오를 쓴 작가나 영화의 원작들 속의 작가들은 자기의 모습을 일그러뜨리거나 시치미를 뗀 듯 그려도 여전히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못한다. 그 정도는 누군가의 말대로 개인적의 자의식 정도에 비례한다. 코엔 형제의 “바톤핑크” 와 헨리밀러의 전기영화 “헨리와 쥰” 소더버그의 “카프카” 그리고 골치 아픈 “파리프랑스” 얘기할 거리가 많은 “비터 문” 
디카프리오 주연의  “토탈 이클립스” 그리고  베아트리체 달의  신선한 연기가 압권인 “베티블루 37.2” 영화 속에서 작가의 모습은 사회적으로 위축되거나 섹스와 허무에 찌들어 있거나 사회조직 속에서 목졸려 신음하거나 평가를 받지 못해 자학하면서 죄악과 수치감에 자아를 던져버리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동일하게 아쉽게도 모두 사회적으로 타락하고 퇴폐적이고 몰염치하고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들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정도의 위험한 발상이지만 일방적으로 또 다른 자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어쨌든 그러한 잣대를 염두에 두고라도 작가들의 시련은 영화 속에서 변함이 없다. 그들의 천재성을 흠모하면서 동시에 작가들이 겪어야했던 아픔과 번민과 좌절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작가들을 더 사랑하게 만든다. 이쪽에서 따돌림 당하고 저쪽에서 핍박받은“ 궁핍한 시대의 ” 작가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홀로 설 수 있는 일이 평범한 용기나 인내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희생양이 되어 보여주고 있다. 바톤 핑크에서 극작가는 현실을 담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은 지극히 음습한 현실은 작가 주변을 싸고 도는 공포와 부조리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부조리한 현실은 작가가 그려나가야 할 현실일뿐더러 숙명이기도 하다. 안경과 타자기 그리고 자기만의 방에서 얼마나 그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포착하고 현실 속의 숨겨진 또다른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가! 세계 속에 또다른 세계가 있고 현실속에 또다른 현실이 있다. 마치 영화 속에 현실이 있고 현실 속에 영화가 있는 것처럼.

언급되지 않은 “바톤 핑크”의  빼어난 점 중에서 특히 이 영화의 가치는  몇 십 번을 다시 봐도 그 때마다 생각과 느낌이 달라지는데 있다. 좋은 작가들의 작품이 그러하듯 “한 번에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많은 퍼즐과 수수께끼를 그 안에 숨겨두었기” 때문 인 것같다. 개인적으로 판단하는데 “바톤 핑크”를 다시 보면서 앞으로 영화 속에서 그려 나갈 작가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15. 장 미희가 좋은 이유
대학 입학한 직 후 나도 처음으로 대부분의 프레쉬맨처럼 미팅이라고 하는 블라인드 데이트를 한 경험이 있다. 커피숖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처음 보는 몇 명의 이성과 만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무언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다. 처음의 서먹서먹한 시간이 지나고 서로에게 말을 걸게 될 때쯤 맘에 드는 파트너를 골라 그냥 일어서면 되기 직전에, 이러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좋아하는 여배우가 누구냐는 질문을, 앞의 왼쪽에 앉은 머리를 어깨까지 길게 기르고 수줍은 듯 쳐다보는 여자애가 한다. 나는 서슴없이 “장 미희”라고 말한다. 순간 분위기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고 여자애들은 한숨을 내 쉬면서 서로의 번갈아 본다. 아차, 난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끼고는 서둘러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지만 이미 불은 번져져 있고 친구들은 “왜 하필이면 장 미희야”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고 할 수 없이 슬슬 술을 먹을 궁리를 하고 여자 애들의 호기심없이 오렌지 쥬스의 얼음을 오독오독 씹는다. 누구에게든 한 배우의 대표작을 꼽는데 이의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한 배우를 발견하고 그 배우와 영화를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앨범 속에 고이 간직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인상적인 배우와 그 영화를 꼽는다면,  잭 니콜슨이면 “차이나타운”을 메릴 스트립의 “ 아웃오브 아프리카”“소피의 선택” 톰 행크스의 “필라델피아, 포레스트 검프” 해리슨 포드는 역시 “인디애나 존스” 소피아 로렌은 “해바라기” 제임스 딘은 “에덴의 동쪽”등의 3편, 톰 크루즈는 역시 “7월 4일생”과 “어 퓨굿맨”  제레미 아이언스는 “카프카” 말론 브란도 “대부” 알 파치노의 “스카페이스” “칼리토” 숀 코넬리의 “007” “장미의 이름” 브루스 윌리스의 “다이하드” 제임스 스페이더의 “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잎” 미셀 파이퍼의 “프랭키와 쟈니” 캐서린 터너의 “보디히트” 미키루크의 “나인 하프 위크” 마이클 더글러스의 “월 스트리이트” 덴젤 워싱톤의 “ 말콤 엑스” 안소니 홉킨스의 “ 양들의 침묵” 조디포스터의 “ 넬 ” “피고인” 줄리아 로버츠의 “적과의 동침”  윌리엄 허트의 “ 작은 신의 아이들, 스파이더 우먼의 키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 우드의 “더티하리” 알랭 드롱의 “태양은 가득히” 그리고 클라크 게이블 과 비비안 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케이트 윈슬렛의 “ 쥬드”...  
양 조위는 “씨클로” 금 성무는 “중경삼림” 장 국영은 “아비정전” 등이다. 
한국배우로서 안 성기는 “ 바보선언” “”달빛 사냥꾼“  박 중훈은 ”칠수와 만수“ 한 석규는 ”초록 물고기“ 이 미숙은 ”겨울 나그네“ 홍 경인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이 매치된다. 
그런데 왜 나는 좋아하는 여배우로 장 미희를 꼽았을까? 역시 고등학교 2학년 때 누나와 사춘기와 자연에 대해서 말하면서 보았던 최 인호 원작 배 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안 성기의 대표작으로도 꼽고 싶은 데 거기에 장 미희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장 미희의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내 세대는 장 미희의 “영자의 전성시대”라든가 조 해일 원작의 “겨울여자”를 볼 기회가 없어서 그런지 장 미희의 “깊고 푸른 밤”에서 본 인상은 내게 깊게 각인 되어 있다. 그린카드를 거래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남자와 위장 결혼을 하고 오히려 그를 사랑하게 되는 여자의 역할로서 장 미희 매력은 어린 내게 생경한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비쳐졌다. 블라인드에 기댄 채 담배를 피워 물고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그녀의 독특한 매력은 그녀의 이전이나 이 후 영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영화의 속의 장 미희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꼼짝못하게 하는 싸늘한 매력이 있다. 외로움과 신산한 경험을 가진 독신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무채색의 공허함과 냉정함을 가장한,  마음 속에는 불같은 열정을 가진 채 얼음보다 차갑고 창백한 시선을 가진 채.....왜 그 매력을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지 난 지금까지 궁금하고 여전히 그러한 장 미희의 팬이다. 그 여자 애는 아직도 내가 왜 “장 미희”라고 말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지만....

16. 법률적인 긴박감
미국에서  헐리우드 영화에 가장 많이 나오는 직업 중에 하나가 변호사 일 것같다. 존 그리샴이라는 걸출한 대중작가가 배출된 지금에는 더더욱 심하지만 미국인의 삶 속에서 법과 소송과 변호사가 그만큼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기 때문이다. 과연 “미국은 변호사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라고 말하는 영화 속의 경찰의 푸념이나 “거리에서 깨끗한 실크 와이셔츠에 멍청한 얼굴을 지닌 사람의 90%가 변호사라는” 말은 실제로 법적 소송보다는 인간적인 합의에 익숙한 우리 사회와 다른 면을 많이 보여준다. 존 그리샴이라는 초베스트셀러 작가의 덕택으로 부패한 변호사와 정의로운 변호사간의 갈등을 나타내는 영화를 최근에 몇 편 본 일이 있다. “야망의 함정”이라는 톰 크루즈와 진 핵크만 주연의 영화와 한창 뜨고 있는 맷 데이먼의 “ 레인 메이커” 는 신참내기 변호사들이 겪는 비리와 법조계의 은밀한 부정을 폭로하고 있고 크리스 오도넬과 진 핵크만이 인종차별주의에 법의 심판과 음모주의를 법정문제로 다룬 “가스실” 게리 올드만의 젊은 시절 모습과 케빈 베이컨이 악역으로 나오는 “크리미날 로우”는 변호사가 악자를 변호하기 위해 고뇌하다가 결국 정의의 편에 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다. 미국 판결을 다룬 영화가 긴박감과 극적 소재가 되고있는 것은 부분적으로, 그들 자신도 그 신빙성에 지속적으로 의문을 갖고 있는 배심원제도에 기인한 바가 크다. 배심원들의 표결방식은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감정적 심정적 판단에도 많이 근거를 두기 때문에 변호사의 일종의 연극적 요소가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물론 그 배심원들의 합리적인 결정여부를 떠나서도 지속적인 증인 심문과 정교한 법정 시나리오는 보는 이로 하여금 한 사람의 유,무죄를 떠나서 법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반전과 언어적인 마술에 매혹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반전 요소를 가장 멋지게 드러내 준 영화는 역시 톰 크루즈와 잭 니콜슨이 벌이는 설전과 심리적인 요소까지 파악해내서 멋지게 어퍼 컷을 날린 “ 어 퓨 굿맨”일 것이다. 미져리, 해리와 샐 리가 만났을 때를 연출한 로브 라이너 감독의 깔끔하고 정돈된 연출도 돋보이지만 잭 니콜슨과 톰 크루즈와 만난 그 마지막 법정 장면은 내게 젊은이의 정의로서 혹은 목표를 위한 놀랄만한 집중력으로서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영화가 되었다. 물론 그 속에는 장교로 군복무를 했던 내 개인적 체험과 군대사회에 대한 예리한 시작이 화학적으로 융합되어 새로운 경험을 창조해냈다는 걸 부인하고 싶지 않다. 나는 가끔 내가 사회와 타협하거나 자신이 가진 가치관이 너무 확고할 때마다 이 영화를 다시 보고 그 추상적인 개념( 의리라든가 명예라든가 충성이나 애국심)같은 것을 다시 깊게 생각해보고 다시 정의를 내리곤 한다. 그리고 그 영화는 내가 아끼는 보물로 언제나 내 비디오 라이브러리에 꽂혀있다.

17. 유년시절의 추억
내 결코 발표될 것같지 않은 처녀소설에는 유년시절, 석양 무렵의 골목길이 등장한다. 아이들이 저녁식사시간에 모두 돌아간 직 후 소년은 그 골목길에 남아 골목 저편에서 빛나는 노을을 보며 시인이나 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가족들에게는 목사가 되고 싶다는 수 백 번  말을 했지만......
영화속에서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발견하는 일은 흥분되고 가슴저린 일이다. 아직까지는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시대를 다룬 한국 유년영화는 없는 아쉬움이 있지만 난 내 유년의 모습을 프랑스 영화 “마르셀의 연작 영화”에서 발견한다. “마르셀의 여름”과 “마르셀의 추억”은 두 편의 영화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추천을 신중하게 하는 영화중에 하나다. 그 만큼 개인적으로 너무도 아끼는 영화이고 추천했을 때 다른 사람의 별 무반응한 느낌을 수용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 것이 참을 수 없이 후회하는 것이 싫어서 일 것이다. 그 만큼 “ 한 번 보면 괜찮은 영화야”  정도가 아니라 “ 만약 보고도 별로 관심이 없어지면” 그 추천해 준 가까운 사람에게마저 화가 나는 영화라고나 할까? 그 속에 나오는 소년의 이미지는 누군가 말했듯이 나의 어릴 적 모습과 무척 흡사하고 그러한 어머니와 아버지가 꾸며 가는 가정은 하나의 이상적인 가정의 천국을 보는 듯하다. 프랑스의 아름다운 전원과 등장인물의 개성적이면서 따뜻한 인간성, 그리고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정겨운 에피소드들, 정의로움과 솔직함과 명예에 대한 아버지의 존경스런 행동들, 자연과 남편과 아이들과 이웃을 위해 신중하면서 온화하고 그러하면서 용기있는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과 친구와 들녘의 생명과 신선한 공기를 사랑하는 가족들의 향기는 그걸 보는 내 주위를 휘돌며 웃음과 눈물을 짓게 한다. 그 영화를 보고 아름다운 가정은 천국에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당신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게 되기를 바란다.

