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경 인도에서는 호랑이 사냥이 유행하였는데, 사냥꾼의 대부분은 인도인이 아니라
영국인이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 통치하면서, 인도에 거주하는 영국인들 간에는 지배자로서의 권위를 한
껏 과시하는 풍조가 성행하였는데 그 희생양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호랑이였다. 당시 인도
북부 지방에는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나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으로 인하여 불과 몇
년 만에 호랑이 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말았다. 호랑이 사냥 방법은 이랬다. 우선 많은 사람
들을 동원하여 1∼1.5m 높이의 흰 천을 들고 일렬로 늘어서서 전진케 한 다음 서서히 둥
근 반원을 그리며 포위망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냥꾼이 호랑이를 찾아 나
서고 발견하게 되면 즉시 흰 천으로 에워싼 쪽으로 몰았다. 희한하게도 호랑이는 흰 천만
보면 뛰어넘거나 돌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흰 천을 호랑이에게 '공포의 장막'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영국인 귀족이 '세련된' 자세로 호랑이에게 엽총 한방을 쏘아 쓰러뜨렸다.
그런 뒤 영국인 귀족은 죽은 호랑이를 한쪽 발로 밟은 자세로 기념 사진을 찍는 게 관례였
으며, 이렇게 잡은 호랑이의 가죽으로 벽면 또는 거실 바닥을 장식하는 게 유행이었다. 인
도는 나라만 잃은 게 아니고 호랑이도 잃은 것이다. 이런 약소국의 아픔을 우리 나라도 똑
같이 겪었다. 구한말 우리 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의 기록에 군데군데 호환에 대한 한국인
의 두려운 정서가 언급돼 있을 만큼 1900년대까지만 해도 이땅에 호랑이가 제법 많이 살
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일본인들은 인도의 영국 귀족처럼 호랑이 사
냥에 적극 나섰으니 이때부터 호랑이 수난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땅에서 호랑
이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일본인들의 호랑이 사냥은 장식품 수집 차원은 물론 한편으
로 한민족의 강건한 민족 의식 말살 저의와도 맥을 같이했다. 호랑이는 일찍이 단군신화에
도 등장할 뿐만 아니라 민간 신앙에 있어서 산신과 동격시되기도 한다. 또한 우리 나라 선
각자들이 한반도 모양을 호랑이로 묘사할 만큼 호랑이는 우리에게 있어 단순한 동물 이상의
영물이었다. 일본인들은 이 점을 간파하고 호랑이 말살에 나섰던 것이다. 남한에서는 1922년
경상북도 경주의 대덕산에 수컷 한 마리가 발견된 이래 더 이상의 포획 기록은 없다. 북한
에서도 1946년 평안북도 초선에서 한 마리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호랑이는 멸종되고 말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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