18. 여성영화에 대한 동질감과 거부감

AFN FM에서 랩음악을 나오는 것을 싫어하듯이 난 급조된 영화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되도록 속편은 잘 보지 않는 편이고 아류작들도 거의 보지 않는다. 차라리 음악이라면 아류작이라도 들어볼 만 하겠지만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는 단연코 거부하는 버릇이 있다. 아마 시각적 피곤함과 기대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 것같다. 아류작이 나오지 않는 영화중에는 물론 많은 장르의 영화가 있지만 여성영화는 극히 드문 것같다. 여성영화는 개인적인 견해로서는 거의 “오리지날”에 가깝다. 내가 말하는 여성영화는 어떠한 성적 편견을 가진 의미에서 여성영화가 아니라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여성영화다.  난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라는 소설을 대학 1학년 때 읽었는데, 꽤 오래된 기억은 안나지만 과장하기 싫더라도 그 소설은 여성을 남성의 진정한 동반자로서 이해하는데 좋은 선례가 된다. 한 인간을 이해하는데 총체적인 접근이 반드시 필요한데 하물며 하나의 성을 이해하는데 단순한 경험이나 추상으로 일관한다는 것은 부도덕하지는 않더라도 신중하지 못한 태도다.    최근에 본 리들리 스코트감독의  “델마와 루이스”와 이 현승감독의 “ 네온 속에서 노을지다”는 헐리우드와 한국 여성영화의 좋은 전범으로 꼽고싶다. 물론 인도영화 “파이어”라든가 이 현승 감독의 “그대 안의 블루” 공지영 원작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등도 여성영화로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그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제인 캠피온의 “피아노”이지만.... 한 때 난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들의 주석서에서  여성에 대해서 언급한 글만 발췌해서 모아놓은 적이 있다. 그 속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자연의 원리나 진리처럼 언급한 것이 있고 그 반면에 균형잡힌 시선으로 바라보는 많은 글도 있다. 물론 결정적인 차이는 여성이 자신의 성에 대해서 언급한 것과 남성이 여성에 대해 언급한 것에 대한 미묘한 차이다. 여성은 여전히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불만에 차있고 남성들은 여성이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고 생각한다. 심지어 한국모던 영화중에 가장 맘에 들어하는 이 현승감독의 “그대안의 블루”조차 남자는 강하고 냉정하며 자신의 일에 프로답고 , 궁극적으로 여성을 자신의 프로세계에 진입시키기 위해 끌어올려야 한다는 시스템 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자신의 힘으로 독립하기 위해 남성들이 쳐놓은 모든 그물은 여성 스스로가 힘들게 걷어내야 한다. 그러한 시도가 여성을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기 해야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다. 여성은 남성들과의 싸움에 이기기 전에 여성스스로가 싸워야하며 여성성 안에서 낙오하면 남성과의 싸움의 기회조차 상실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남성들의 시스템 속에 길들여지는 것이 편할 지도 모른다. 여성들 안에서 좀 더 아름답다거나 조금 더 여성다운 일에 적합하면 남성들의 선택을 받아 편하고 아름다운 화초로 가꾸어질 수 있다. 나는 남성들 중에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이러한 여성의 환경을 이해하고 여성길들이기의 시스템을 어느정도 걷어주고 그 힘든 싸움에 공정한 판결을 하기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리고 여성들도 남성들과는 마찬가지로 다른 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동안 인류는 하나의 본원적인 권리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가를 생각해주었으면 한다. 그러한 노력에 격려하면서 그 힘든 싸움을 하는 사람에게 갈채를 보낸다. 이 현승의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그가 너무 오래 멈추어있다.    

19. 또 하나의 편견

동성연애에 대해서 견해는 지금까지는 혐오나 비난, 성도착, 무관심, 공포등으로 일관되어왔다. 동성연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암묵적인 혐오라든가 공포감같은 것을 보이게 되는 경향이 많다. 여성이 자신들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동성연애자들도 각각의 오피니언을 통해 자신들의 솔직한 감정과 견해를 피력하고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동안 아주 힘든 싸움이 되어왔고 또 여전히 힘든 싸움으로 남아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최근 본 왕 가위의 영화“ 해피투게더”와 인도영화 “파이어”와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 “빌리티스”  그리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와 비틀즈의 관한 영화“ 백 비트”와 한 동안 떠들썩 했던 “크라잉게임” 톰 행크스에게 아카데미를 안겨준 “필라델피아” 윌리엄 허트에 “ 스파이더 우먼의 키스”에 대한 부분적인 감흥 때문이다.  현재 부분적으로 영화에 나오는 동성연애의 모습은 썩 좋은 모습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동성연애는 이성의 핍박이나 트러블 및 몰이해에 대한 반항의 한 방편으로 나타나거나 성적인 자극을 극대화하는 에로티즘의 한 방편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변태적인 정신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한다. 그것을 보면 어떤 사람이든 동성연애자의 한 틀이 설정되는 것을 쉽게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 모든 모습에서 동성연애는 하나의 피해의식으로 볼 수 있다. 성과 폭력과 심리적 이상에 따른 피해의식이다. 이러한 편견은 우습게도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라는 중세적 분서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같다. 그러기 때문에 동성연애를 그렇게 그리거나 혹은 아예 그리지 못하게 하고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한다. 일종의 심리적 매카시즘과 같다. 거기에는 물론 동성연애를 상업적이나 혹은 선전적, 매문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무리가 한 몫한다. 왕 가위의 ”해피투게더“는 보고 난 후에 묘한 여운같은 것이 있다. 왕 가위 영화가 늘 완성도에 비해 감동이 큰 것은 그의 시선이 편견이 없다거나 촬영기법이 특출하다거나 아니면 특유의 감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의 영화는 늘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아주 소중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해피 투게더“에는 성을 초월한 근원적인 애정이 우리의 보편감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또 그 때문에 상심하는 것은 성과 세대 나이 및 인간이든 어떤 추상적인 개념이든 모두 동일한 근원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많은 성직자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신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일생을 거기에 바친다. 그것은 편견으로서 얼마나 합당한 것인가. 우리는 어느새 이교도일지라도 신을 위해 금욕하며 일생을 바치는 자에게 숭고한 경의를 표한다. 아마도 하이젠베르크는 다른 무엇보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내부를 사랑했을 것이며 한 사람을 사랑하기에는 너무도 철학을 사랑했던 칸트도 영원한 존경의 대상이다. 모든 사랑은 근원적인 감정에서 출발한다. 개인적인 비약이 있겠지만, 동성연애도 그 본원적인 감정에 충실하다면 편견이 개입될 여지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가 의심하는 것은 동성연애를 다루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러한 근원적인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다. 만약 그걸 진실로 사실적이고 편견없이 그려나간다면 우리의 시선도 점점 변해갈 것이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대상이 우리의 내부를 흔들 때 그 대상은 벌써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나 조건을 망각하게 한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염색체 하나의 차이“라는 한 교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불가해한 사랑의 부분은 평가의 잣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해피 투게더“가 오히려 동성연애를 더 확고하게 표방해야한다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과연 누가 지금 그걸 확실하게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가. 다만 ”해피 투게더“는 여전히 좋은 영화이고 앞으로 이보다 더 훌륭한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밖에는 없다.      

 20. 대사의 아름다움

내가 영화를 선택할 때 특별한 기준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기들의 추천도 있고 흘낏, 신문이나 잡지에서 보고 `이건 어떤 영화일까?'하고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감독이나 주연을 보고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시나리오 작가나 원작소설에 따라 결정하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 비디오 커버 뒤에 있는 대강의 줄거리를 통해 미루어 짐작해 뽑는 경우도 있다. 말하자면 특별한 기준이란 게 있지 않고 그 때 그 때마다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한다. 어떤 시인이 자신의 독서경험에서 밝혔듯이 하나의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읽을 책이 저절로 튀어 나온다고 하는데 영화의 경우도 비슷한 것같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의 멋진 대화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영화를 볼 때의 즐거움은 뜻밖의 영화 속에서 마음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멋진 대사가 들렸을 때다. 아쉽게도 요즘 영화는 대사가 적어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찾아 읽을 매력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영화는 대사의 마술로서 멋진 대사는 그 영화전체를 송두리째 망각하더라도 그 부분만은 또렷이 기억 속에 머물러 한다. 가장 최근에 멋진 대사로는 잭 니콜슨이 홀리 헌터에게 해준 “ 당신은 내가 멋진 남자가 되도록 만들었어”( 원문의 감흥이나 장면의 설명없이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에는 벅차지만)생각난다. 그리고 “어 퓨 굿맨”에서 톰 크루즈가 잭 니콜슨을 기소하고 난 후 다우니 상병에게 한 말 “ 명예는 해병대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네” 라고 한 말. `아비정전'에서 장 국영이 장 만옥에게 시계를 1분동안 보면서 “이제 우리가 함께 1분을 있었다는 것을 되돌릴 수는 없어 이미 과거가 되었으니까” 라고 한 말, 또 타락천사에서 여 명이 마지막 계획된 함정에서 빠져 최후를 맞이하는, 약속된 장소에서 무수히 총격을 받으면서 “나는 게을러서 누군가 준비해 놓는 걸 좋아한다”라고 한 말, `장미의 이름'에서 이단 단죄에 대한 종교 재판을 두고 숀 코넬 리가 한 말 “이단과 정교는 종이 한 장차이라네” 라고 한 말. 또 “페이퍼”에서 글렌 클로스가 “나는 러시아 재정보다 가난하다구” 하고 한 대사. 이 모든 게 그 장면과 상황에 대한 아름다운 마술처럼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쉬운 것은 영화가 점점 비쥬얼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정말로 아름다운 대사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멋진 대사보다 점점 더 카메라 기술이나 에니메이션 및 특수영상기법들로 인해 언어가 줄어들고 생각할 기회가 줄어든다. 영화를 볼 때는 정신없이 흠뻑 젖었다가 꿈에서 깨고 난 것처럼 잠시 동안 멍한 상태가 된다. 은근히 그 쪽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아니고 (개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멋진 대사를 듣는 영화가 몇 편쯤은 자주 나와서 나같은 사람도 즐거웠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멋진 대사는 역시 러브스토리에서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에요”

21. 감독에 대한 아쉬움
나는 영화감독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창조성이 퇴색하거나 형편없는 작품을 내놓게 되면 다른 사람보다 더 안타까워하거나 원망한다. 비단 영화감독 뿐만 아니라 신인 배우들에게도 그러한 감정은 동일하다. 초기의 실험작으로 메이저급 영화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 평균작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만그만한 아류작을 대거 양산한다. 그건 한국영화의 고질적인 병폐이기도 한데, 그래서 좋은 영화가 점점 줄어드는 것같다. 한 작가나 예술가가 중간 중간 소품정도를 예상하고 창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소품에도 분명 그 재능은 잠재되어있어야 한다. 한국영화감독은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능력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소품에 다 팔아버린다. 이 장호와 배 창호와 신 승수와 박 철수와 박 광수와 장 선우와 이 명세와 최근의 신인 감독 중 김 성수가 그러하다. 그들은 대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성공적인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지만 결국 주저 앉고 만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 동안의 작업은 어쩌면 개인적이고 독자적인 재능에 의한 성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만큼 그들은 좋은 영화와 엉터리이며 형편없은 쓰레기 같은 영화를 동시에 만들었다. 조금은 감정이 격해진 것같지만, 결국에는 그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만큼의 배신감도 크다. 과연 “과부춤”일 때의 이 장호와 “깊고 푸른밤”을 만들 때의 배창호 “달빛사냥꾼`을 만들 때의 신 승수 ”301.302“를 만들 때의 박 철수 ”그 섬에 가고싶다“의 박 광수 ”우묵배미의 사랑“을 만들 때의 장 선우 ”첫사랑“을 만들 때의 이 명세 ” 비명도시“를 만들 때의 김 성수는 어디 갔을까? 오히려 이 작품의 재능이 우연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본 나를 탓해야만 하는가?

22. 소녀의 사랑

현실적인 문제로 아닌 감정의 이끌림에 따라 아직까지 밤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은 사람은 아직도 소년 소녀시절의 꿈 한 자락 정도는 마음 한 구석에 놓아두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 남자들은 소녀들과의 사랑을 꿈꿀까? 남자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족속들일까? 소녀들과의 사랑을 다룬 몇 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다. 그 가운데는 전문적인 용어로 소아기호증이라는 정신병의 일환인 병적 징후에 빠진 남자를 그린 “로리타” (제레미 아이언스가 주연을 맡았고 나보코프의 원작 소설로 유명하다)같은 영화도 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네어”라는 천재작가 소녀에 관한 프랑스 영화도 있고 쟝자크 아노 감독의 극사실주의적인 에로티즘영화인 마르그리뜨 뒤라스의 소설인 “연인”이나 세자르 상 수상작이면서 마지막 유작을 만들고 죽었던 시릴 꼴라르의 자전적 영화“ 사베지 나이트”같은 영화도 있다. 소녀와의 사랑은 정신적인 면이 아니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는 금지된 사랑이다. 물론 나는 원조교제나 소녀들의 탈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진정한 사랑이라도 육체적 사랑이 결부된 것은 탈선이라고 말할 수 있고. 영화 제작측에 입장에서는 물론 이러한 탈선에 대한 악의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위해 “연인”같은 영화의 수많은 B급이나 C급 아류작을 쏟아내기도 한다. 나는 늘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한다. 소녀에 대한 사랑은 나이든 남자나 소년에게나 모두 순수한 사랑의 본질에 대해서 말해주고 싶어한다는 걸 난 말하고 싶을 뿐이다. 물론 그 시기의 성적 호기심이 일생을 결정짓기도 한다. (이것에 대한 아주 좋은 실례로서의 영화는 몽고메리 크리프트가 열연한 “초원의 빛”이 있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은 그 애뜻함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대방에 대한 염려와 애착이 들어있다. 소녀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록 그것은 하나의 이미지의 성격이 더 강하다. 만약 소녀를 사랑하면 할수록 특정한 개인보다도 그 시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추억하게 된다. 나이든 남자가 소녀와 사랑을 하게되면 어떻게 될까? 나이든 남자가 소년으로 변할까 아니면 소녀를 나이든 여자처럼 사랑하게 만들까... 어느 쪽이든 간에 나이든 남자와 소녀의 사랑은 애뜻함이 없다면 무엇이 될까? 좀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건 사랑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썩 유쾌한 그림이 아니다. 애뜻함이 없다면  어둡고 슬픈 현실의  흑백사진이 연상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어두운 산업사회의 뒷골목의 사진들 말이다. 그러나 분명 일어나지 말아야하는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너무도 두려운 “그래서 어쨋다는 거냐의 심리상태들.
텔리비젼 영화 중에서 리처드 챔벌린이 주연한 “가시나무새”는 내가 사춘기 시절에 본, 자기희생의 새 이름처럼 아름다운 소녀와 정열적이고 자신만만한 신부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그려내준 감동적인 영화로 기억된다. 소녀가 어느날 여성으로 성장해서 구애를 했을 때 신부가 느낀 고통은 그를 신앙심과 배치되는 사랑의 혼란으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지워지지 않은 애뜻함의 여운이 남는다. 거기에는 도덕을 넘어서는 사랑의 진정한 애뜻함이 있다. 우리가 불장난을 사랑이라고 이름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23. 친구들과 함께 하는 영화들

나처럼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우는 대개는 자기 만의 방을 자신의 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 내 경우는 할부로 구입한 비디오/오디오 세트와 컴퓨터와 캠코더와 조그만한 일렉기타와 앰프와 많이는 아니지만 꽤 모은 영화와 책들과 가끔 마실 수 있는 위스키정도가 있다면 별 불만없이 내 방에서 조용히 지내곤 한다. 외롭거나 고독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고 또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모든 일상생활이 비슷한 모양을 띤다면 혼자 생활하는 것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생각이 통하는 여럿이 함께 지낸다면 좋겠지만, 그것도 그 나름대로 외로움을 느낄 것이고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흔히 친구들과 모여사는 삶이 재미있기도 하고 즐겁다고 할 때마다 난 인정하면서도 어느 순간에 부닥칠 사소한 문제 때문에 갈라지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에 사실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말을 듣게 된다. 친구사이의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정말로 셀 수 없이 많고 (우리들의 사건들이 실은 생각보다 좁은 가족, 친구관계에 의해서 발생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신이라든가 사랑이라든가 이별 등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기 해도 어떤 틀을 만들기도 어려운 일이다. 영화라는 매체가 혼자보다는 친구나 애인과 보는 경우 더 재미있기도 하고 또 실제로 영화를 혼자 보는 경우가 많은 나같은 경우도 몇몇의 영화는 친구들과 함께 보는데 영화 속에 친구들의 모습을 보고 나의 친구들과 나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럼 영화 속에서 가장 멋진 친구들은 어디 있을까? 나는 과연 “원스 어 폰 타임 인 아메리카”의 뒷골목 친구들과 “슬리퍼스”의 악동들과 대니보일 감독의 “쉘로우 그래이브”의 플랫메이트, “트레인 스포팅”의 드럭 친구들 와 “리얼리티 바이트”의 젊은 친구들,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나오는 히피 친구들, “비트”의 민을 둘러 싼 친구들, 크리스 오도넬이 세 여인들의 우정에 끼어드는 영화 “사랑하는 친구들“ 장 만옥 종 초홍이 그리는 두 친구의 인생역정, 한 남자에 대한 사랑 ”유금 세월“ 그리고 베트 미들러의 “두 여인” 이라는 멋진 영화가 생각이 난다. 특히 “두 여인”의 영화는 두 여인이 겪는 사랑과 이별과 친구에 대한 배신과 좌절이 어떻게 그들의 삶 전체에서 우정을 통해 극복되고 치유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베트 미들러의 멋진 연기와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from a distance"가 마지막 장면에서 흘러나올 때 난 바보처럼 울고 말았었다. 과연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은 무엇이고 잊지 말아야할 것은 무엇인지...... 내가 일생동안 지속되는 우정을 간직할 만한 따뜻한 마음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도 그런 우정이 내 생을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다. 영화에서는 가끔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친구사이에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있는 남성을 등장시켜 삼각관계를 만든다. 한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두 친구사이의 갈등은 영화 속에서 사랑과 우정이 배치되는 조금은 곤란하고 보는 사람의 마음을 혼란케 만드는 장치를 한다. 최 인호 원작의 “불새”는 우정을 이용해서 신분상승을 꾀하는 한 젊은이가 결국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는 멋진 원작에 대한 영화다. 그리고 “고스트”에서는 친구의 돈과 여자가 탐나서 친구를 죽이게 되는 영화다. “홍콩영화”에서는 친구간의 배신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러고 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연적은 친구 형제 스승이나 제자이다 라는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면 이 보다 더 값진 죽음이 있겠느냐?”하는 성구가 귀를 울린다. 사랑하는 친구여! 그대에게 이르는 길은 왜 이토록 유혹이 많은지 모르겠다. 지금은 모두 어른이 다 된 친구들은 어색하게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여전히 즐거워한다. 

24. 음악에 관하여 말하는 영화

나는 개인적으로 음악영화를 끔찍이도 좋아하는데, 아마도 한 때 밴드를 하고 싶었고 한 아마추어 밴드에서 잠시 있었던 경험이 나를 음악영화에 빠지게 만든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몇 편의 음악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중 생각나는 것은 불운한 명 피아니스트의 일생을 그린 “샤인” 모짜르트의 영화 “ 아마데우스” 괴기적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그린 “파가니니”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 “토스카니니” 그리고 비틀즈의 옛추억인 “백비트”와 짐 모리슨과 그의 친구들을 그린 올리버 스톤의 영화 “도어즈” 와  거세당한 남자성악가의 음악역정을 그린 “파리넬리” 그리고 제랄드 드 빠르듀의 연기가 압권인 “ 세상의 모든 아침” 그리고 스파이크 리의 가장 멋진 영화중에 하나인 “모 베터 블루스” 등이 있다. 잘 만든 음악영화가 아니더라도 그 음악영화에 나오는 매력적인 인물들에 매혹되는 것은 예술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열정만큼이나 그들을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고난과 억압과 불행으로 인해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경외감과 함께 동정심이 생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창조작업은 모든 작업 중에서 가장 고통작업이랄 수도 있는데, 그 작업을 하면서도 생활과 사회적 관계가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행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셈인가. 그래서 지금도 예술가들은 사회에서 미친 자 취급을 받는가. 예술가들이 이 길에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 예술에 대한 엄격함과 진지함과 더불어 앞으로 겪어야하는 고통스러운 길에 대한 예고”였다. 
 한 인간을 창조적인 고난과 불운을 받아들이고 가는 고통의 길을 걷는 것은 그 인물들의 모든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를 사랑하게 만드는 이유다. 왜 신은 창조라는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토록 불행한 삶을 주는 것일까? 신도 질투하기 때문일까? 특히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에 대한 천재적 재능에 대한 한 인간의 질투와 절망감은 한 번이라도 예술의 창조적 영역에 도전해 본 사람이라면 모두 느끼는 점일 것이다. 예술적 재능은 전적으로 불평등하다. 거기에는 만인평등주의나 인성 개발론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듯하다. 그런데 항상 음악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과연 그들이 별나서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지 아니면 예술자체가 사회에 적응할 수 없게 만드는지 궁금해진다. 나같은 범인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그러한 재능과 별남이 어떤 이유인지 그들의 뇌 속을 들여다 보고싶다.  
          
25. 캠퍼스 드라마에 관하여

브렌든 프래스터? 조금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풋풋한 젊은이의 표상으로 몇 편의 캠퍼스 영화에 나온 키가 크고 잘 생긴 청년이다. 커다란 눈에 골격이 뚜렷한 신체, 선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잠재되어있는 눈. 그는 캠퍼스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과 상실감과 불안과 절망을 드러내주기 좋은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캠퍼스 영화는 아마 가장 만들기 힘든 영화중에 하나인 것같다. 말하자면 캠퍼스 안은 경기장에 모여 잠시동안에 자신의 팬을 응원하는 비자발적인 응원단원을 연상시킨다.   이상하게도 캠퍼스 안에는 극적인 요소가 결여된 것처럼 느껴지고 영화로 만들기에는 캠퍼스 안은 지나치게 비밀스럽다. 브렌든 프래스터가 나온 캠퍼스 영화 “하버드 졸업반”과 “스쿨 타이”에는 각각 인종차별과 현실적인 성공과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묻는 두 가지 주제을 가지고 있다. 캠퍼스안에 잠재되어있는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에 대한 불안과 고독감일 것이다. 친구와 함께 있지만 늘 외롭고 취해있지만 정신은 경직되어있다. 캠퍼스 안의 불안감을 다룬 영화는 지금은 아주 두각을 나타내는 에단 호크와 귀여운 여자애인    이 나오는 “리얼리티 바이트”가 있다. 네 명의 친구들이 빚어내는 현실적인 불안감을 경쾌하고 달콤한 갈등에 의해 표현한 영화다. 미국 내에서 캠퍼스 안에서 벌어지는 고요함과 외로움의 무게는(그들의 자살자의 숫자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많다는 통계에서도 비추어주듯이) 무력감과 심리적 압력으로 우리를 침묵하게 하고 무감각하게 만든다. 또 하나 캠퍼스안이 그 어느 곳보다 갈등적 요소나 영화적 소재가 부족한 것은 아마도 캠퍼스 안은 전적으로 규정된 틀 안에서 공부를 하기 위한 곳이라는 개념이 확실한 것같다. 매우 일상적이고 규칙적인 라이프사이클은 캠퍼스를 들여다 보는 우리들로 하여금 되묻게 되는 “내가 왜 여기 잇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해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는 떠나야하고 그 곳에서의 극적인 아무런 이야기도 기억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26. 기간적인 지향에 관하여 

영화를 고르는 데에 있어서 그 사람의 취향만큼이나 시대적 조류라든가 단기간의 독특한 흥미를 가지고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선택을 기간적인 지향이라고 부르는데 현 시점의 주류영화가 너무도 틀에 박히면 박힐수록 이러한 지향은 더 심해지는 것을 느낀다. 현 시점의 주류 영화가 꼭 어떤 스타일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단 기간이나마 지속적으로 발표되는 영화의 공통분모는 꼭 있기 마련이고 아류라든가 소규모 영화사들의 급조한 영화들마저 나올 때쯤 되면 정말 나만의 스타일의 영화를 찾게 된다. 최근들어 소프트한 연애 영화라든가 가족 영화 및 신선한 감각의 스피디한 영화가 많이 나오다보니 난 그 반대인 조금은 무겁고 조금은 남성적인 영화를 찾게된다. 물론 소프트한 영화라든가 가족영화가 꼭 그러한 남성다움을 나타내지 않거나 혹은 소프트한 영화가 진지한 문제가 회피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는 더 삶의 진실성이나 진지한 인생의 교훈들이 더 많이 있을 수도 있다. 요컨데 시점의 문제인 것이다. 
얼마전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뮤샤”는 이러한 기간적인 지향에 걸맞는 영화였다. 비록 화려한 인물의 질곡이라든가 갈등의 긴박감에 길들여진 나같은 사람에게는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조심스럽게 다가간다면 그 안에 담겨진 정수를 발견할 수도 있다. 많은 좋은 영화들을 보고 나면 느껴지는 것이지만 좋은 영화는 쉽게 평하거나 말할 수 있는 것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진실과 오류, 허위와 정수가 뒤섞여 있고 궁극적인 것과 찰라적인 것이 교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구로자와 아끼라의 “라쇼몽”처럼 인생의 진실은 보는 시점에 따라 상대적인 진실성을 띈다. 절대적인 가치일수록 그것은 더 상대적이고 또 분명한 오류일수록 그 속에는 진실의 정수가 숨겨져 있다. “누군가 너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는 오히려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한 남자가 위대한 영주의 흉내를 내기 위해 자신의 실체를 버리고 그림자를 따를 때( 마치 플라톤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그림자가 실체일 수도있고 혹은 실체가 그림자일 수도 있다. 모든 실체의 최소단위가 확률로서 존재하듯이 우리가  실제로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고 삶의 근원으로 삼고 있는 가치가 부분적인 지향이나 상대적인 확률이나 가능성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한 것을 인정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회의하고 또 불신해야하는가.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영화가 좋아지는 지향이 분명 주류에 대한 단순한 반항이어도 좋고 보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자기반성이어도 좋다. 무언가 절대적인 것을 바라기 위해 우리가 찾고 있는 이 길은 얼마나 가리워져 있는지..
맹목적인 확신에는 온 몸에 덮고 다른 이에게까지 배게 하는 비린내가 난다. 


27. 편안한 현실의 세계

한 때 삶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현실적 가치에 의거해서 정해질 때가 있는 것 같다. 직장에서 받는 월급의 액수, 아름다운 여자와의 데이트, 새로 나온 멋진 차, 명문 대학원의 졸업장, 주식투자 차익, 휴일의 레저활동, 쿨한 재즈카페에서 외국산 맥주를 마시는 일. 해외여행과 고급 옷. 자신의 삶의 자긍심이 그런 것에 의해 보충되거나 빈약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적 존재가 정신세계를 지배한다.”
나는 오랜동안 현실적이며  보조적인 삶의 악세사리에서 벗어나 있기를 원했던 것같다. 난 그저 윌리암 포크너와 말한 대로 “담배와 약간의 먹을 거리와 위스키만 있다면 행복한 기분이 든다”. 영화 속의 삶은 이러한 삶에 대한 무상감을 종종 그려내지만 피상적이고 포괄적인 수준에서 멈추고 만다. 영화 속에서의 현재는 편안함이 하나의 철학으로 대두된다. 편안한 집과 편안한 직장과 편안한 환경과 편안한 파트너와 편안한 종교와 편안한 예술. 불편한 것은 죄악이다. 주위를 돌아봐도 편안함은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형용사가 된다. 극한으로 몰아가는 것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영화속에서 극한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러한 불편함을 잠깐이나마 느끼게 함으로서 현실적인 편안함을 극명하게 느끼게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가 고민할 것은 아주 작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면들이 실제로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쑤셔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한참동안 이런 것들에 대한 무책임하고도 무력한 질문들의 연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편안한 애정영화를 기피했다. 환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꿈의 세계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내 존재자체가 의심스러웠다. 누구나 그러한 시기가 있는 것이다. 몇 개월 동안 방에서 틀어박혀 외국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 놓고 암호와 같은 외국어로 쏟아내는 록음악이나 재즈를 들었다. 조용히 술을 마시거나 사물을 앞에 놓고 스케치를 하거나 옛날 신문을 스크랩해놓은 것을 다시 읽l기도 했다. 그런 시기에 본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라는 영화다. 오드리 헵번의 영화고전“사브리나”를 해리슨 포드와 영국의 연인 “    ”이 주연한 리메이크 영화로 (그녀는 이 영화를 통해 영국인 전체에 실망감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 영화가 어떤 면에서는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한 변형이거나 경쾌한 통속적인 멜로 영화의 한 부분이라고 할 지라도 내가 그 곳에 본 한 인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사브리나 의 아버지가 그러한 시기에 만난 한 인물이다. 사브리나의 아버지는 대재벌의 전임운전사로서 큰 저택의 한 뒷 켠의 조그만 집에서 귀여운 딸고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인데, 대저택의 두 남자를 사랑하는 딸을 키우면서 (순전히 좋아하는 책을 읽기 위해) 평생 소박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으로 비추어진다. 평생 좋아하는 책을 읽기 위해 야망이나 사회적 출세를 거부하는 한 사람에게 내가 과연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까? 당신은 욕심도 없어? 저렇게 멋진 대저택에서 살면서 매일 좋아하는 파티를 열면 좋지 않을까? 당신의 딸은 또 사랑하는 사람과 신분차이 때문에 고민해야하는 것을 아비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해야할 것인가? 그러나 내가 그 인물에 동감하는 것은 진정한 편안함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은 도서관 사서가 되는 일이었다. 난 가끔 신부가 되기를 원하는데 거기에도 무언가 현실적인 편안함보다는 삶을 통해 구원받고 싶어하는 정신적인 편안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28. 제임스 스페이더에서 보는 젊은 지식인의 불안감

미국영화에서 보는 제임스 스페이더의 캐릭터는 참으로 독특하다. 어딘가 전형적인 미국인기질에서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난 몇 편의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를 시작으로 존 쿠삭과 열연한 “트루 칼라” 수잔 서랜든과 공연하여 인상적인 젊은이의 연기를 보여준 “하얀 궁전” 그리고 너무나 실망적인 캐릭터를 보여준 “스타게이트” (하지만 미국인 친구인 제임스 스페이더  매니아는 가장 멋진 영화로 꼽고 있으니 역시 개인적인 시각이 다양한 것같다) 그리고 조연으로 나온 “월스트릿” 혐오스럽게 변해버린 로브로우가 나쁜 영향을 미치는 “뱃인플루언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최근작 “크래쉬”까지...
그는 선생님인 두 부모사이에서 전형적인 여피들과 학구적인 도시인 보스톤( 하바드와 MIT가 있는 ) 에서 태어나 아주 지적인 모습을 가진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지닌 채 성장했다.
그의 꿈을 꾸는 듯한 눈빛과 연약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말과 말사이의 긴 공백, 깨끗하고 가볍게 물결치는 듯한 금발, 얇고 매끈한 입술선은 미국적이라기보다는 영국적이고 북방의 고요한 이미지를 나타낸다. 거기의 미국적인 중산층의 불안과 로맨티시즘과 망설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마쵸맨적인 강인한 이미지나 깡패기질적인 프론티어니즘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지식인과 여피의 불안한 현실이 있다. 그가 보여준 캐릭터는 대다수 미국 중산층이 보여주는 위험적인 현실의 표류가 담겨있다. 폭력적인 세계로부터 한 발 물러서 누군가 지켜주어야하고 건드릴 수 없는 얇은 껍질 속의 한 없이 부드러운 것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를 구원하거나 정의를 되살릴 수도 없어 보인다. 지속적으로 말을 더듬고 정의와 불의 사이의 관찰자로서, 불가해한 현실의 도착적인 이상증세로부터 한 발을 걸친 채 조용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꿈꾸는 자의 모습이다. 누군가에게 다가서지도 못하면서 유혹과 힘에는 저항하지 못한 불안정한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숨기고 싶은 불안한 미국이 그의 캐릭터안에 녹아있고 마치 정형화된 그 만이 변방의 민족들에게 껍질 속의 미국을 보게 만든다. 미국을 반성하게 하고 강자의 논리를 더욱 정당화한다. 실제로 그를 만나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가 말하는 언어 하나 하나가 흔들리는 미중산층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 사실 미국자체도 그러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확실한 해답을 가지지 못한 것같다. 그가 언제나 영화의 결말부분에서도 완벽한 결말의 웃음이나 해피엔딩의 행복감을 가지지 않듯이... 그의 선한 이미지가 언제까지 이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고뇌가 보다 보편성을 띄기 위해서는 내 안의 그처럼 약한 면이 더 이상 숨길 일이 아니다라는 걸 솔직히 밝혀야겠다. 그는 쉽게 그 캐릭터를 바꿀 수 없는 약점을 가진 동시에 그 만의 캐릭터로 오히려 람보의 미국이나 록키의 미국이나 로보캅의 미국이 아닌 평범한 젊은 지식인의 미국으로 만든다. 그것이 오히려 그를 미국 내에서 그다지 인기없는 배우로 만드는 이유 중에 하나다. 그는 너무도 보편적이고 뚜렷한 약점을 보여주고 있기에 동정은 받으나 자괴감을 느끼게 한다. 사람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들여다 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만큼이나 지적이고 미남인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고민으로 거의 파멸직전에서 간신히 빠져나올 때, 사람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확인하는 것같아 슬그머니 겁을 내는 것이다. 겁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의 연기는 그러한 면에서 너무도 자연스럽고 리얼하다.난 아무도 그처럼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미국인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유명한 미국배우들이난 외국배우들이 그러한 역할을 맡았더라도 그처럼 불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면서 1960년 생으로 올해 벌써 나이가 마흔이다.   

29. 왜 김 승옥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지 않을까?

한국의 60년대나 70년대 초반까지 소위 책을 읽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몇 몇의 이름들이 그 시대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사르트르, 니체, 솔벨로우, 솔제니친이니 하는 이름말이다. 분명 그들의 시대였다. 그들의 시대가 지나간 지금도 미국문학이나 철학뿐만 아니라 프랑스철학과 문학은 유난히 한국에서 호응을 받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들의 감수성이 우리의 서정주의와 잘 맞아 떨어졌다는데 하나의 이유를 찾고 싶다. 그 시기에 스물을 갓 넘긴 한 불문학도며  한 이상한 이방인이 우리의 권태롭고 혐오스러우면서 우울한 시대 속의 한 공간과 인물들을 그려냈다. 우연히, 이미 저변에 깔려 있는 한국의 최고 단편작가로 김 승옥이란 작가가 있다. 그 시기를 거쳐서 지금까지도 그를 최고의 단편작가로 꼽는데는 이러한 감수성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그는 초기부터  단편에서 가장 영화적인 텍스트와 유사한 글을 써왔다( 가장 스토리적으로 영화적인 작가는 역시 이 문열과 최 인호라고 생각한다) 그의 짧은 단편하나 하나가 내게는 영화적인 이미지로 떠오르고 천년의 한 사이클이 돌기 직전의 지금, 그의 소설은 하나의 멋진 영화적 이미지로 느껴진다. 그의 소설을 프랑스 영화처럼 읽혀진다. `무진 기행'의 그 허무한 안개의 이미지와 `서울 달빛 0장'이나 `서울, 1960년의 겨울'같은 을씨년스러운 작품은 최근의 사실주의적인 영화인 홍 상수의 영화작업과 그 맥을 함께 한다. 고루한 일상의 권태로부터 어떻게 우리가 저항할 수 있으며, 우리의 보이지 않은 적들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한 때의 김 승옥이 영화작업에 참여했듯이 그의 소설의 영화적 이미지들은 현재의 거의 모든 영화의 텍스트로 쓰이는 한 유형을 정의하고 있다. 그 즈음에 보았던 제 3세계의 영화 “일그러진 사랑”은 뉴질랜드에서 무국적을 가진 중국인과 크로티아인과 일본인과 뉴질랜드 원주민들이 한 곳에서 만나 벌이지는 낯설은 시대와 공간의 이미지와 유사하다는 것을 느꼈다. 한 남자와 여자가 한 도시, 한 공간 내에서 부유물처럼 적응하지 못하고 배회하는 것은 자신의 토양을 떠나 이국의 땅에서 배회하는 것과 유사하다. 한 프랑스계 미국작가가 말했듯이 이중이 언어를 쓰는 것은 놀랄만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자각하는 계기가 된다. 김 승옥의 소설 속의 인물은 확실히 한 공간 안에서 이방인처럼 이중의 언어를 쓴다. 한 쪽은 참기 힘든 현실의 속물적인 언어이며 다른 한 쪽은 이상을 지향하는 이데아의 언어다. 그 인물들은 자신의 터전을 이국처럼 느낀다. 한 세계 내에서 다른 세계 내에서 적응하기 힘든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의 글을 읽으면 김 승옥 소설은 정말 외국소설처럼 읽혀진다. 그는 현실을 너무도  낯설어하고 그 낯설음을 표현하는 일에 천재적이어서 더 이상의  소설은 쓰지 못할 것같다. 그래서 그의 소설을 진지하고 훌륭한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 누군가 만든다면 충분히 소화만 한다면 최고의 영화가 될 것인데.... 

30. 수잔 서랜든과 아름다운 중년

“델마와 루이스”와 “하얀궁전”과 “로렌조 오일”에 나오는 한 중년 여성이 있다. 눈은 너무도 커서 튀어나올 듯하고 입은 고집이 강한 듯 굳게 다물어져 있으며 말투는 강건하고 막힘이 없다. 거칠고 풍성한 붉은 빛나는 머리에 몸은 적당하게 단단하게 보인다. 다름 아닌 수잔 서랜든이라는 배우다. 그녀는 46년생 으로 올해 벌써 우리나이로 마흔 넷이 됐다. 그녀를 처음 안 건 제임스 스페이더와 공연한 “하얀 궁전”이고 그 보다 더 유명한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아주 한참 동안 잊고 있다가 최근들어 보았다. 그녀는 아주 실험적인 영화인 “록키 호러 픽쳐쇼`와 ”밥 로버츠“그리고 로버트 알트만의 ”플레이어“에 출연했는데 언더적이고 예술적인 영화에 자주 출연하고 상업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그녀는 흥행성적이 좋지 않은(혹은 염두에 두지 않는) 영화에 거의 출연한 셈이다. 그녀는 독립영화 쪽의 배우인 숀 펜, 팀 로빈스, 제임스 스페이더 ”같은 배우다. 헐리우드 한 쪽의 이 심각하고 진지한 배우들은 비슷비슷한 감독과 배우와 공연하곤 한다. 그녀를 처음 본 느낌은 뭐랄까 불같은 성격의 괄괄한 아춤마나 이혼녀를 연상시켰다. 에마 톰슨처럼 촌스럽지만 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글렌 클로스처럼 섬뜩하면서 차가운 매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캐시 베이츠처럼 카리스마를 지닌 것도 아니고 데미 무어처럼 도발적이면서 파워풀한 이미지도 아니고 시고니 위버나 린다 해밀턴처럼 여성전사의 모습도 아니고 홀리헌터처럼 새침하면서도 고집불통의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이미지도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배우가 되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서민적인 인상을 지녔다. 진정한 천하무적 아줌마의 이미지다. 말하자면 여성적인 매력이 많이 상실된, 그렇다고 남성적인 강인함이 깃들여 있는 것같지도 않고.....
그러나 그녀가 맡은 역할에 대한 연기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사실성이 있다. 매혹적이지 않지만 묘하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황에 젖어들게 하는 가장 사실적인 연기를 한다. 그녀는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상대역은 누구나 그녀로 하여금 어떤 사람이 되기를 강요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녀를 대할 수밖에 만든다. 그녀는 남자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고통 속에 있을 때도 자신의 파멸시키지 않으면서 극복해낼 수 있다. 그녀의 내적인 강인함은 위험속에 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아이가 죽어갈 때도, 나이가 어리고 삶의 조건이 차이나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고통받을 때도, 추악한 남자에 대한 과거의 기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도, 간교한 사형수의 꾀임에 빠져 동정심으로 분별력을 잃을 때조차 그녀에게는 절망하기 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서슴없이 행동하고 말하고 쏘아붙이며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녀의 파워풀한 이미지는 그러한 환경에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끈질긴 저항으로 인해 더 극대화된다. 한 여자가 마흔을 지나고 세상을 흐름을 알아낼 때쯤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인 지혜와 이해력과 인내를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수잔 서랜든은 모든 고통을 극복할 덕목을 모두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에게 신이 그 능력을 시험해 보듯 끊임없는 고통이 줄을 잇고 있으니 그것 또한 삶의 알 수 없는 아이러니 중에 하나다.

31.  소문보다 나쁜 영화들.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out of time" 이다. 포크 얼터너티브 음악의 최고봉인 ” REM"의 앨범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아무래도 스타일 상으로 고루한 취미를 풍자한 것이다. 그런 말을 듣고서 내가 바보처럼 웃는 것은 내 스타일이 그다지 싫거나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이나 음악 혹은 영화가 당대에 혹은 그 해에 상당한 인기를 얻는 것은 그 시대적 상황이나 유행에 보조를 맞추기 때문이다. 나는 서점에 가서도 신간코너는 거의 들여다 보지 않고 어둡고 조금은 닳은 듯한 겉표지의 책을 고르며 음악도 “예스터데이 패이버릿”을 즐겨듣고 영화는 새로나온 영화는 잘 안보는 버릇이 있다. 이를테면 충분히 음식이 충분히 익기를 기다리는 요리사처럼 내가 소화할 때까지는 충분히 묵혀두는 것을 좋아하는 셈이다. 또 하나 내가 새로나온 작품들에 대해서 성급하게 접근하지 않게 되는 이유는 소문 때문이다. 어떠한 좋은 책이나 음악이나 영화가 나오면 미디어나 술좌석이나 통신상이나 심지어 친한 친구들에게까지 그 이야기를 한다. 좋다거나 나쁘거나 혹은 수준미달이라거나 기대이상이라든가....
난 그 소문을 신뢰할 수 없고 또 시간이 그 소문을 훌륭하게 필터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충분히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그 쪽은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소문과 새로움에 호들갑을 떨지 않아서 좋은 점은 하나 더 있다. 남들이 이미 잊어버린 좋은 수작을 발견하는 기쁨이다. 주로 외국영화라든가 오래된 한국영화 또는 제3세계영화들인데 책에 대해서는 그것이 더 심하다. 그런 것을 발견하면 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한 기쁨으로 혼자 소중하게 간직하곤 했다. 그리곤 언젠가 빛을 보기를 바라고 실제로 그러한 작품들이 많이 있다. 정말로 좋은 작품은 먼지만 걷어내면 시간에 따라 더 반짝거리는 보석이 된다. 그 반면 소문만 잠깐 무성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한 영화가 의외로 쉽게 잊혀져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나 책이 되어 시체 안치소에서 있거나 화장할 때 불쏘시게로 쓰이게 된다.

소문보다 대단하지 않은 영화는 물론 개인적 판단에 의거한다. 누군가 매니어가 내 이러한 판단에 돌을 던지거나 야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개인에게서 무시당하는 영화는 무언가 다른 취약점이 있지 않을까? 어떤 경우에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고 나쁜 사람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고 그런 건 평가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친구가 한 사람의 좋은 친구는 아니다” 이것은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과 현상에도 적용된다고 생각된다. 변명은 이쯤 해두자.

내가 생각할 때 소문보다 가장 형편없는 영화는 아마도 “고스트: 사랑과 영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당시 열 여덟 살이던 나는 영악해져가는 나 자신과 친구들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사랑에 눈을 떠야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그 때 당시의 이 영화는 엄청난 붐을 일으켰고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흘리게 했고 주제가와 새로운 신성 데미무어가 일약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신학자들은 뉴에이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난 그 당시에는 그 영화를 안보았고 떠들썩거리는 사람들과 흥분해하는 여자 애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한 참 지난 후 난 그 영화를 비디오로 여러 차례 보면서 그 감흥을 느껴 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도식적인 이야기 전개, 신비주의, 애절한 사랑이 왜 그렇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다만 후피 골드버그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연기 외에는 별 반 느낌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신기한 죽은 영혼과 산 사람의 사랑, 친구의 배신, 복수의 구성의 연결고리가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그랬을까? 첨단 그래픽의 환상적인 이미지조차 내게는 새롭게 느껴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들의 대사는 얼마나 매끄럽지 못했는지... 지금 다시 보면 무언가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그 시기에는 그랬다. 제리 주커 감독의 연출력이 그나마 드러난 단점을 커버해줄 정도여서 다행이었다. 편견이었다면 편견이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 영화를 말하지 않으니 그 또한 신기한 일이다. 

두 번째 소문보다 재미없었던 영화는 바로 “비트” 였다. 난 앞에서도 밝혔지만 “비명도시”를 본 후 김 성수 감독을 주목해왔다. 그는 한국 영화에서 스타일이 독특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에는 감각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독창적인 시스템적 사고가 있다. 그는 마치 카프카와 같아서 아주 현실적이고 단순한 이미지를 다루더라도 불가해한 세계와 닿아있다. 그의 시각은 분명하지 않으나 혼란스럽지 않으며 어둡지만 칙칙하지 않다. 적어도 “비명도시”속에서는 그렇다. 그런 그가 최초의 영화 “비트”를 내놓았을 때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아마도 허 영만의 골수 매니아라면 아무도 그의 원작을 능가할 만한 영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허 영만의 “ 벽” “48+1”“ 비트` ”아스팔트의 사나이“ 원작 모두 그 자체로서 하나의 만화의 최고 단계를 만들어냈다. 그러한 작품을 김 성수 감독이 다시 건드렸을 때 그건 절반의 성공에 지나지 않았다. 절반은 이미 허 영만이 해 놓은 것이다. 거기에다가 정 우성과 고 소영( 정우성은 모르겠지만 원작을 보면서 고 소영을 떠올리지 않을 사람이 누구인가?)과 임 창정과 유 오성이 있다. 감독이 할 일은 그러한 다 된 요리를 진열해 놓고 구경만 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잘 된 원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과는 다르다. 그 소설 속에는 화려하고 극적인 요소가 너무나 은유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잘못 만들면 멍청한 아이들 영화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지만 꼼꼼하고 냉철하면서 지독하게 인내심강한 박 종원감독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비트“에는 메타포가 없기 때문이고,( 실제 원작에는 수 많은 메타포가 들어있다. 가령 현실 속에서 억누르는 학교와 가정문제, 또 권력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의 생존방식등) 실제로 ”비트“ 속에는 화려한 연기와 이야기만 있을 뿐 아무런 연출적인 메타포가 없다. 여전히 난 오랜동안 그 영화를 보지 않았고 애들이 모두 떠든 다음 그 영화를 한 네 번쯤 보았다. 나는 ”비트“를 영화로서 실망하기보다는 감독에게 실망했다. 그의 이러한 아쉬움은 ”태양은 없다“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그만의 스타일을 잃어가는 것같아 안타깝다. 어떤 면에서 ”비트“는 확실한 ”쿨“한 영화지만 소문보다 좋은 영화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좋은 감독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같다. 

32. 소문은 없지만 좋은 영화들

몇 명의 매니아를 제외하고는 안 본 영화 중에 “델리카트슨” 이라는 영화가 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영화를 알고 있는 것같다.  이 영화는 최초로 만화에서 원작을 따왔는데( “비트”와 비교하게 된다) 난 그 영화를 처음 보는 순간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연출력과 시스템 구성력 그리고 아이디어에 대해서 끊임없이 칭찬을 늘어 놓았었다. 유명한 배우가 나오는 것도( 외국인의 입장에서) 원작자체도 그 다지 극적인 것이 아니고 현실적인 이슈를 반영해서 논란거리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다.일반적인 체험의 영역에는 아무 것도 호소할 것이 없다.  다만 그 영화를 보고는 한 장면과 이미지와 편집에서 하나의 완벽한 영화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누군가 말하듯이 “영화는 이 정도는 돼야한다”. 따로 떨어진 인물들과 사건을 절묘하게 병치해서 완벽하게 구조적으로 짜맞춘 이런 영화를 보고 천재들의 솜씨에 놀랄 뿐이었다. 

그리고 또 인상깊게 본 영화는 바로 가난하고 촌스러운 스코틀랜드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breaking the wave"란 영화다. 이 영화 속에서는 한 장면 장면이 특이하게 팝음악과 함께 시작하는데, 여주인공의 연기가 화면 전체를 압도하고 그녀의 기도와 독백, (기도의 본래의 목적대로 이 영화에서의 기도는 신과 인간의 끊임없는 대화로 나타난다) 그들의 대화라든가 카메라 워킹이 마치 그들의 상황보다 인물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 보려는 노력을 하는 인간의 눈을 의식하게 한다. 인간의 불행과 그것을 극복하고 또 허물어져가는 삶의 군상의 모습을 통해 인간과 운명, 신과 사회, 사회전체의 삶과 인간의 개인적인 삶이 맞부딪치는 갈등의 구조를 흔들리는 프레임 속에서 깊이 있게 담아내고 있다. 진지하지만-- 요즘 사람들에게는 지루할 지도 모르는 영화지만-- 여주인공의 멋진 연기가 화면하나에 가득하게 끊임없는 여운으로 남게 되는 영화다. 끝까지 그들의 생각과 상황을 따라가게 되면 그 여배우가 한 사람의 머리 속에 깊게 각인되는 영화다.  
  
33. 문학과 영화의 악수

내가 한국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불만은 내가 한국 소설을 읽을 때의 불만과 정반대의 상황이라 스스로가 당황할 때가 있다. 한국영화는 역사를 잊어버리고 있고 한국 문학은 여전히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가 분명 당대 현실을 반영하고 또 그래야만 하지만 우리 영화는 현실의 별 대수롭지 못한 사건들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똑같은 소재를 되풀이해서 만들고 있고 한국 문학은 여전히 6.25나 분단 혹은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역사적 상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러나 둘 다 공통점은 현 한국문학의 창의성과 신선한 기법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영화를 만들 훌륭한 문학적 텍스트가 빈곤하고 영화인은 문학인들이 여전히 다루고 있는 분단이라든가 해방이라든가 월남전이라는 상실의 시대를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다수 영화관객이 더 이상 분단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용납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영화는 문학적인 토대를 가지지 못한 채 엉뚱한 주제와 형편없는 감수성과 말도 안되는 구성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고 문학인들은 그러한 한국영화를 무시하고 좋은 외국영화만을 찾는다. 이러한 영화와 문학의 반목은 결국 현 한국영화의 한탕주의나 아류작의 범람으로 만들었다. 그 나마 임 권택이나 박 광수가 문학적인 화해를 시도하고 있고 대부분의 실패지만 장 선우는 장 정일의 작품을  현대성의 영화작업의  텍스트로 삼고 있다. 최근의 본 영화 “아름다운 시절”은 더 이러한  쓰라린 내 추측을 확인시켜 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시절`의 진정 아름다운 화면과 영화적 완성도는 인정하면서도 주제가 가진 풍부한 경험적인 진실성이 부족하다고 말을 모은다. 분명 신인감독으로서는 ”아름다운 시절“은 잘 만들고 전 편의 땀과 정신과 고통이 스며든   멋진 영화이고 역사에 대한 시각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 무언가 건질 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속에 알맹이는 아마도 우리 문학에서 다루는 주제의 무거움이나 진지한 탐색이 반이라도 반영되었더라면 새로운 시대의 영화적 기초가 되었을 것이지만, 결국 영화는 영화자체로서만 만족해야한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지금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대에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예술적인 매개체로서만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뉴스는 지나간 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말하지 않고 역사는 그러한 무지를 비웃는 듯이 되풀이 되어서 그 책임의 미청산을 묻고 있다.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 자에게 그 무지를 반드시 되묻는다'. 역사보다 더 좋은 영화적 소재가 어디있는가? ( 최근에 본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좋은 영화는 역사를 잃지 않는다.라는 말을 새삼 실감케 한다. ) 좋은 영화가 역사를 다시 찾고 좋은 문학이 현재의 통찰력을 영화에게 전해줄 때 우리의 예술적 감흥뿐만 아니라 삶 자체도 행복해질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그것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제발 이제는 문학과 영화가 화해했으면 좋겠다. 

34. 고독한 영화보기

도시의 하늘을 본다. 낮에는 회색이고 밤에는 별 한점 없는 까만 하늘 속에 비행기가 희미한 불빛을 점멸하면서 날아간다. 도시에서 더 이상 밤에 별을 보기를 그만두었다. 이 주택가에서 그나마 하늘과 가까운 곳에 사는 나는 밤에 홀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시원한 바람을 쐰 후 문을 잠그고 내 안의 방으로 깊숙히 들어와 버린다. 일이 없는 날에는 특별한 전화가 없다면 하루종일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거나 영화를 본다. 그리고 커피를 끓여마시고 가까운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여행에 관한 계획을 세운다. 다시 햄버거를 먹고 책을 보고 뉴스를 보고 세 종류의 신문을 보고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자기 전에 양치를 하고 잔다. 그 속에는 코소보 난민사태나 폴란드 총리의 방문이나 안드레 아가시의 재기가 있을 뿐이다. 나와 직접적인 사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고 또 세상은 그렇게 날 움직인다. 삶의 변화는 현재의 삶의 기득권을 담보로 잡는다. 나나 당신이 현재의 편안한 일과 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순간적인 절망상태나 외로움 혹은 증오나 매혹에 빠질 수는 있지만 당신의 상황을 바꾸어 놓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영화관을 찾는 이유다.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 누군가에게 일어난다면 재미있으니까.

35. 잘만 킹에 대한 한 마디

우리는 하나의 생각이나 기호에 대한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을 “편집광”이라고 부른다. 내 경우에는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편은 아니다. 다만 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하고 하고 있으니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음악이나 영화 도 좋아하지만 편집광적인 태도는 아니다 다만 그런 것이 내가 좋아하니까 늘 함께 있고 싶고 늘 그것을 하지 않더라도 몇 개월 혹은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다시 그걸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 가끔은 그것이 싫증이 나니까 일부러 멀리 떨어져서 있으려고 한 적은 있다. 하지만 본능이란 면에서는 어떠한가? 윌리엄 포크너가 “사람은 먹어대거나 여덟시간 동안 성교를 할 수 없어요”라고 인터뷰에서 말한대로, 사람은 1차적인 욕구에 끊임없이   집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누군가 에로티시즘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욕망으로 그걸 다루지, 그것 자체만으로 끝없이 다루게 되지 않게될 것이라 예상한다. 아니면 비즈니스 차원에서 그러하든지.... 
그러나 잘만 킹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아주 특별한 예외에 속한다. 그는 초기에 아주 자극적인 영화인 “나인하프 위크”에서 에드리안 라인과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에로티시즘 영화의 서막을 열더니 그 후로 “투 문 정션”시리즈와 “레드 슈 다이어리”에서 지속적으로( 솔직히 아주 싫증이 나도록 ) 에로티시즘에 편집광적인 관심을 가져왔다. 사실 모든 본능에 있어서 자극의 강도가 커질수록 반응은 점점 무디게 되어있고, 사람의 성적 본능이라는   게 어느 순간이 지나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둔감하게 되어있는데 잘만 킹은 지치지 않은 관심으로 유독 그러한 영화만을 발표하는가에 대해서 지속적인 의문을 가진다. 하지만 내가 잘만 킹을 단순히 3류 영화작가라는 비난에 수긍하면서도 마구 폄하하기 싫은 이유는 다른데 있다. 만약 그가 다룰 수 있는 분야가 에로티시즘이라면 그는 다른 어떤 감독보다 솔직하고 깨끗하게 그것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는 다른 전공영화작가들이 흔히 만드는 B급 영화보다는 잘 만드는 에로티시즘 영화를 만든다. 그의 영화를 오래 많이 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먼저 그 성적으로 끈질긴 관심에 지겨워지겠지만 그의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에로티시즘에 대해 추하다거나 혹은 저질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매력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그러한 영화를 여전히 만드는 데 있어서 비즈니스적인 면만이 작용하는지 아니면 그의 지속적인 관심이 그러한 영화를 계속 만들게 하는 지 궁금하다. 만약 후자라면 그는 분명히 특별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인지 점점 궁금해진다. 또 하나 진정 그는 인간의 에로티시즘을 통해서 무얼 말하려고 하는 지도...

36. 외국영화에 대한 자막에 대해서

미국인들에게 외국영화가 어필하지 못하는 이유를 유학중인 친구가 말해준 적이 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헐리우드 영화보다 재미있는 외국영화가 많지 않은 것때문이고 ( 이미 많은 외국영화인들이 지적한데로 각 국의 영화산업이 헐리우드 영화의 무차별 융단폭격을 받아서 초토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둘째는 자막문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막이 정확하게 그 뜻을 전달한다고 해도 번역문제와 영화장면의 시간적 제한에 의해서 그 영화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극복하는 내 나름대로 방법으로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 영화를 다시 보곤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그것도 신작영화나 이미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구할 수 없게 된 것은 어쩔 수 없이 자막에 의존해서 영화를 볼 수 밖에 없다. 차라리 영어자체를 아예 모르면 모르겠지만 순간순간 비유로 말하는 영어와 자막이 엉뚱하게 다를 때는 화가 나고 영화를 보면서도 “ 이 영화를 다 이해하기는 틀렸군”이라고 지레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사태까지 이른다. 헐리우드 영화대사의 특징 중에 하나는 아마 다양한 비유가 쓰인다는 것이다. 가령 얼마 전에 본 마이클 키튼 주연의  “페이퍼”같은 영화에서 자막은 “거의 맞아” 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내가 알아듣기로는 “10개 중에 7정도는 맞는 것같아” 라고 말하고 다음 대사 자막에는 느닷없이 “아마 8정도 겠지”라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다. 원본 시나리오와 자막을 비교해가면서 영화를 보면 더 가관이란 걸 경험해 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긴 자막도 중요하긴 하지만 그들의 숨겨진 로직에 “우리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리의 언어를 완벽하게 배우렴”하는 무서운 파워플레이가 담겨있는 것같은 생각이 든다. 언어문제로 귀결되는 이 권력과 파워문제는 한국 언어를 배울 필요가 없는 우리의 영화 현실과 예술적 현실이 안타까워진다. 그리고 수많은 한국작가들이 그들의 모국어로 걸작을 쓰면서도 세계적인 작가가 못되는 현실이 더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본에도 물론 훌륭한 작가가 있지만 우리나라 작가들의 진지한 작품은 소위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일본 작가나 미국  작가보다 더 진지하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것이 더 많다. 언제까지 우리나라 예술도 변방에 머물러야만 할 것인가? 자동차와 반도체 하나만 수출하면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고체계가 우리를 변방으로 머물게 할 것이다. 그리고 사족을 붙이자면 언제가 학교 선배가 “베를린 천사의 시”의 처음 장면에 나오는 독일어 대화들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 영화를 정말로 재미있게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는 언어와 정신에 대한 파워게임이며 보이지 않는 문화전쟁이다. 

37. 눈물을 흘리게 하는 영화

나는 오랜 동안 영화를 보면서 울지 않았다. 내가 눈물을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주변의 상황에 따라 분명하게 그 사건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1988년 4월 국회의원선거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을 흘린 뒤 정확히 1998년 9월 어느 수요일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 무려 11년의 시간 동안 나의 눈물을 내 몸 속에서만 돌고 있었다. 그 동안 내 눈은 한 번도 눈물에 의해 씻겨진 적이 없었다. 정말로 슬픈 일도 없었지 않았지만 내 마음 속은 여전히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러한 어느날 ,11년이 흐른 뒤  난 별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1998년 눈물을 쏟아 냈는데 아마도 눈물이 내 몸속에서 포화상태가 되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같다. 영화를 볼 때 자주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 것은 그 이후 우습게도 자주 일어났다. 물론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영화를 보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내 생활에서도 좋은 일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1988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눈물을 너무 흘려서 더 이상 나올 눈물이 없었을 때부터 나의 마음은 닫혀있었고 무언가 궁극적인 것을 잡고 싶었다. 또 그 시기는 어지러운 대학환경과 풍요한 자본주의가 흘러넘치는 사회내에서 은근한 반감이 생겼는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자마자 난 줄 곧 슬픈 영화를 보곤했다. 비디오샾의 아주머니는 그런 나를 독특한 성격의 남자라고 웃으며 말했고 난 그러한 영화들이 그 동안 닫힌 내 마음을 녹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성취향의 영화를 보았는데 얼핏 생각나는 영화는 소피 마르소가 주연한 “파이어 라이트”와 “안나 카레리나”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 여인의 초상” 장 만옥과 종 초홍이 주연한 “유금세월” 그리고 존 말코비치, 글렌 클로스, 우마 서먼, 미셀 파이터, 키아누 리브스까지 총 동원되는 “위험한 관계”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의 주변이야기를 다룬 “일 포스티노”등의 영화다. 그러한 영화를 보고 마음을 녹이다니? 친구들은 나다운 발상이라며 웃어댔고 나도 그런 영화가 실제로 내게 어떠한 기분을 느끼게 했는지 잘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마다 사람의 기분은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화학작용이 아니라 그것은 통해 더러워진 마음과 딱딱하게 굳어진 심장이 씻겨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나를 소중히 생각하게 한다는 증거였으니......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슬프게 했던 영화는 다니엘 데이 루이스 주연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였는데 , 그 영화를 보고 왜 11년 전의 일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글쎄....

38. 종교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

잠이 깊이 들었다. 가끔 근처에서 새벽의 어둠을 뚫고 빠르게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들리고 요즘 들어 부쩍 늘어난 오토바이의 이상한 경적소리도 들린다. 새벽에 문득 깨어 밖으로 나가면 어둠을 산화하듯 수없이 반짝이는 십자가들. 누군가 세상이 무덤을 보인다고 빈정거리기도 하지만, 수많은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지 않은 것같다. 신이 인간을 구원하면 좋겠다. 누군가가 자신의 권위와 지배를 위해 만든 신과 교회가 아니길 빌며.....
난 새벽에 십자가를 보며 신성한 사제가 되길 원했던 내 어릴적 꿈을 생각했다. 나는 조용하게 묵상하기를 좋아하고 기도와 찬송을 지속하는 신성한 목사가 되기를 원했었다. 문득 지금도 내가 목사가 되지 않더라도 그러한 삶을 조금씩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한다. 묵상과 기도와 구원과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삶. 
한국적인 종교의 특성이 한 때 지나친 보수주의와 억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라고 회의를 품은 적이 있었다. 한국 기독교의 세례를 받은 나로서는 한국교회의 지나친 권위성과 목사 중심주의 , 율법의 완고성, 금지와 타부의 많은 조건들, 성서의 대한 자의적인 해석, 정치적 종교적 행보들이 내게 그것들로부터 객관적인 시선을 갖도록 나를 조금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그 시기에 나는 종교적인 권위와 위압적인 율법보수주의에 대한 희생을 치룬 사람들에 관한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첫 번째 영화는 나다니엘 호손의 원작으로 유명한 “주홍글씨”였고 또 하나는 초기 미국에서 벌어졌던 종교적 마녀사냥을 다룬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한 “크루서블”이다.(크루서블에서 나오는 마녀 재판관이 바로 호손의 할아버지였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주홍글씨”는 원작과는 조금 견해를 달리했지만 진정한 사랑과 종교적 권위주의 사이에서 번민하면서도 결국 인간의 순수한 사랑이 종교적 원리주의보다 숭고하다는 이념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녀사냥의 그 어리석은 집단적 광기가 결국에는 얼마나 무지하게 사람을 집어 삼키는 가에 대한 반성이 있다.( 이후 장미의 이름에서도 이와 같은 마녀 사냥의 장면이 나온다). 신비성에 기초를 둔 종교는 그것이 현실과의 거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언제든 신의 이름을 빌려 인간을 광기로 몰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자각해야한다. 얼마나 많은 나라와 민족과 인간들이 그걸 깨닫기까지 수많은 희생을 치루었는가를 생각해야한다. 그것은 우리의 많은 피를 빨아먹었던 좌, 우익의 이념만큼이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이성을 넘어서는 맹목적인 광신은 그 믿음의 대상이 옳고 그르던 간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를 죽이는 무기가 된다. 그러나 한국에 들어오는 모든 종교가 그 권위와 힘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압제하고 억누르며 보수화되면 증오를 부추기는 것을 보면 놀랍게도 “핵폭탄” 보다 더 무서운 생각이 든다.  
 
39. 음모를 다룬 영화에 대해서

대학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철학과 문학과 사상에 대해서 배울 무렵, 한창 유행한 철학은 이른바 포스트 모더니즘이었고 그 중에서도 단연 “미셀 푸코”가 논의의 대상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미셀푸코를 읽은 것도 아니고 또 읽었다해도 전부 이해한 것은 아니기에 말하기에 신중하지만 그의 글 중에 뚜렷한 이미지는 바로 “원형감옥”의 이미지다. 죄수들은 누구나 원형감옥에 의해 노출된 채 있지만 자신을 감시 하고 통제하는 자가 누구인지 볼 수 없다. 우리를 구속하고 지배하는 권위는 그처럼 언어와 종교와 의술과 예술에 까지 모습을 숨긴채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최근의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음모 이론이 바로 그러하다. 줄리아 로버츠와 멜 깁슨이 호연한 “컨스피러시” 라든가 숀 코넬 리가 열연한 “더 록”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인종차별이라는 엄청난 일을 기획하는 보이지 않은 권력의 실체가 핵심이 되는 “챔버” 그리고 카프카의 소설들, 조지오웰의 소설에 나오는 “빅 브라더” 그리고 “닉슨”과 J.F.K 그리고 최근의 영화 “LA Confidential"등 모든 비밀 문건과 비밀 조직과 정치적 조작을 일삼는 ”왝 더 독“등의 영화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정치 공작등 모든 음모들에 의해 비밀리 진행되는 살인과 납치 실종 사건등이 하나의 거대한 감옥을 연상시킨다. 더 이상 모든 사람의 죽음이 확실하지 않고  조직사회가 진행되면서 과연 누가 그 정보과 조직을 움직이면서 권력을 휘두르는지 우리는 점점 알기를 포기하고 주저하게 된다. 정말 조직 자체는 그 자체 내에서 권력이 발생되는가? 또 오늘은 어디에서 어떠한 음모가 권력의 힘으로, 밝혀지지 않는 음모과 사건을 일으키는가? 우리는 결코 그러한 권력의 지배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일이다.

40. 버림받은 사람들에 관한 영화들

우리사회엔 누구나 자신의 상처와 짐을 자기가 지고 간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지고 갈 수도 없고 쉽게 상처를 남에게 치유해 달랄 수도 없다. 또 그러한 상처는 쉽게 아물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너무도 이기적이고 오만해서 남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쉽게 다가가지도, 도와주지도 않는다. 다만 그러한 상처가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할 뿐.....
사회에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상실한 채 싸늘하게 식어가는 지하 뒷골목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의 관심은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자기 파괴의 세계로 다가가는 것에서 유일한 해결책을 찾는다. 
“리빙 라스베거스”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한 남자가 이미 상실할 것조차 없이 유일하게 육체를 통해 살아가는 창녀간의 치유를 그린 멋진 영화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서 이 외수의 소설들을 떠올리곤 한다. 알콜중독자와 창녀, 그 자체가 소외된 인간의 전형으로 그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줄 때 그들은 더더욱 천국과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장국영과 유덕화가 나온 왕가위 영화 “아비정전”도 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머니로 버림받고 방황하는 인물과 술집 무희와 늘 도시의 밤 속에서 바다를 그리워하는 야간 순찰원과 사랑의 상실을 슬퍼하는 여자들이 벌이는 이 버림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가슴 한 가운데서 무언가 얹힌 것같은 답답함과 애절한 느낌을 갖게한다. 버림받은 자의 이야기를 다룬 또다른 영화는 “아이다호”이다. 두 젊은이가 사회 속에서 어떻게 떠돌아 다니면서 버림받은 영혼을 치유하는가에 대한 풀리지 않는 길위의 중얼거림같은 영화다. 주위를 돌아보라, 누군가 세상에서 친구에게서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있다. 그것이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고 우리가 아는 누군가일 수도 있다. 문득 꽃동네의 알콜 요양원에서 더러운 바지를 끌며 담배 한 가치를 얻어 피우고자 하는 한 버림받은 남자를 떠올린다. 천국은 가난한 자의 몫이다. 

41. 영화관에 혼자 가서 영화보는 일

가끔 영화관에 들러 우두커니 스크린을 보노라면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차라리 배낭하나를 메고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들 때가 있다. 조명이 꺼지고 주위에서조차 조용한 침묵이 시작되고 커다란 스크린은 밝아지고   양쪽 스피커에서 음향이 들려오면 가슴은 벅찬 기대감으로 뛰고 온 감각은 영화 속으로 몰입한다. 가장 최근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중에 기억나는 영화는 프랑스의 젊은 배우 “뱅상페레` 가 주연을 하고 마티유 카소비츠가 연출과 각본을 쓴 ”증오“라는 영화다. 시종일관 이유없는 긴장과 조그마한 사건이 연속되는 이 젊은 영화는 부유하는 젊은이들의 증오와 고뇌와 뒤죽박죽된 인생에 대한 다큐멘타리식 구성의 영화다. 일정한 줄거리도 없고 극적인 갈등도 없고 주인공들의 캐릭터도 모호하지만 권총 한 자루를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긴장감은 영화 한 편이 어떠한 사전 계획없이도 긴장으로 몰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 영화다.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젊은 영화라고나 할까? 영화 내내 언제 당겨질 지 모르는 방아쇠 때문에 마음을 졸이는 한 젊은 남자의 모습이 우습게 느껴졌다. 스크린이 꺼지고 조명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서둘러 일어서서 극장을 나오면서 난 두가지를 생각한다. 내가 왜 거기있었지? 내가 왜 영화를 보기 위해 이 곳에 왔을까?하는 생각을. 내가 독특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점점 영화와 내가 분리되는 것같은 심정이 들 때가 있다. 더 이상 내 삶과 공유할 영화가 없을 것인가? 어쩌면 ”증오“에서 처럼 우리를 이 허무한 공간 속에 놓아두고 아무 일없이 지내게 하는 삶이 좋을 수도 있다. 
아무 사건도 없이, 조용하고 소박하게 사는 삶을 간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엉뚱한 이야기겠지만, 우리의 삶이 영화보다는 더 리얼해야하지 않을까?

42. 독서와 영화보는 것과의 차이

고교 수업시절부터 몰래 책을 읽는 버릇이 몸에 배인 나는 대학 때에도 별반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강의보다는 도서관을 더 드나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도서관의 엄청난 양의 책을 보고 황홀해했고 지금도 여전히 근처에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책의 향기에 취해 살고 있다. 대학 4년 동안 솔직히 내가 강의에서 배운 것은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유명한 노교수는 책을 읽지 않고 수업에 들어올 바에는 차라리 강의에 들어오지 않고 책만 읽으라고 내 맘에 맞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책을 놓게 될 쯤에는 꼭 다른 일에 빠져들었다. 기타를 치면서 곡을 만들거나 아니면 연애를 하거나 했다. 결국 언제나 책으로 회귀를 했지만. 한 6개월 쯤 책을 놓게 되자 난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엄청난 양의 영화를 골라 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는 내가 책으로 읽은 것도 있고 또 “비트”처럼 만화로 본 것도 있다. 글로 된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 보는 즐거움은 순간 순간 특이한 감흥을 준다. 가령 호손의 “주홍글씨” 데이빗 카버의 “숏컷” 장 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이 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하 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나보코프의 “로리타” 플로베르의 “보봐리부인” 카프카의 “심판”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스코트 핏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등은 독서적인 체험과 영화적인 체험이 전혀 다른 것임을 재삼 인식하게 한다. 불행하게도 원작보다 좋은 영화는 한 편도 없었지만 그런대로 “장미의 이름”이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충분히 원작의 감동을 전해주었고 ”경마장 가는 길“은 조금 미달한 감이 있고 ”숏컷“은 원작보다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했으며 ”보봐리 부인“이나 ”아담이 눈뜰 때“는 너무도 달라서 영화를 보면 원작따위는 읽고 싶지 않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본 후에 영화를 볼 때 제일 안타까운 점은 오랜동안 생각을 하거나 다시 뒷부분으로 가서 지나쳐 버린 부분을 들쳐볼 수 없다는 점이다. 순간 순간 시간의 저편으로 지나가버린 영상은 책처럼 순간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또 그 때 그 때의 감동이 원작보다 생략된 부분이 많아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장면을 편집되어 잘리는 것을 볼 때 실망감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특히 문체가 아름답다거나 구성이 완전하게 실험적으로 구성된 원작을 서사적인 구조로 뒤바꿀 때 생기는 단절은 설명하기 힘든 문제 중에 하나다. 독서와 영화보기는 엄연히 존재하고 또 서로 어느 정도의 화해 없이는 좋은 영화로서 태어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존 그리샴이나 마이클 크라이튼 같은 작가가 영화에서는 더 큰 매력을 주는 지 모르겠다.

43. 콜드 나이트 라는 영화- B급 영화의 수준

무명감독의 무명 배우, 조연으로 나오는 배우가 그 유명한 “v"라는 영화의 마크 싱어 정도, 그리고 에로틱한 연기하나만으로 줄기차게 가슴을 드러내는 샤론 트뢰즈 가 조연으로 나오는 정도. 콜드 나이트 라는 영화가 있다. 전형적인 B 급 영화인데 나는 거기에 나오는 희안한 정사장면과 아름답고 골치 아픈 라틴계 여배우 때문에 그 영화의 팬이 되었다. 영화의 모티브는 마치 윌리엄 버러우즈가 애용하는 정신 통제 기구에 의해 한 남자의 머리 속에 마이크로 필름처럼 한 여자를 살해하는 영상이 밤마다 꿈으로 리플레이되는 상황을 그린 에로틱 미스테리영화다. 사실 그 영화를 처음보았을 때는 깨끗한 영상과 아름다운 라틴 여자 때문에 보았는데 그 중간의 정사신이 마치 ”B"급 영화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으면서 펼쳐지기에 아찔한 생각이 든 적이 있다. 그 영화가 성공적인 영화이든 그렇지 않던 간에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무언가 볼 거리를 제공하기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사진가의 움직임이나 여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멋진 오토바이, 풀장이 딸린 낭만적인 저택, 농염한 정사신, 카메라의 단순한 조작에 따른 기괴한 정신통제장치라는 개념, 반복되는 환영등 분명히 저예산과 엉터리 기획과 어줍잖은 신인을 가지고 급조한 영화라는 생각이 분명한데 놀랄만한 것은 그러한 영화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어딘가 볼만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저에산 저급한 수준으로 만든 B급 영화와는 수준을 달리한다는 생각을 그칠 수가 없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하루에도 수십편의 영화가 만들어졌거나 지고 있고 거기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한 영화들 중 성공적인 영화는 많아야 두 세편 정도나 될까? 헐리우드의 놀라운 힘은 빌보드의 놀라운 힘의 원천인 수많은 무명밴드와 인디음악에서부터 시작하듯 B급이나 C급의 영화나 독립영화에서 그 원천을 찾을 수 있을 것같다. 영화산업은 분명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고 수익성도 불투명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러한 시도가 없을 때는 앞으로의 영화산업은 스크린쿼터제가 지속된다고 해도 별 수 없이 사라져 갈 것이다. 난 가끔 엉터리 한국 에로영화를 보면서 차라리 저런 에로영화를 만드느니 가난하고 실험적인 젊은 영화인들에게 스스로 그러한 비디오 영화를 찍도록 후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럴려면 엉터리 한국에로영화를 보기 보다는 차라리 유치한 한국 실험영화를 보는 것이 장래를 위해 낳으리라는 생각이다. 

44. 한 숨겨진 영화감독에 대한 짝사랑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내가 알고 있는 그 영화감독의 영화는 단 세 편 뿐이다. 그러나 처음 “악어”를 볼 때 난 이 감독이 누굴까 궁금해했고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볼 때는 “한 번은 실수는 눈감아 줄 수 있어, 그러나 스타일은 여전히 아름답군” 했고 “파란대문”이 나왔을 때 나는 이 감독을 짝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영화를 보든 영화작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그만의 스타일이 있다. 김 기덕 감독의 스타일은 소외된 자에 대한 동정어린 시선과 물의 이미지에서 그 만의 스타일이 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 낮고 비천하면 찢기고 버림받으며 모욕당하고 동물적인 곳에 가있다. 악어에서는 물에 빠진 시체를 꺼내 팔아먹는 부랑인, “야생동물보호구역”에는 프랑스에 미술유학을 왔다가 사기꾼이 되어버린 사나이, “파란대문”에서는 시골 바닷가 한 여관에서 여관 투숙객에게 몸을 파는 창녀.모두가 사회의 아웃사이더로서 소외된 인간들을 그리고 있다. 그 한편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그는 물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있다.  “악어”에서 한강 주변의 터전 속에서 깨끗한 수중촬영으로 물의 투명한 이미지를 그려내는가 하면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는 프랑스의 보트 하우스에서 물의 이미지를, “파란 대문”에서는 바닷가 근처에 공간을 설정함으로서 물의 이미지와 함께 있다. 그렇다면 이 두가지 문제를 ( 비천한 자에 대한 시선과 물의 이미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물은 원초적인 생명이미지와 맞닿아있다.  물은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된다. 인간과 생물의 대부분은 물로 만들어져 있고 태아는 물 속에서 성장한다. 물은 순결하고 (물은 씻는다의 이미지가 강하다) 생존시키며 풍요하게 하고 흐름을 말한다. 이러한 물은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이미지로서 인간다운 삶, 정상적인 삶의 흐름에서 제외된 인간을 돌아보고 구원해줄 수 있는 이미지로서 나타내어진다. 인간의 죽음은 제일 먼저 물(피)의 흐름이 멈추어 지면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삶의 본능적인 모습이 물과 함께 태어나며 물과 함께 사라진다. 강과 호수 와 바다는 인간이 꿈꾸는 거대한 자궁이다. 회귀할 수 없는 인간의 가장 순결한 상태에 돌아가기 위해 김 기덕은 물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끌어대며 그 인간의 가장 순결한 상태를 그리워하는 인물들로 가장 비인간화된 인물들을 설정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가장 비인간화 된 인물은 건조하고 메마르며 딱딱한 인간들일 것이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그리고 이 번에도 그 짝사랑이 손을 흔들어 줄 지 궁금하다. 

45. 말없는 자들의 슬픈 독백

침묵하는 자는 아름답다. 영화 속에서도 그렇고 일상 속에서도 그렇다. 특히 요즘처럼 소음과 같은 말들과 한 번 되씹어 볼 말이 부족한 시대에 그러한 침묵은 화려한 수사적인 말보다 더 깊은 마음을 전해준다. 생각하기가 싫고 고요하게 자기 자신과 사회와 영혼에 대해 말을 건네기를 두려워하는 지금 오늘도 거리에는 알 듯 모를 듯한 말과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시간에도 어김없이 말을 해야하고 남의 말을 들어줘야 한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 순식간에 열리는 회의와 미팅, 인터뷰, 잔소리, 질문들... 모든 것이 날 지치게 하고 신경을 날카롭게 한다. 언어는 소중히 다루어져 해야하고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한다” 잘은 모르지만 카톨릭에서는 “침묵”의 수행이란 것이 있다고 한다. 오랜동안 말은 절제한 채 오직 마음과 묵상과 기도로만 자신을 정화시키고 수양시키는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면벽”이라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일체 언어적인 속임수나 언어의 지나친 남용으로부터 자신의 영혼이 훼손되려는 것을 막는데 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말을 아끼고 침묵으로 말을 하려는 인물은 그 자체로 어떤 위엄과 공포감 혹은 외로움이나 상실감을  표현해준다. 또 그러한 인물들은 독특한 성격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묘한 흡인력을 가진다. 프랑스적인 이미지를 많이 차용한 베트남 감독인     의 “씨클로”는 내가 본 동양영화 중의 최고로 꼽고 싶은데, 아마도 그 속의 갱으로 나오는 양 조위의 침묵적인 연기는 너무 강렬해서 다른 영화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하더라도 그 이미지에 부합한 매력보다는 덜 하단 느낌을 받았다. 혼란기의 베트남 사회에서 칼과 총으로 자신의 삶을 대신하는 그는 본래 시인의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인과는 거의 반대쪽인 킬러의 모습으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코피를 막지 못하고 콜걸들의 뒤를 봐주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으면서 삶자체를 죽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의 입에 나오는 모든 말보다 침묵이 그의 모든 상황을 전달해주고 있다. 별 호기심없이 본 영화“ 하나비”에서 각본 감독 주연 편집을 담당한 기타노 다케시니케다는 딸의 죽음과 아내의 불치병 사랑하는 동료형사의 살해를 통해 벌어지는 비극을 검은 선그라스와 침묵과 껌벅이는 눈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그의 입술은 무언가 늘 말하려하지만 말할 수 없고 터져나오는 비명과 한숨을 틀어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같다. 어쩌면 입이 닫힐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속에서 터져나오는 말과 분노를 잠금으로써 내면 깊숙이까지 그것을 육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다. 날 정면으로 쳐다본 채 입술을 꾹 다물고 마음으로 자신의 하고 싶은 할 말을 전하는 사람들.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많은 말들이 진정한 마음 속에서 울려나오는 침묵의 진실의 언어들을 틀어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46. 멍청한 배우들의 몰락

배우들의 변화를 시대별의 흐름대로 일견하다보면 배우도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급격히 낙하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랜 기간동안 변신과 자기노력과 관리를 게을리 하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빛이 나는 배우가 있다. 영화 및 연예계란 냉정해서 그러한 몰락에 더없이 차디찬 시선으로 내치거나 혹은 쓸쓸하게 뒷 편으로 물러나게 한다. 반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번도 나태를 용납하지 배우들은 나이가 들수록 스크린을 꽉 채우고 지배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고 보면 나이를 먹어가면서 식상해지지 않거나 그 스타일이 멋있어 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 것같다. 

미키 루크라는 배우가 있다. 폴란드 계통의 냉소적인 입술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만한 강렬한 눈빛과 섹시하면서도 사근사근한 작은 목소리. 복싱으로 다져진 근육질의 날씬한 몸매 어쩌면 남자배우가 가져야할 많은 조건들을 가졌는지 모른다. 그는 한 때 담배를 물고 있는 커다란 액자로 시내의 거의 모든 카페의 벽에 걸려있었다. 그의 눈빛과 입술과 담배는 섹시한 남성의 한 모델이었었다. 그는 모든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의 모든 영화는 그의 이름자체만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지성미와 탄력적인 연기력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그는 주연으로 나온 거의 모든 영화를 가장 중요한 연기로 압도하지 못했다( 아마 상대여배우나 성적으로 특별한 것을 원하는 제작자나 그러길 부추기는 관객들을 압도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언제나 상대방을 쏘아볼 뿐 인간적이고 극한까지 영화를 몰고가는 영화적인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폰섹스를 원하는 소수를 위해 속삭였고, 그의 육체는 에로틱한 몸짓으로 더 이상의 연기를 필요치 않았다. 그는 에드리안 라인과 잘만 킹의 합작품인 자극적인 “나인 하프 위크”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때도 누구든 그가 새로운 영화에서 카리스마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이후로 “이어 오브 드라곤”과 “엔젤 하트” “성프란체스코”등에 연속해서 등장했을 때까지 그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러한 그의 연기가 진정한 그의 내면적인 집중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 스타일에 대한 무분별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스타일은 영화의 주변부로 점점 밀려나갔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더욱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고 제대로된 연기는 나오지 않았다. 이젠 그는 더 이상 중요한 연기자들과 공연할 수도 없으며 성적매력을 바탕으로 한 에로틱 영화에서조차 더 이상 출연하지 못한다. 요즘 비디오 샾에는 영화에서조차 걸리지 못한 신작 B급 영화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걸고 걸려있다. 아무도 그의 영화를 보지 않은 채 옛 기억을 하는 몇 사람에게 선택되기를 기다리며.....   시간은 극복하는 자의 몫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 기본으로 돌아가야할 것같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러하듯 예술은 현재와의 싸움이 아니라 미래와의 싸움이며 돈이나 명예 혹은 인기와의 싸움이 아니라 시간과의 지속적인 싸움이다. 

ps. 찰리 쉰과 몇 몇의 홍콩 영화배우들도 마찬가지다. 

47. 철학과 영화의 화해

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로 철학적이다, 라고 누군가 말했듯이 영화라는 예술에도 철학이 깊게 깔려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화는 실제로 산업과 대중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철학적 요소를 반영하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요건이 많은 것같다. 또 흔히 철학적인 영화는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 기본적으로 많은 생각과 사고를 요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 안에 그것을 담아내기에는, 또 철학적인 화두를 이해시키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 인간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창조적인 영역이기에 그 속에 철학을 숨겨두고 있다. 이러한 철학의 실재적이고 영화적인 표현은 찾으려하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같고 그것을 창조단계에서 영화작가 스스로가 찾으려는 과정에서 비로소 영화 속의 철학이 담아지는 것같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철학의 본래 의미, 측 인간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문제, 인식의 문제, 종교의 문제, 형이상학의 문제, 윤리의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물음의 해답을 위한 지혜의 영역으로서의 철학을 의미한다. 실제로 미셀 푸코의 권력과 언어의 문제는 앞에서 다루었다시피 현재 음모론을 다루는 모든 영화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고, 실존주의는 최근의 스티븐 스필버그의 잃어버린 휴머니티 작업“ 쉰들러 리스트”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영화에서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고 형이상학적인 구원의 문제를 다룬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이나 박 상륭의 소설을 극화한 “유리”같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물론 그 것이 정확하게 철학적인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는가에는 의문이 남지만) , 찰리 채플린은 근본적으로 권력과 사회모순을 신랄하게 코미디로 그리면서 철학의 매운 맛을 보여주었고 윌리엄 와일러 같은 감독은 인간과 신의 고통스러운 만남과 좌절을 통해 그 철학적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 쪽은 영화의 본래적 의미에서 더욱 철학적이다. 레오 캬락스의 3부작은 인간의 사랑과 소외, 또 진정한 인간의 실존적인 조건에 대해서 끊임없는 독백과 수다로 풀어내고 있고 독일의 빔 벤더스는  “파리 텍사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 영혼 구원의 노정을 진리와 사랑을 찾고자하는 구도자적 시선으로 철학의 어원적 의미에 가장 근접하게 접근하고 있다. 반면 에밀 쿠스트라자는 “집시의 시간` ”언더그라운드“에서 사회와 인간이 어떻게 왜곡된 진리에 속거나 그 거짓 진리의 화려함에 속아 스스로를 오류에 빠뜨리는가를 우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우스운 것은 최고의 철학서적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들고 읽는 순간에 떠오른 자괴감과 권태를 극복해야하듯이 철학적인 언어를 많이 가미한 영화들은 영화자체에서 철학서적과 유사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생각하는 사람은 ”철학이야기“을 쓴 윌 듀란트였는데 아마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인 철학을 어떻게 하면 보다 민중들에게 알기 쉽고 사랑하게 만드는 가의 문제가 영화를 더욱 영화답고 영화 스스로가 자신의 위치를 보다 높은 곳에 위치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다. 영화도 마찬가지고 모든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철학의 광의에서 보면 인간의 진실된 진리추구와 삶에 대한 사랑스러운 시선이 거짓없고 정확하다면 어떠한 철학적 표방이 없더라도 분명 그 것은 철학적이다. ”시네마천국“에는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모든 철학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는 것같다. 철학은 분명 거짓보다는 진실에 있고 눈 속임보다는 정직함과 강건한 정의에 있는 것같으니까....


48.  동양의 여배우들

한 동안 "임 청하"라는 배우가 젊은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 전에는 왕 조현이라는 배우가 있었고 그 전에는 몇몇의 아름다운 홍콩여배우가 그 때 그 때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일본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가 금지된 우리로서는 우리네 여자들과 흡사한 이러한 홍콩여배우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장 만옥과 종 초홍과 임 청하가 이 그만큼 인기가 있었던 이유가 아마도 우리와 같은 동양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동양여배우로는 홍콩은 장 만옥, 중국은 공리, 베트남에는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린파파야 향기"와 "씨클로"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여배우( 이 배우에 대해서는 한 장을 배려할 정도로 깊게 빠져있다) 등이 생각난다. 내 개인적인 기호이기는 하지만, 홍콩 영화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그들영화는 너무도 도식적인 작품들이 많아서 내 흥미를 끌지 못한다. 진지한 영화는 그 만큼 찾아보기 힘든 것이 아쉬울 뿐이다. 또 그 만큼 많은 영화가 한 꺼번에 비슷한 장르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니면 그만큼 진지한 영화가 관객들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기도 하겠지만. 내게 처절함은 어떤 면에서 진지함의 한 증거다. 영화 속의 진지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앞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체험의 일부분을 건드린다. 꿈은 꿀 수 있지만 자신의 꿈처럼 무엇인가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난 상상보다 리얼리즘을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장 만옥의 "아비정전"과 "유금세월"의 연기는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 장 만옥의 아름다움은 그의 캐릭터가 아주 리얼하다는 데 있다. 그는 사랑을 할 때도, 이별을 할 때도 과장되거나 움츠러드는 법이 없다. 어떻게 보면 그는 아주 촌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 속에 어딘지 모르는 순수한 모습이 있다. 세상에 버림받고 또 현실을 억척스럽게 살아나갈 때조차도 그녀는 나의 누이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착하기만 하고 늘 억울한 일을 당하지만 묵묵히 세상을 견디어나가는 누이의 모습, 그대로다. 그녀의 화려한 옷을 입히더라도 그녀는 어린 시절 냇가에서 가재를 잡고, 밭을 갈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학교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 시작하고 아버님에게 혼나 뒷 동산 나무 밑에서 울고 있는 나를 달래 밥을 먹여주던 누이의 이미지가 그녀의 모습 속에 있다. 중성적인 이미지의 임청하를 너무도 좋아하던 선배가 있었다. 왜 임청하를 좋아할 까? 나는 처음 주 윤발이 짝사랑하던 한 여배우로서 알고 있었는데, ( 주윤발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무렵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임 청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쓰고 있다) 그 이후 무협영화에서 양성을 지닌 마녀로 등장하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임 청하를 왜 좋아할까? 난 그녀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데, 그래도 난 임 청하를 좋은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그녀를 인정하게 한 영화는 없었다. 그리고 보니 중국여배우를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결국 내가 그 나마 인정하는 여배우는 장 만옥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난 정말 내가 생각해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서 이대로 잘 살아갈까 걱정된다. 


49. 한국영화를 꼭 봐주어야만 하는가?

인터넷이나 PC 통신이 그 사용자가 많아지면서 무엇보다 바뀐 점은 동호회가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 전에는 자신의 뜻과 맞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았고 또 연락하거나 만나기도 쉽지 않았지만 현재는 통신업체와 인테넷 관련업체의 상업적인 의도와 맞물려 자신의 뜻과 기호와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기 아주 쉬워졌고 그런 사람이 모인 동호회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특히 대중문화에 관한 동호회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생겨나 이젠 그러한 동호회가 하나의 권력 및 이익집단으로까지 발견하고 있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통신 상의 동호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동호회같은 집단적인 담론이 어느새 인지 모르게 우리를 기호를 바꾸어 놓고 또 하나의 인식의 저변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점점 빠르게 변해가는 시대와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암묵적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이 새롭게 생성되고 있다. 최근의 강 제규 감독의 "쉬리"를 보았다. 물론 아주 퍼스널하게 말하지만 난 이전까지 강 제규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그저 '은행나무 침대"를 기억할 뿐이다. 그가 놀라운 흥행감독이고 인내와 능력을 갖춘 감독이란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다만 나는 강 제규 감독이 만드는 영화장르를 좋아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 "쉬리"의 열풍에 대해서는 좋은 영화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군데 군데 노력한땀과 눈물의 수고가 배어있다. 열악한 상황에서 찍은 영화라 더 빛을 발하는 것같다. 기존의 한 석규의 연기는 좀 모자란 감이 있지만, 이 영화는 연기를 주축하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넘어가기로 하자. 그리고 스토리는 한국영화 자체가 가진 자체 모순이니까 그렇다고 넘어가자. 그런데 나는 의문이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왜 그 영화가 그토록 많은 관객을 몰고 왔을까? 통일에 대한 문제? 치밀한 사전 준비? 생동감있고 빠른 스피드 전개? 특이한 소재와 그걸 풀어가는 해법? 물론 모든 것이 해당될 수도 있고 모든 것이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최다 관객이 좋은 영화를 선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분명 베스트 셀러도 좋은 예술이고 최다 관객수를 기록한 영화도 좋은 영화다. 기본적으로 예술이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예술의 성공의 부분이다. 하지만 결국 좋은 영화, 혹은 예술이란 앞에서 시간의 심판을 받는다. 누군가 당대에 그 토록 인기있던 것들이 30년도 견디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과연 1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살아남는 예술작품이 얼마나 될까. 나같은 "out of time"에게는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광기에 가까운 동일한 기호에 두려움을 느낀다. 더구나 "쉬리"가 상연될 당시의 그 열화와같은 통신과 인터넷, 언론매체,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는 그러한 열광은 나로 하여금 영화에 집중하기 보다는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인 공기와 사회현상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더군다나 헐리우드 영화의 흥행기록을 깨기위해 부풀려진 애국심도 거기에 한 몫으로서  그러한 열광은 예이츠가 아일랜드에서 느꼈던 것같은 감정을 갖게 한다. 예술이 시간에 저항하는 동안 나는 이러한 집단화된 천편일률적인 광기에 저항하고 싶다. 지금은 참겠다. "쉬리"가 10년만 견디어 주면 난 미련없이 그 모든 걸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강 제규 감독의 진 면목을 발휘하기 까지 더 기다리겠다. 그때까지 난 한국영화를 꼼꼼히 보면서 조용히 사랑하겠다. 


50.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맛

한 동안 모 외국회사 전산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나는 일의 특성상 야간에 작업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 거대한 외국 유통회사 전산실은 하루동안 일어난 매출을 각 부문별로 업데이트하는 작업을 했는데, 재고와 매출과 입점된 상품과 팔린 상품과 회계상에 일어난 트랜잭션을 각 라이브러리로 분배하고 업데이트하고 삭제하고 연산하는 작업을 한 프로그램에 대해서 간단히 엔터키 만 몇 번 눌러주면 되는 아주 간단하면서, 시간적인 여유도 많고 또 전산시스템에 대한 무제한의 사용권한이 있었다. 난 인터넷에서 영화 대본을 다운받아 그 시간 동안 거의 일 주일의 한 편의 오리지날 영문 시나리오를 읽었다. 영문을 읽다보면 두 가지를 느끼는데, 하나는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통해 영화의 한 장면 장면을 떠올리면서 진정한 연기자들의 능력을 캐취할 수 있는 것과 둘째는 번역의 허술함과 답답함이다. 제한된 장면에 말도 아닌 글로 대사를 처리해야하는 한계가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오리지날 시나리오에 나오는 멋진 대사들이 한 줄의 축약된 표현으로 나타내어질 때는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난다. 원문 그대로를 듣고 전부 이해할 만한 외국어 실력이 안되는 것도 부끄럽지만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통해 느껴지는 작가들의 언어를 빚어내는 기술에 대해 글쓰는 데에 있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게 된다. 한국영화에서 진정한 시나리오 작가들이 굶주리고 천대받고 있는 동안 아무도 한국영화의 미래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몇몇 오리지날 시니리오는 그 시나리오 자체만으로도 엄청한 감동을 준다. 로브 라이너가 각색을 한 "어 퓨 굿맨"같은 영화 시나리오나 언어의 마술사라는 노라 에프론의 "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시애틀에 잠 못이루는 밤" "유브 갓 메일" 대니 보일 감독의 " 트레인스포팅" "쉘로우 그레이브" 소더버그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 그리고 조엘, 에단 코헨 형제의  "바톤 핑크"( 실제로 주인공은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다) 는 모두 시나리오 상으로 좋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최근에 본 "이보다 더 좋을 순없다"는 오리지날을 볼 때마다 자꾸 잭 니콜슨이 생각나니, 역시 잭 니콜슨은 명배우이고 좋은 영화에 좋은 연기를 할 줄 안다. 영화보다도 영어를 배우고 싶어 읽은 "비포 선 라이즈" 나 " 아메리칸 프레시던트"는 별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마도 앞의 영화는 너무도 설익는 점이 드러났고 두 번째 작품은 등장인물의 연기가 별로 훌륭하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영화와 오리지날 시나리오가 훌륭한 영화는 역시 "카사블랑카"였다. 한 세 번쯤 읽고 나서도 난 그 영화에서 거의 영화라는 예술장르의 모든 재미와 감동과 극적인 흐름을 모두 배웠다. 릭이란 멋진 캐릭터와( 험프리 보가트말고 또 어떤 배우가 이 역을 이 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 전쟁이라는 무대, 아름다운 사랑과 삼각관계, 고통과 허무함과 시니컬한 인생의 모습, 복수와 용서, 희생과 배신, 남자들간의 진정한 용기라는 모든 요소가 절묘하게 융합된 이 영화와 시나리오에서 어쩌면 영화라는 이 예술장르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모든 장르의 예술이 총합된 예술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자신의 인생에서 예술이 얼마나 가치있느냐고 묻는다면 난 서슴없이 "카사블랑카"를 보라, 고 말하겠다. 앞으로도 더 좋은 영화와 또 그 시나리오가 나오겠지만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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